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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주의 재발견

눈물과 분노의 연기 女心 빼앗다

글 | 진혜린 자유기고가 사진 | 동아일보 사진DB파트, SBS 제공

입력 2012.07.17 11:36:00

연기파 배우 손현주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편안한 남자의 대명사이자 능청스러운 서민 연기의 달인이지만, 지금껏 보여준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새로운 반전. 손현주가 SBS 월화드라마 ‘추적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손현주의 재발견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간, 인터뷰 장소 근처에서 손현주(47)를 만났다. 열 걸음쯤 떨어진 거리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서글서글하던 손현주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극 중 백홍석의 슬픈 눈빛만 남아 있었다. 현재 출연 중인 드라마 ‘추적자 THE CHASER(이하 추적자)’에서 숟가락 두 개를 들고 오열하던 모습과, 자신의 딸을 죽인 PK준(이용우)에게 총구를 겨누던 서슬 퍼런 눈빛이 오버랩되며 배우 손현주가 아닌 극 중 백홍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단 1회 만에 손현주 주연의 ‘추적자’가 화제를 모았다. 흔치 않은 드라마 소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류 스타나 꽃미남, 꽃미녀 없이도 작품을 가득 메우는 손현주의 소름 돋는 연기력이 탄성을 자아내게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는 발군의 연기 실력으로 인정받아왔지만 ‘추적자’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역시 손현주’라는 느낌보다 ‘손현주가 이 정도였어?’라는 느낌이랄까.
‘추적자’ 방영 이전에는 기대감보다 우려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많이 거론됐던 ‘스타성’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의 연기력에 대해 이견은 없었지만 미니시리즈를 원톱으로 이끌어나가기에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여타 연기파 배우들의 그것에 비해 카리스마나 장악력이 떨어지지 않나 싶은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시청자들로 하여금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로 느끼게 만든 열쇠가 됐다. 그가 아내 사망 후 식탁에 차려진 밥상 앞에서 숟가락 두 개를 들고 눈물을 쏟아낼 때, 딸의 사망 신고서에 ‘아버지’라는 세 글자를 쓸 때, 그 떨리던 손에 시청자들은 함께 울었다. 가슴을 치고 분개할 만한 상황이 연속될수록 ‘나라도 그랬겠다’는 현실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배우 손현주가 가진 힘이다.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 주는 감동
수염은 손본 지 며칠이나 된 듯 아무렇게나 자라 있었고, 눈시울은 붉게 얼룩진 얼굴로 기자와 마주 앉은 그의 모습은 배우 손현주보다 오히려 백홍석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만큼 현실과 드라마의 경계를 허물며 자신이 맡은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다는 뜻일 게다.
“이번 드라마는 감정 잡기가 많이 힘들었어요. 1회 첫 장면은 시간상으로 4회에 나오는 장면인데, 그걸 제일 먼저 촬영했거든요. 처음부터 권총을 들고 복수심에 가득 찬 모습을 촬영해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죠. 그래서 연예 소식 프로그램의 인터뷰는 되도록 안 하려고 했어요. 촬영 장면이 어둡다 보니 감정 조절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울다가 웃을 수 있는 내공은 아직 없어서요. 매 순간, 극 중 아내와 딸 생각만 해도 저도 모르게 이 모양으로 변해버려요.”
매회 방송이 끝날 때마다 배우 손현주에 대한 극찬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겸손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명품 연기’ ‘명품 배우’ ‘미친 연기력’ 등의 수식어를 붙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모든 배우들은 다 미쳐서 연기한다”며 몸을 낮췄다.
사실 그가 맡은 백홍석이란 인물은 배우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역이다. 뇌물 한 번 받아본적 없는 모범 형사이자 화목한 세 식구의 가장인 홍석은 딸을 뺑소니 사고로 어이없이 잃고 그 충격으로 힘들어 하던 아내까지 잃은 후 거대 권력과 맞서 싸운다. 소시민의 털털한 모습과 가족을 잃고 복수심에 날을 세우는 카리스마를 동시에 연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또한 자식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은 살인자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슬픔과 분노를 대사 한마디 없이 숟가락 두 개를 들고 표현해야 하는 장면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동안 작품을 하면서 아내나 어머니를 먼저 보낸 설정은 있었지만 아이를 먼저 보내본 적은 없어요. 저도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아이가 먼저 갔다는 생각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극 중 딸 이름이 수정인데, 그 역을 맡은 친구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았어요. 그래서 촬영하는 동안만이라도 꼭 옆에 두고 있었어요. ‘내 딸이다, 내 딸이다’ 수없이 되뇌었죠. 아내와 어머니를 잃는 그것과는 다른 아픔….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었죠. 대본에 ‘소리 내지 않고 운다’는 대목이 있었는데, 실제로도 그 상황에서는 소리가 안 날 것 같아요.”
그는 아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빙의’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 같았다.

손현주의 또 다른 이름, 아저씨
딸의 생일날 친구들을 불러 생일 잔치를 열어주고, 딸이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티켓을 건네주는 아빠. ‘아빠 같은 남자랑 결혼할 거야’란 딸의 말에 뛸 듯이 기뻐하는 아빠. “아빠는 딸에게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라며 자식 앞에서 강인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아빠. 드라마 ‘추적자’ 속의 손현주의 모습이다.
그동안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한 아빠, 남편의 모습을 연기해온 손현주는 그 자신 역시 다른 이웃집 남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호주에서 성악을 전공한 아내와 결혼한 지도 16년이 지났다. 슬하에 중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을 두고 있는 손현주는 평소 슬리퍼에 운동복 차림으로 동네 순댓국집에서 지인들과 소주 한잔을 즐기는 소탈한 남자다. 아내가 자신 때문에 음악을 포기했다는 걸 잘 알기에 평소 아내에게 “물 떠와” 식의 명령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단다. 촬영장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딸에게서 걸려온 전화만큼은 예외.

손현주의 재발견

‘추적자’가 스타 배우 한 명 없이도 인기를 끌 수 있는 건 손현주의 명품 연기 덕분이다.





“딸이 한번은 전화해서 PK준을 한 대 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딸이 ‘추적자’를 꼭 챙겨 보거든요(웃음). 그런데 이미 PK준이 죽은 상황이라서 그럴 수도 없었죠(웃음).”
드라마의 분위기 때문인지 어둡기만 했던 그의 얼굴이 딸 이야기가 나오자 미소로 가득 찼다. 그는 아빠로서의 모습 또한 남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제딸은 극 중 아이와 비슷한 또래예요. 아이가 커가면서 안쓰러워 보일 때가 많아요. 우리나라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게,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는 게 아직까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만약 제가 없으면 이 아이가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서글퍼지기도 하고요. 그런 요인 중 가장 큰 부분이 교육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촬영이 없는 날도 아이를 볼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밤늦게 학원에서 지쳐 돌아오는 모습이 안쓰럽죠. 극 중에서도 딸의 일일계획표를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빽빽하게 수업 일정이 적혀 있는 거예요. 이 시대 중고생들의 안타까운 현실이에요. 짜여진 틀에 얽매여 생활하다 보면 ‘앞으로 자립적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걱정도 들고요.”
그러면서 점점 손현주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대로는 안 된다, 무엇인가 변해야 한다. 아이들의 미래가 밝아졌으면 좋겠다”며 성토했다.
손현주의 따뜻한 마음은 그동안 남들 모르게 조용히 실천해온 선행으로도 알 수 있다. 현재 그는 국제한국입양인봉사회 등 봉사 단체 홍보대사를 비롯해 크고 작은 기부(그는 ‘채움’이라고 표현했다) 등을 통해 꾸준히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부터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고맙습니다 사진 공모전’에서는 ‘얼굴만 비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에 직접 찍은 사진을 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에반젤리’를 빼놓고는 그를 설명할 수가 없다. 에반젤리는 손현주와 홍창진 천주교 신부가 공동 단장을 맡고 있는 장애어린이합창단. 합창단 창립 기금 마련을 시작한 2004년부터 지금까지 에반젤리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기금 마련을 위해 홍대 앞에서 자선 호프집을 열기도 했고, 단막극 출연료 전액을 기부한 적도 있다. 올해로 8년째를 맞은 이 합창단은 이미 70여 명의 전국 회원을 가질 정도로 부쩍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KBS 전국민 합창대회’ 예선전에 참가한 모습이 ‘남자의 자격’을 통해 전파를 타면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손현주는 합창단 단장으로 무대에 올라 “아이들이 예심을 통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악보를 볼 줄도 몰라 노래 한 곡을 다 부르기 위해 6개월 넘게 연습해야 한다”며 “아이들을 위해 ‘땡’이나 ‘불합격’이라는 말을 조그맣게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해 웃음을 선사했다.

내일은 없고 오늘만 있다

손현주의 재발견


손현주는 방송계에서 ‘감독들이 찾는 배우’ ‘후배 연기자들이 닮고 싶어 하는 배우’로 손꼽힌다. 1991년 KBS 공채 탤런트 14기로 출발해 연기 인생 20년을 맞은 손현주. 입을 모아 그를 값진 배우라고 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름으로 내건 이렇다 할 만한 작품이 없다. 드라마 ‘장미빛 인생’에서의 얄미운 불륜남, ‘첫사랑’에서의 주정남, ‘앞집 여자’ ‘솔약국집 아들들’ 등에서 선보인 연기는 대중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이처럼 그는 비록 원톱은 아니지만 조연이라도 200% 소화해내며 주인공 못지않은 조명을 받았다. 이른바 ‘주인공을 받쳐주는 주인공’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서 있던 그였기에 이번 드라마 ‘추적자’는 그의 연기 인생에 있어 분명 터닝 포인트가 될 법하다. 하지만 그는 연기에 대한 욕심 말고는 특별히 원하는 게 없어 보인다.
“요즘 일주일 내내 드라마가 풍성해요. 그러니까 다 보세요. 타 방송국 드라마도 보시고, ‘추적자’도 보시고, 재방송도 보세요. 요즘 영화배우들도 많이 나오잖아요. 여기 오는 길에 ‘신사의 품격’의 장동건 씨를 봤는데, 저도 ‘와~ 영화배우다’ 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웃음). 김수로, 장동건, 김민종 씨… 다들 몸도 좋잖아요. 저는 몸이 안 되니까, 열심히 뛰기라도 해야죠(웃음).”
극 중 손현주는 도망자 신세이다 보니 유난히 뛰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힘은 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한다”며 털털하게 웃었다. 그가 시청률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힘이 들어도 참을 수 있는 건 배우로서의 남다른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배우에게 내일은 없고 오늘만 있어요. 목숨 걸고 연기하는 거죠.”
미처 다 읽지 못한 시나리오가 책상에 쌓여 있지만, 쉬지 않고 단막극에 출연하는 것 역시 스스로를 연마하기 위함이다. 그는 평소 “올라갔다고 생각해본 적도, 올라갈 정점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한다. ‘추적자’가 그의 연기 인생에 정점인 것도, 또 터닝 포인트도 아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만들어나가는 배우 손현주의 소중한 오늘인 셈이다.
인터뷰 내내 손현주는 깍듯하고 정중했다. 그렇다고 상대를 어색하거나 불편하게 하지도 않았다. 가식 없는 진솔한 친절이기 때문이다. 이제 ‘추적자’는 초반을 겨우 넘었다. 앞으로 남은 방송에서 지금껏 이어왔던 긴장감을 어떻게 풀어갈지, 지금까지 받아온 관심과 찬사를 어떻게 이어갈지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 더불어 그의 연기에 대한 기대감도 조금씩 높아지는 게 사실이다.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손현주 식’ 연기를 앞으로도 오랫동안 볼 수 있다는 건 시청자로서 분명 감사한 일이다.

여성동아 2012년 7월 5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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