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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양떼목장’ 김성민씨를 만나다

대한민국 최고 목동 꿈꾸는 스물넷의 청년

글 | 권이지 객원기자 사진 | 조영철 기자

입력 2012.02.16 09:57:00

목동이 되고 싶은 스물네 살 청년. 그 아들을 묵묵히 바라보는 아버지. 아름다운 제주도 양떼목장에는 두 남자와 여섯 마리의 보더 콜리가 산다. 평화로움 속에 치열함이 깃들어 있는 양떼목장에서의 1박 2일.
‘제주양떼목장’ 김성민씨를 만나다


‘휘익!’ 하고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언덕 어딘가에서 점박이 개 한 마리가 쏜살같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하더니 흩어져 있던 양들을 한곳으로 모은다. 그러자 긴 나무 지팡이를 든 목동이 개에게 큰 소리로 외친다. 명령에 따라 개는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이며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걷는다. 목장을 한 바퀴 뛰기도 한다. 의미 없는 동작인 줄 알았는데 양들은 목동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인다.
유럽의 알프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국적인 풍경. 하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제주도의 한 목장이다. 지난해 12월 말 채널A에서 방영한 ‘너는 내 운명’의 한 장면. ‘파트너’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이 에피소드는 목동 김성민과 그의 파트너견 보더 콜리, 베키와의 인연을 다뤘다.
방송을 본 뒤로 궁금한 것들이 늘었다. 영국도 호주도 아닌 제주도에 양을 키우는 목장이라니? 스물네 살 청년의 꿈이 대한민국 최고 목동이 되는 것? 그래서 김성민씨와 보더 콜리들이 살고 있는 ‘제주양떼목장’으로 날아갔다.

힘들지만 직접 목장 꾸미는 일 즐거워
제주도 애월읍 구불구불 산길을 지나자 목장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한겨울이어서 머릿속에 그리던 초록빛 가득한 초원을 볼 수는 없었지만 넓은 들판과 그 옆의 열대 나무가 묘한 조화를 이뤄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인기척이 나자 곧바로 개가 짖었다. 아니 한 무리의 보더 콜리들이 한꺼번에 짖었다. 8마리의 새끼를 조르르 달고 있는 건 암컷 베키. 그 옆은 서열 1위인 개리, 원반의 달인 조커, 질투쟁이 앰버, 막내 넬, 뒤늦게 합류한 도트까지 무려 14마리의 보더 콜리들이 일제히 기자 일행을 반겼다.
왁자지껄한 환영 인사에 관리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목장 주인인 성민씨의 아버지 김인득씨(57). 성민씨는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아무리 남쪽 땅 제주라도 쌀쌀한 기운이 돌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들어온 성민씨는 한 주 내내 감기몸살로 까칠한 얼굴이었다. 목장을 시작한 뒤 성민씨와 아버지는 잠시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목장 구석구석 사람 손을 기다리지 않는 곳이 없어 아플 새도 없단다.
“목장 일이 재미있으니까 버티는 거죠. 양들을 키우며 보더 콜리들에게 양몰이 훈련을 시켜야 하고, 목장 주변 정리와 통나무집 수리까지 다 제 손으로 해야 해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라온 그가 어떻게 이곳에서 목동이 됐을까? 성민씨는 스무 살 때인 2008년 초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도에 왔지만, 자신이 목동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단다.
“학창 시절 방황이 좀 길었어요. 중학교 때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몸이 좋지 않아 학교를 쉬기도 했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권투를 했어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더니 결국 재수에도 실패했죠. 바로 그때 아버지의 제안으로 제주도에 오긴 했는데 막막했어요. 지금은 이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처음 왔을 땐 친구 한 명 없었어요. 게다가 아버지와 저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안 나눌 만큼 서먹한 사이였죠. 그런데 이곳에서 둘이서만 지내다 보니 조금씩 말문이 열렸어요.”
아버지 김인득씨가 남들보다 빠른 은퇴를 결심한 것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였다. 은퇴 직후 펜션을 운영할 계획으로 물 좋고 공기 맑은 제주도를 택했다. 성민씨는 비슷비슷한 펜션들이 워낙 많아서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눈길을 끌겠다 싶어 고민하다 개를 키우자고 했다. 그때 영화 ‘아기돼지 베이브’에 나오는 똑똑한 양몰이 개가 떠올랐다.
“그 개가 보더 콜리더라고요. 수소문 끝에 부산에서 보더 콜리를 분양한다는 분을 찾았어요. 그곳에서 한 마리를 데리고 왔는데 개를 키운 경험이 없는 데다 보더 콜리가 어떤 성향인지 몰라서 제대로 키우질 못했어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말썽을 부려 어쩔 수 없이 넉 달 만에 훈련소로 보냈어요. 지금 생각하면 무척 미안하죠.”
국내에는 보더 콜리라는 종이 알려지지 않아 전국에서 키우는 사람이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그만큼 정보도 부족했다. 그는 해외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보더 콜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 공부를 시작했고 하나씩 알아갈수록 그 매력에 빠졌다. 우연히 마태용씨의 양몰이 영상을 접했을 때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 생긴 것이다. 그는 마태용씨를 만나러 경기도 화성에 있는 태신목장을 찾아갔다. 거기서 만난 보더 콜리가 지금의 베키였다.

파트너 베키를 만나 목동이 되다

‘제주양떼목장’ 김성민씨를 만나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 부자. 하지만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 흘린 땀방울만큼 결실을 맺을 거라 믿는다.





“마태용씨는 처음엔 독학으로 양몰이를 배우다가 뒤늦게 영국까지 가서 일부러 목동 일을 하며 양몰이 연습을 했다고 해요. 보더 콜리들과 양몰이를 해보고 싶어 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연습을 한 거죠. 그 이야기를 듣고 그분의 양몰이를 보니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어요. 제가 처음 관심을 보였을 때는 그냥 지나가는 호기심이려니 했는데, 꾸준히 찾아갔더니 그제야 인정하고 처음부터 하나씩 가르쳐주더군요.”
베키는 어느 집에 분양됐다 다시 돌아온 개였다. 그 사연을 듣는 순간 미숙한 주인 때문에 다시 훈련소로 보내버린 개가 생각나 왠지 베키에게 마음이 끌렸다. 성민씨를 만난 베키는 양몰이 개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성민씨는 마태용씨의 지도 아래 베키와 함께 양몰이를 배웠다. 그 전까지는 의욕만 넘쳤는데 이제 서로를 믿고 호흡을 맞춰가니 실력이 부쩍부쩍 늘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1년 전 베키는 치사율 70%에 육박하는 심장사상충에 감염돼 사경을 헤맸다. 성민씨는 베키를 살리려고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다 마지막으로 대학병원에서 사실상 사형선고와 같은 말을 들었다.

“의사 선생님이 베키를 잃을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그때 정말 베키를 떠나보내게 될까 봐 두려웠죠.”
성민씨의 극진한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베키는 기적처럼 회복했다. 그 사건 이후 성민씨는 베키에게 프로그램 제목 그대로 ‘너는 내 운명’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베키가 완치되면 너른 벌판을 뛰어다니며 신나게 양몰이를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려면 목장이 있어야 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펜션 옆에 목장을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펜션에 온 사람들도 목장이 있으면 더 좋아할 것이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드디어 아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찾았다는 것에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고생길이 눈에 훤해 아들에게 수차례 “괜찮겠느냐”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성민씨는 꼭 하고 싶다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런 아들의 뜻을 아버지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느라 뒤늦게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1년 전 제주도에 내려온 성민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평범하게 살길 바랐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니 걱정이 컸다.
“저는 지금도 성민이가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요. 목장일이 힘들잖아요. 그런데 성민이는 이 일이 재밌대요. 신경 쓸 일도 많고, 몸이 힘들 법한데 고집을 안 꺾더라고요.”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김인득씨는 그동안 운영하던 펜션을 정리하고 애월읍에 있는 9만9000㎡(3만 평)의 땅에 목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보더 콜리도 한 마리씩 늘어났다. 양몰이를 위해 양도 사왔다. 그러나 아무리 제주도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풍경이라지만 목장만으로는 수익성이 없었다. 결국 통나무 펜션을 시작했다. 한때 당나귀와 말도 있었는데 양에 집중하기 위해 얼마 전 다 정리했다고 한다.

‘제주양떼목장’ 김성민씨를 만나다

1 목장에서 쓸 통나무를 손질하는 김성민씨. 2 김인득씨는 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드문드문 미소를 지었다. 3 보더 콜리, 조커는 6마리 중 원반을 가장 잘 잡는 개다.



다음 목표는 양몰이 국제대회 출전!
다음 날. 이른 아침 양들이 목장 주변의 풀과 나뭇잎을 쉴 새 없이 뜯어 먹고 있었다. 이때 목장 입구에서 김성민씨가 막내 넬과 함께 양몰이 훈련을 하기 위해 다가왔다. 양을 발견한 넬은 쏜살같이 뛰어나가 한 마리씩 찾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화려한 넬의 기술에 놀란 양들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처음 목장에 왔을 때부터 넬은 따로 배우지 않았는데도 양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몰았단다.
“넬, 라이 다운(Lie down)!”
이름을 부르며 명령하자 넬이 즉시 반응했다. 자세를 낮추며 양들을 바라보던 넬. 성민씨가 각각의 명령어를 외치면 그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양몰이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성민씨가 잠시 넬과 자리를 비운 사이 양들이 또다시 흩어졌다. 그때 성민씨가 넬과 함께 베키를 데려왔다. 넬이 화려하다면 베키는 능숙했다. 베키에게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파트너의 노련함과 여유가 느껴졌다.
채널A 출연 당시 태어난 베키의 새끼 8마리는 얼마나 컸을까. 태어난 지 두 달 정도 된 강아지들은 곧 분양을 앞두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키우고 싶어요. 하지만 이 아이들이 크면 조금 곤란해져요. 혈통 때문이죠. 어쩔 수 없이 보내기로 결심했어요. 나중에 새끼들이 베키처럼 훌륭한 양몰이 개가 된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성민씨 부자는 목장을 시작한 지 겨우 열 달쯤 됐는데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와 놀랐다고 했다. 그만큼 다른 곳에서는 하기 힘든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1년은 더 고생해야 머릿속에 그린 대로 목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양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목초 씨를 뿌렸는데, 작년에 뿌린 것이 다 죽었어요. 아직 시행착오 단계죠. 목초가 자리 잡으면 양도 조만간 더 들여올 예정입니다. 그 외에도 오리몰이를 준비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바쁘게 움직이면 제주도의 아주 특별한 목장이 되지 않을까요.”
목장이 차츰 자리를 잡아가면서 성민씨의 다음 목표도 구체화되고 있다. 그는 영국에 가서 목장 일을 하며 본격적으로 양몰이를 배울 생각이다. 그리고 영국에서 열리는 양몰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영국에서는 지역마다 양몰이 대회가 열려요. 저는 지역 대회에는 참가할 수 없지만 국제대회에는 나갈 수 있죠. 국제대회 우승이 꿈은 아니에요. 아직까지 아시아에서는 단 한 명도 참가한 적이 없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의 저는 참가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하죠. 많은 사람들에게 제 모습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연습할 겁니다.”
목장을 떠날 시간. 한참 보이지 않던 성민씨는 추운 날씨에도 통나무를 다듬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이를 위해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이 듬직해 보였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김인득씨의 얼굴에도 미소가 흘렀다. 겨울이라 아직은 쓸쓸한 목장이지만 봄이 되고, 여름이 오면 하얀 양떼들과 점박이 보더 콜리들이 신나게 푸른 초원을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info
채널A ‘너는 내 운명’

반려동물과 사람 사이의 우정, 믿음, 이별 그리고 사랑을 그리는 프로그램.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인간과 동물의 운명적인 이야기를 담는다. 본방송은 월~금요일 오후 7시20분부터 7시40분까지, 본방송을 묶은 스페셜 방송은 토요일 오전 11시10분부터 낮 12시까지 방영된다.


여성동아 2012년 2월 5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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