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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LIFE IN HOKKAIDO

산골 마을 오토이넷푸의 세 가지 보물

나는야 홋카이도의 무인역장

글·사진 | 황경성 일본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

2012. 07. 06

하나, 인구 1천 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에 전국 규모의 크로스컨트리대회가 열릴 만큼 훌륭한 코스가 있다. 둘,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드는 미술공예 고등학교가 있다. 셋, 스나자와 빗키라는 세계적인 조각가의 기념관 ‘산모아’가 있다.

산골 마을 오토이넷푸의 세 가지 보물

일본 홋카이도의 데시오 강을 따라 북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처럼 광활한 유채 꽃밭이 펼쳐진다.



홋카이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눈이다. 초가을 진눈깨비로 시작한 눈이 녹지 않고 차곡차곡 쌓이면 해가 바뀌어 5월까지도 들녘에는 잔설이 보인다. 이처럼 겨우내 앞서 내린 눈이 뒤이어 내린 눈 아래서 뿌리를 내린 채 긴 겨울을 보내는 모습이 마치 겨울잠을 자는 것 같다고 해서 이곳 사람들은 네유키(根雪)라고 부른다. 그렇게 쌓인 눈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한꺼번에 녹기 시작하면 여름철 폭우에 버금가는 수량이 된다. 지난 5월에는 눈 녹은 물로 강이 넘쳐 철로가 잠기는 바람에 기차가 운행을 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좀처럼 걷힐 것 같지 않던 네유키도 서서히 엷어지고 그 밑에서 잠자던 수많은 종류의 식물들이 성급히 잔설을 밀고 올라온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으면 혼슈(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본토)에서처럼 늦가을까지 자신을 영글게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홋카이도의 지명이 탄생한 곳
홋카이도에 살면서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은 환경이 결코 인간이나 자연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홋카이도의 땅이 기름진 것은 바로 인간의 키를 넘길 만큼 쌓이는 눈 덕분이다. 네유키는 대지를 정화한다. 홋카이도의 봄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고 눈이 녹으면 곧바로 여름의 따가운 햇살 아래 농작물들이 순식간에 자란다. 흔히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특성을 말할 때 ‘빨리 빨리’라고 하는데 이곳 농작물이야말로 기후 특성상 눈 밑에서 싹을 틔우고 지상에 얼굴을 내밀자마자 순식간에 자라 열매를 맺는 빨리 빨리가 자연스럽게 토착화돼 있다. 혹한을 이겨내고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피는 들꽃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번에도 홋카이도의 특별한 자연과 인물을 소개하기 위해 나요로 시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오토이넷푸무라(音威子府村)를 찾아나섰다.
오토이넷푸는 홋카이도(北海道)라는 지명이 처음 붙여진 곳이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에도 말기 북방 탐험가로 유명한 마쓰우라 다케시로(松捕武四郞)가 1857년 데시오(手鹽)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강가의 아이누인 집에 머물게 됐다. 그때 촌로에게서 아이누어로 카이(加伊)가 ‘이 나라에서 태어난 자’라는 말을 듣고 힌트를 얻어 북쪽 나라라는 뜻의 홋카이도(北加伊道)로 명명하기로 했고, 加伊 대신 한자 발음이 같은 海를 붙여 오늘날 홋카이도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 1869년 메이지 정부가 이곳 공식 명칭을 홋카이도로 했다. 그러나 오토이넷푸가 유명해진 것은 홋카이도라는 지명의 발상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오토이넷푸 하면 다음 세 가지가 유명하다.
하나, 홋카이도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작은 무라(村, 한국의 면 정도의 행정 단위)에 전국 규모의 크로스컨트리대회가 열릴 만큼 훌륭한 코스가 있다. 둘,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드는 미술공예 전문고등학교가 있다. 셋, 스나자와 빗키(砂澤ビッキ, 1931~1989)라는 세계적인 조각가의 기념관 ‘산모아(Triple More)’가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한 달 새 오토이넷푸를 세 번이나 찾아갔는데 갈 때마다 느낌이 새로웠다. 오토이넷푸를 찾아가는 도중에 즐길 수 있는 경치나 온천이 어느 여행 때나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나요로 시에서 오토이넷푸를 향해 북상하면 데시오라고 하는 아름다운 강을 끼고 달리게 된다. 246km에 이르는 데시오 강은 일본에서 네 번째로 긴 강으로 홋카이도 북쪽 지역의 젖줄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하면서 카누를 즐길 수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을 끼고 자동차로 20분쯤 달리면 비후카초(美深町)라는 동네가 나온다. 산이 깊고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아내리면서 대지를 정화시키는 덕분인지 비후카의 물은 ‘일본의 물 1백 선’에 들어갈 만큼 풍부한 수량과 좋은 물맛을 자랑한다. 또 수백 년 수령된 빨간 가문비나무와 눈잣나무가 빼곡히 자라는 일본 최북단의 마쓰야마 습원(松山濕原)도 지나칠 수 없다. 마쓰야마 습원 입구에서 조금 더 북상하면 갑자기 노란색 페인트칠을 한 듯 온통 노란 세상이 나온다. 광활한 유채 꽃밭이다. 이 정경을 정신없이 카메라에 담고 다시 달리면 데시오카와 노천 온천이 나온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코앞에 펼쳐진 짙푸른 숲과 유유히 흐르는 강, 그 사이를 기차가 달리는 동화 같은 풍경을 감상하는 각별한 맛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까.

산골 마을 오토이넷푸의 세 가지 보물

1 스나자와 빗키 기념관의 전시장. 2 빗키는 생전 초등학교 교실을 개조한 이 아틀리에에서 1천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다. 현재는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3 오토이넷푸에서 처음으로 홋카이도라는 지명이 만들어졌음을 알리는 기념물.



기적의 학교 오토이넷푸 미술공예 고등학교
드디어 오토이넷푸에 있는 스나자와 빗키 기념관에 도착했다. 스나자와 빗키는 홋카이도 출신의 조각가로 초기에는 관광지의 민예품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다 원시적 조형미에 현대적 감각이 더해진 독특한 작품 세계를 확립하면서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아사히카와 출신인 그가 오토이넷푸에 정착한 것은 우연이면서도 필연인 듯하다. 1977년 학생 수가 줄어 폐교 위기에 몰린 오토이넷푸 고등학교의 교장이 빗키를 찾아와 오토이넷푸의 아름다운 자연과 빗키의 예술을 교육에 접목시켜달라고 간청했다. 이를 계기로 오토이넷푸를 방문한 빗키는 목조각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나무들을 살펴본 뒤 그 자리에서 이주를 결정했다. 이후 오토이넷푸 고등학교는 인테리어실습 과목을 개설해 목공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현재 입학 정원은 40명이고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목공예뿐만 아니라 일반 미술을 배우는 학생들까지 받아들여 미술공예 고등학교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최근에는 학교 폭력, 등교 거부, 왕따가 없는 ‘기적의 학교’로 불리며 지역 활성화의 성공 사례로 일본 언론에 자주 소개되고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에도 일본 국영방송 NHK에서 이 학교를 소개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 중이었다.
이 학교의 성공 뒤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빗키의 존재가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빗키는 학생들을 직접 지도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면 개인의 창조성을 키우는 데 방해가 된다며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빗키는 자신이 ‘아이누 예술가’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예술 그 자체가 아니라 아이누로 평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누 혈통임을 감추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누 어로 ‘개구쟁이’라는 뜻을 가진 ‘빗키’로 불리기를 원했고, 아이누 전통 가옥인 ‘치세’라는 초가집을 좋아했다. 그는 생전에 폐교가 된 초등학교 건물을 아틀리에로 사용했는데 현재 이는 개조돼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전형적인 시골 학교의 모습을 간직한 기념관 옆에는 태고의 원시림을 보존하고 있는 홋카이도 대학 연습림이 있다.



산골 마을 오토이넷푸의 세 가지 보물

1 스나자와 빗키 기념관 뒤편 숲에 있는 일명 ‘빗키 나무’. 서 있는 이가 가와카미 관장이다. 2 빗키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가와카미 마코토 관장. 3 오사카에서 살다가 오토이넷푸로 이주해 행복한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히라타 부부.



“작품이 쇠퇴하고 썩게 내버려두라”
기념관을 세 차례 방문한 나는 기념관 관장이자 빗키의 오랜 친구였던 가와카미 마코토(河上實) 씨로부터 그의 삶과 예술 세계에 대해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빗키의 예술은 ‘자연’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인간과 자연 사이에 벽이 생겼다고 하는 그의 철학에서 출발한다. 그 연장선에서 그는 작품을 만들 때 “원래 그 나무가 되고 싶어 했던 모양을 읽어내 자신은 단지 거기에다 좀 더 예쁘고 멋있게 해주고 싶을 뿐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가 사용하는 도구는 오직 정 한 가지였다. 또 그는 나무를 보면 흥분했고 흥분을 하면 코를 푸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관광지에서 판매되는 민예품이나 만들던 그가 1978년 오토이넷푸로 이주한 뒤 죽을 때까지 10년 사이에 1천 점이 넘는 작품을 만들 만큼 정력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아마 오토이넷푸의 원시림이 질 좋은 재료를 양껏 공급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 영감까지 불어넣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서 묵묵히 뒷바라지해준 가와카미 관장이 있었다. 당시 목재상이었던 가와카미 관장은 빗키가 오토이넷푸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했다. 빗키가 이 마을에 정착하자마자 그를 숲으로 안내하고 좋은 나무를 골라주며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무상으로 제공했다. 지금까지 이런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는 가와카미 관장의 조심스러운 고백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빗키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서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재료로 하는 이상 그것이 쇠퇴하고 썩어들어가는 것은 당연지사”라며 실외에 전시된 작품들이 풍파에 변형되고 퇴색돼 쓰러져도 내버려두게 했다. 빗키 기념관에서 이러한 그의 작품 세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빗키와의 추억을 들려주던 가와카미 관장이 마지막으로 안내한 곳은 기념관 뒤편에 있는 홋카이도 대학 연습림이었다. 이곳은 평소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돼 있어 숲에 들어서는 순간 신비감마저 느껴졌다. 얼마간 벼랑에 난 좁은 길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일명 ‘빗키 나무’로 불리는 수령 수백 년의 아름드리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올곧게 서 있었다. 이 나무를 어루만지며 빗키를 회상하는 가와카미 관장을 보며 참된 우정이란 무엇인지 잠시 생각했다.
빗키 나무가 있는 산 중턱까지 오르는 동안 곰이 할퀸 자국이 선명한 나무와 겨우내 먹이가 부족하면 사슴들이 껍질을 벗겨 먹어 불그스레한 속살을 드러낸 나무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스스로 자연이고자 했던 한 예술가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숲에는 그날도 수많은 자연이 어우러져 또 다른 자연을 이루고 있었다.

크로스컨트리에 매료돼 도시를 떠난 히라타 부부
빗키의 예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히라타 씨 부부의 통나무집에 예고 없이 들렀다. 오사카에 살던 부부가 이 산골 마을에 정착하게 된 이유가 재밌다. 제약회사에 근무하던 남편 히라타 다케오(平田武夫) 씨는 56세 때 핀란드 여행을 떠나 처음 크로스컨트리를 경험하고 그 매력에 푹 빠져 오토이넷푸에서 열리는 대회를 구경하러 왔다가 아예 이주를 결심했다고 한다. 사실 핀란드와 흡사한 오토이넷푸의 자연에 매료됐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지도 모른다. 조기 퇴직을 하고 시골 생활을 즐기는 히라타 부부의 모습은 ‘인생낙원’이라는 TV 다큐멘터리에도 두 차례 소개된 바 있다. 행복한 노후의 전형이랄까. 이들 부부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이날도 불쑥 찾아간 불청객을 위해 부인은 직접 구운 빵과 차를 내오고, 우리는 빗키의 예술 세계와 시골 생활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돌아오는 길엔 끝없이 펼쳐진 유채 꽃밭이 저녁놀과 어우러져 황홀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나도 모르게 머리 숙여 모든 이의 삶이 이처럼 아름답기를 기원했다.

산골 마을 오토이넷푸의 세 가지 보물


홋카이도 닛싱 역의 명예역장 황경성은…
고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서는 체육교육을 전공했으나 복지에 뜻을 두고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일본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 진흥에 힘을 쏟고 있다. kyungsung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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