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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음악 황제도 반한 피아노 신동 임주희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지호영 기자

입력 2012.03.16 11:20:00

성악가 조수미에게는 카라얀, 첼리스트 장한나에게는 로스트로포비치…,
천재적인 음악가에게는 한눈에 알아봐준 거장이 있다.
열두 살짜리 피아니스트 임주희양이 세계적인 지휘자 게르기예프에게 발탁돼 화제다.
그에게서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과 키신에 버금가는 재능을 지녔다는 극찬을 받은 임주희양과 부모를 만났다.
러시아 음악 황제도 반한 피아노 신동 임주희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 지휘자 게르기예프는 2009년 12월 한국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DVD 한 장을 건네받았다. 아홉 살 꼬마의 피아노 독주회를 담은 영상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세 번을 다시 보고도 믿기지 않았던 그는 다음해 1월, 꼬마를 런던으로 불렀다.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던 꼬마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9곡을 거침없이 연주했다. 무대를 내려오는 꼬마를 향해 게르기예프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는 “전율이 느껴진다. 랑랑과 키신에 버금가는 재주를 지녔다. 기교도 기교지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했다.

독주회 DVD 세 번 본 게르기예프
세계적인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59)와 피아노 신동 임주희양(12·명원초 6년)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게르기예프는 마린스키 극장 총감독을 맡아 정상에 올려놓은 지휘자. ‘러시아 음악 황제’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그는 현재 영국 여왕이 후원하는 런던 심포니를 이끌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조직위원장을 맡아 심사위원진과 진행 방식 등을 대폭 변경해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공연장 앞에는 단 1분이라도 지도를 받기 위해 음악 신동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런 게르기예프가 2월 말 내한공연에서 3년 전 처음 만났던 임주희양을 협연자로 초청했다. 공연 보름 전 만난 임주희양은 “설레고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큰 공연을 앞두고 예민해지거나 연습에 찌들어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피아노의 고음처럼 맑고 투명한 느낌이었다.
주희네는 서울 강동구 길동에서 피아노 학원을 한다. 엄마 박선희씨도 어릴 때 주희와 마찬가지로 피아노 신동 소리를 들었다. 경희대 음대에 진학했으나 한때 가세가 기울어 연주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아이들의 재능을 키워주는 일을 시작했다. 주희양이 처음 피아노를 접한 것은 만 세 살 때였다.
“아이의 소질을 일찍 알았던 게 행운이었죠. 30개월 때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참 좋은 노래다’ 싶어 동요책을 찾아봤더니, 아이가 흥얼거린 멜로디와 딱 맞는 노래가 있더라고요. 놀랄 정도로 음감이 정확해서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래도 너무 이른가 싶어서 6개월을 기다렸다가 만 세 살이 되자마자 놀이식으로 티 안 나게 조금씩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주희는 음악을 스펀지처럼 쏙쏙 빨아들였다. 피아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비행기’라는 곡을 가르쳐줬더니 바로 조바꿈을 해서 연주하며 놀았다. 무엇보다 주희는 피아노를 좋아했다. 다른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 때 주희는 피아노 위에서 놀았다. 7~8세 무렵부터는 남들이 한 달 넘게 걸려 배울 곡을 2~3일 만에 연주해냈다. 2006년 틴에이저콩쿠르 특등을 시작으로, 2007년 중앙대 콩쿠르 1등, 음연콩쿠르 1등, 삼익피아노콩쿠르 1등, 2008년 예원콩쿠르 피아노 초·중등부 전체 대상 등 나가는 대회마다 최고상을 휩쓸었고, 이 무렵 서울대 음대 장형준 교수에게 발탁돼 본격적인 레슨을 받게 됐다.

러시아 음악 황제도 반한 피아노 신동 임주희


주희양의 하루 연습량은 4~5시간 정도. 영재권 아이들 가운데에는 주희양보다 더 오래 연습을 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아이가 연습에 질려버리면 안 된다는 게 박선희씨 생각이다.
“유치부 때부터 하루 대여섯 시간씩 연습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너무 몰아붙이면 흥미를 잃게 돼요. 주희는 유치원 때 하루 한두 시간으로 시작해 조금씩 연습량을 늘렸어요. 가장 신경을 썼던 건 아이의 마음이 닫히지 않도록 하는 거였고요. 그 덕분인지 주희는 지금도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해요.”
물론 주희도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막히기도 한다.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테지만, 무작정 주희가 어른이 되기만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땐 제가 주희에게 느낌을 말로 설명해주기도 해요. 예를 들어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한 대목을 칠 때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자스민이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살랑살랑 춤 추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하는 식이죠. 그렇게 팁을 주면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요.”
하지만 엄마나 선생님도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예술가의 길로 들어선 주희양이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히 하기 위해 스스로 해결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문제다.



러시아 음악 황제도 반한 피아노 신동 임주희

1 2010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 페스티벌에서 게르기예프와 협연을 마친 후. 게르기예프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2 주희양은 연주를 할 때 자연의 이미지를 상상한다고. 3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의 내한 공연 때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연습은 하루 4~5시간, 지치지 않을 만큼만
“잘 안 풀리는 대목에 부딪히면 주희가 ‘엄마는 나가 있으라’고 하고 혼자 연습실에 틀어박혀 수학 문제 풀듯이 연습에 매달려요. 한 시간쯤 지나서 주희가 ‘엄마?’ 하고 불러 들어가보면 ‘이 소리 맞지?’ 그래요. 어떻게 쳐야 할지, 스스로 방법을 찾아낸 거죠.”
주희양에게 피아노 칠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었더니 “하늘이나 바다 같은 자연도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그 곡에 맞는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주희는 피아노를 치지 않는 시간에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기를 하거나 산책을 한다. 아이답지 않게 사람이 많은 곳은 좋아하지 않고, 휴대전화는 전자파 때문에 친구들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외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어릴 때 아빠 엄마와 놀이공원에 갔었는데 너무 무서워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적이 있어요. 책을 읽는 것도 재미있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도 좋아해요. 특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음악이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보면 곡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피아노로 연주하고 싶어져요.”
학교 수업엔 되도록 충실하고 싶지만 독일·프랑스 등 해외 공연을 다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등교하지 못하는 날도 있다. 2010년 8월, 게르기예프 초청으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백야 페스티벌에 협연자로 나섰을 땐 계획에 없이 두 차례나 더 공연을 하게 돼 일정이 길어지기도 했다. 게르기예프가 당시 열 살이던 주희양을 무대에 세웠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비웃음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주희양의 연주(카발레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3번)가 끝나자 관객들이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냈다. 주희양은 “연주가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데 관객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줘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러시아에서의 반응은 주희네 가족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연주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자 호텔 방이 온통 꽃으로 가득했다. 주희 아버지 임종혁씨는 그때만 생각하면 행복하면서도 식은땀이 난다고 했다.
“다음날 게르기예프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갔더니 ‘한국으로 가는 일정을 늦추면 안 되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공연이 이틀 더 남았는데, 협연자가 건강에 이상이 생겨 무대에 오를 수 없으니 주희가 대신 하면 좋겠다고. 부랴부랴 근처 도서관에서 하이든 협주곡 악보를 구해 연습한 다음 바로 공연을 했죠.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지금도 실감이 잘 안 나요. 다행히 그 전에 장형준 교수님께서 꼼꼼하게 지도해주셔서 걱정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게 공연을 소화할 수 있었죠.”

경쟁보다는 개성 있는 연주 원칙

러시아 음악 황제도 반한 피아노 신동 임주희

주희양의 부모는 아이가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백야 페스티벌이 끝난 후 주희양은 아홉 군데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다. 게르기예프는 ‘나중에 꼭 크게 될 아이’라며 마린스키 TV에 요청해 주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도록 했다고 한다. 이어서 곧바로 핀란드 음악 페스티벌에서도 초청이 왔지만 항공권 등의 관계로 응하지는 못했다.
“공연이 끝난 후 러시아 관계자들이 ‘주희 정도 나이에 기교가 뛰어난 아이들은 많다. 하지만 주희처럼 강한 색깔을 지닌 아이는 드물다. 그 색깔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임종혁)
주희 부모나 장형준 교수도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각종 콩쿠르에 내보내 또래들과 실력을 견주게 하는 대신 개성 있는 연주자로 키워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그런 곡이 있다는 게 놀랍고 신기하고 치고 싶어진다”는 주희양의 꿈은 관객과 소통하며 감동을 주는 연주자가 되는 것이다.
“무대 위에 서면 누가 어디에 어떤 표정으로 앉아 있는지 다 보여요. 관객들이 제 연주에 빠져드는 것도 느낄 수 있고요. 음악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앞으로도 제 꿈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주희양이 백야 페스티벌에서 연주했던 하이든 협주곡 2악장 카덴차 부분을 들려줬다. 얌전한 외모와 달리 연주에 힘이 느껴졌다. 카덴차가 연주자의 기교를 뽐내는 대목이라고는 하나, 주희양의 연주는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표현을 실감케 할 만큼 흡인력이 있었다.
박선희씨는 딸을 올바른 음악인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다. 무엇보다 딸이 피아노를 좋아하는 마음이 닫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가 피아노를 하면서 싫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주희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항상 즐거워요. 주희도 피아노를 치면서 항상 행복하기를 바라요. 또 중심이 단단하고 반듯해서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음악인이 되면 좋겠어요.”

여성동아 2012년 3월 5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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