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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간의 나약함 고백하고 모든 것 내려놓은 소설가 최인호의 암 투병기

“우리를 벼랑 끝으로 부르시는 건 날개를 가진 거룩한 천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

글 | 김유림 기자 사진 |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2. 02. 15

삶의 부조리와 씨름하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도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신에게 다가가려 한다. 마흔두 살 때 가톨릭 신자가 된 소설가 최인호는 1월1일부터 ‘서울주보’에 암 투병기를 싣고 있다. 주보에는 육신의 고통보다 힘든,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신 앞에 무릎 꿇은 작가의 인간적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간의 나약함 고백하고 모든 것 내려놓은 소설가 최인호의 암 투병기


2008년 침샘암 판정을 받고도 끊임없는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는 소설가 최인호(67·세례명 베드로). 발병 후 서울을 떠나 휴대전화도 없이 지방 모처에 머물고 있는 그가 새해 첫날을 시작으로 가톨릭대교구에서 발행하는 ‘서울주보’에 암 투병기를 연재하고 있다. 그는 평신도의 글을 소개하는 ‘말씀의 이삭’난을 통해 정신마저 갉아먹는 육신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신에게 바치는 나약한 인간의 기도를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다. 병마와 싸우며 힘겨웠던 순간과 함께 성경 말씀을 덧붙여 그와 같이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를 선사한다. 철저히 베일에 가려 있던 그의 건강 상태도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다.
최인호 작가는 당초 1월 한 달만 연재할 생각이었지만 신자들의 반응이 뜨거워 2월 말까지 연재를 이어가기로 했다. 이후 잠시 중단했다 7월부터 9월까지 석 달간 다시 글을 쓸 예정이다.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한 최인호는 1998년부터 2년간 ‘서울주보’에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
‘말씀의 이삭’난을 담당하고 있는 권기옥 마리아 수녀는 “최근 선생님의 건강이 좋아지셨다고 해서 글을 부탁드렸다. 그동안 힘든 상황에서 기도하며 체험하신 바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다”며 청탁 배경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신자들이 선생님의 글을 읽고 커다란 감동을 받고 있다.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심적 고통과 답답함을 느끼던 이들도 주보에 실린 글을 보고 용기를 얻는 것 같다. 고마운 마음에 선생님 앞으로 작은 선물을 보내오는 신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나의 고통은 주님과 함께 깨어 있는 영혼의 불침번”
1월1일 발행된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라는 제목의 주보를 보면, 최인호는 자신이 암에 걸리기 전까지 죄와 병마를 동의어로 생각해왔음을 알 수 있다. 글에서 그는 “저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불어닥친 이 태풍은 다름 아닌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에게 있어 암의 선고는 미국 작가 N. 호손이 쓴 간통한 죄로 ‘A’란 주홍 글씨를 가슴에 새기고 사는 여주인공의 낙인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어린 환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절규한다. ‘그렇다면 저 아이는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그 순간 그는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아이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볶음 9장 3절)’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최인호는 비로소 죄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며 수많은 환자들이 신음하고 죽어가는 것은 그들이 죄인이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들이 이 순간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두 번째 연재, ‘나와 같이 깨어 있으라’ 편은 2009년 10월 암이 재발해 본격적인 항암 치료를 받을 때의 일화로 시작된다. 1주일에 걸쳐 1차 치료를 끝냈을 때 그의 체중은 5kg이나 줄어 있었다. 밥은 물론 물도 한 모금 삼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며 주치의에게 “때려 죽여도 다시는 항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뒤 우연히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을 떠올린 최인호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마태볶음 26장 38절)’라는 성경 구절을 읽고 큰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예수도 근심과 번민에 싸여 고통을 호소하는데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은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최인호는 ‘나의 고통은 주님과 함께 깨어 있는 영혼의 불침번과 같은 것’이라 여기고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1월15일자 주보에서는 투병 생활의 가장 큰 고통은 육체의 고통이 아닌 끊임없이 밀려오는 걱정과 두려움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온갖 걱정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길한 망상을 가불해서 하고 있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성녀 소화 테레사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더욱 꾸짖는다.
“매 순간 단순하게 살지 않는다면 인내심을 갖기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과거를 잊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합니다. 우리가 실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조용히 쉬지 않고 안달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의 시 ‘벼랑 끝으로 오라’ 역시 괜한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에게 큰 가르침을 안겨줬다.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인간의 나약함 고백하고 모든 것 내려놓은 소설가 최인호의 암 투병기


재차 과거를 걱정하고 내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최인호는 “주님께서 우리를 벼랑 끝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날개를 가진 거룩한 천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는 말로 독자들을 위로한다.
네 번째 칼럼 ‘엿가락의 기도’에서는 “진정으로 법을 구하는 사람은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당나라 선승 마조(馬祖)의 명언을 소개하며 그동안 ‘기적을 내려달라’는 자신의 기도가 잘못이었음을 고백한다. “아무것도 청하지 말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마라”는 성 프란체스코 살레시오도의 말씀처럼 오직 하느님을 믿고 온전히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 자신이 올리고 있다는 ‘엿가락 기도’를 소개한다.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주님께 완전히 저를 맡기겠습니다. 우리 주 엿장수의 이름으로 바라나이다. 아멘.”
그리하여 최인호는 요즘 80% 정도 신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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