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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테이블의 여제 현정화

“탁구의 여왕보다 좋은 엄마 되고 싶어”

글 | 구희언 기자 사진 | 조영철 기자

입력 2012.01.17 15:19:00

색연필이나 장난감을 손에 쥘 나이인 열 살 때부터 탁구채를 쥐고 한국 탁구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현정화가 국제탁구연맹(ITTF) 명예의 전당에 한국 선수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
분 단위로 쪼개 사는 그와 ‘엄마’라는 키워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녹색 테이블의 여제 현정화


한국마사회 탁구단 감독과 대한탁구협회 전무이사로 활동 중인 현정화(43)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듯했다. “일단 다음 주 월요일에 전화를 다시 주시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건조하고 차가웠다. 인터뷰도 하기 전 ‘제대로 될까’ 걱정이 앞섰다. 인터뷰 당일 아침 “사진기자와 10시까지 찾아뵙겠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자 ‘네’라는 한 글자가 왔다. 커피숍 창문 너머로 늘씬한 ‘기럭지’에 조막만 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스타일리시한 머플러를 두르고 커피숍에 들어선 그는 웃음도 많고 따뜻했다. 인터뷰에 정신이 팔린 기자의 녹차라떼가 입도 안 댄 채 식어가는 모습을 보던 그는 “저어서 마시라”며 직접 숟가락으로 저어줬다. 전화상의 목소리는 부산 여자의 무뚝뚝함 때문이었으리라. 날은 추웠지만, 그로부터 따뜻한 기운을 한껏 충전받자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인터뷰는 때로 깔끔 담백한 밀면 같기도 했고, 진한 돼지국밥 같기도 했다.

지바의 감격, 하지원 주연 탁구 영화로 만들어져

▼ 정말 바쁘세요.
“삶에 여유를 가지려고 국가대표팀 감독 일도 사정사정해서 그만뒀는데 오히려 더 바빠진 것 같아요(웃음).”

▼ 최근 탁구연맹 ‘명예의 전당’에 오르셨는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당분간 한국에선 나오기 어렵다는 거죠. 일단 선수 출신이어야 하고, 세계선수권대회나 올림픽을 포함해서 5개 이상의 금메달을 따야 해요. 요즘은 중국이 워낙 강세라 하나도 따기 어렵죠. 중국은 국기라서 목숨 걸고 탁구를 하거든요. 한 대회에서 1등 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아시안게임도 아니고, 세계에서 1등을 하는 건 쉽지 않겠죠. 처음부터 명예의 전당에 오를 걸 생각하고 선수 생활을 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기에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1993년부터 ITTF는 국제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선수 등 탁구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을 명예의 전당에 올리고 있다. 현재 헌액된 60여 명 가운데 한국인은 현정화가 유일하다. 그는 1987년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회 복식 금메달, 1988년 서울 올림픽 복식 금메달, 19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대회 혼합 복식 금메달,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 우승, 1993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대회 단식 금메달을 딴 공로 등을 인정받았다. 이전까지 아시아에서는 덩야핑, 왕난, 왕타오, 류궈량, 왕리친 등 중국 선수와 에구치 후지에, 노부코 하세가와 등 일본 선수의 이름만 올라 있었다.



▼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의 우승 실화를 그린 영화 작업은 얼마나 진전됐나요.
“다 찍고 편집 과정만 남았어요. 2년 전쯤 영화사 대표님이 오셔서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결승전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셔서 시나리오 작업 단계부터 참여했어요.”
1991년 4월29일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현정화·리분희·홍차옥·유순복으로 구성된 ‘코리아’ 팀은 중국팀과 3시간40분의 혈투 끝에 3:2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2년 개봉 예정인 영화 ‘코리아’에서는 하지원이 ‘현정화’, 배두나가 북한의 ‘리분희’역을 맡았다. 현정화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88올림픽과 1993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 단식 우승과 더불어 1991년 지바 단체전을 꼽았다.

▼ 하지원씨가 영화에서 현정화 역을 맡았는데, 직접 추천하셨다고요.
“하지원씨가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스턴트우먼으로 나왔잖아요. 저 정도 체력이면 여성스러운 느낌보다는 운동선수 같은 느낌을 제대로 살릴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추천했어요. 시나리오 받고는 OK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하지원씨가 살아 있는 사람(현정화)을 연기하는 게 부담된다고 했대요.”

▼ 현정화를 만든 건 어머니다. 이 말에 동의하나요.
“그럼요. 학교 다닐 때부터 계속 존경하는 인물에 ‘어머니’를 적었어요. 아버지(탁구 선수 현지호)께서는 늘 아프셨고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가정을 책임지실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였죠. 어머니께서 조리사였는데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셨죠. 그런 와중에도 아침식사 준비도 다 해놓고, 집안일까지 다 하고 주무셨거든요. ‘나중에 커서 어머니를 편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어요. 어머니는 늘 성실한 모습만 보여주셨죠. 어머니께서 40년생이시라 칠순이 넘었는데도 낮잠을 주무신다거나 나태한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운동하면서도 그런 마음가짐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한계를 극복해내는 건 어머니에겐 당연한 모습이었고, 그걸 보며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극복하는 능력을 갖춘 것 같아요. 유전적 요인도 있어요. 어머니께서 정말 건강하시거든요. 그런 체력을 물려받아 운동하면서도 특별히 아픈 곳이 없었어요. 1년에 감기도 몇 번 안 걸리고요. 피부도 어머니 닮아서 좋아요(웃음). 남들 이야기로는 제가 회복 능력이 굉장히 빠르대요. 그처럼 노력으로 얻기 어려운 부분을 주신 이도 어머니죠.”

▼ 사실 어머니께서는 탁구 하는 걸 반대하셨죠.
“운동 선수라는 직업이 먹고살기 어려운 직업이라고 생각하셨어요. 딸인데 몸 쓰는 직업이라 걱정하신 부분도 있고요. 게다가 운동 선수들은 일찍 은퇴하니까 이후 딸의 인생에 대해 고민을 하신 것 같아요. 운동 잘하는 건 알지만,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었어요.”

▼ 어머니께서 끝까지 반대하시거나 스스로 다른 길을 모색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선생님이 됐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인자한 모습이 좋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제 직업이 지도자잖아요. 크게 생각하면 다르진 않으니까.”

집에선 뭐든지 해주고 싶은 극성 엄마

녹색 테이블의 여제 현정화


▼ 아이들에게 현정화는 어떤 엄마인가요.
“뭐든지 해주려고 하는 엄마예요. 제가 바빠서 자주 같이 있어주지 못하니까 미안한 마음이 늘 있거든요. 자제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해줄 수 있는 건 뭐든 해주고 싶죠. 여유 시간이 생기면 종일 아이들과 같이 보내요. 제가 어릴 때 늘 학교 끝나고 집에 혼자 있어서 싫었거든요. 책도 같이 읽고, 함께 놀러 가고, 학교 행사에도 참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대신 교육에는 엄격해요.”

▼ 남편(탁구 선수 출신 김석만)이 퇴근해서 들어오면 아이들에게 ‘윤선생, 바로셈은 다 풀었니’라고 묻는다는 인터뷰를 봤어요. 교육열이 굉장하신 것 같던데요.
“예. 학구열이 높은 편이에요. 제가 운동하면서 공부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딸이 처음엔 탁구를 했어요. 그런데 ‘현정화 딸이 탁구 한다’는 주위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그만뒀죠. 재능이요? 무조건 있어요. 저도 남편도 탁구 선수였는걸요.”

▼ 아이들 키우는 재미는 어떤가요.
“열한 살인 딸이 책 읽는 걸 정말 좋아해요.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 국·영·수가 중요하니까 그건 과외를 하고, 학원은 안 다녀요. 꿈이 계속 바뀌고 있는데 처음에는 의사가 되겠다, 변호사가 되겠다 하다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요즘에는 연예인이 되고 싶대요(웃음). 아홉 살인 아들은 책을 통 안 읽어서…. 게임이랑 태권도 같은 거 좋아하죠. 피아노도 치고요. 그전에는 일주일의 반 이상 합숙을 하는 터라 토요일에만 집에 올 수 있었는데 이제는 늦어도 집에 와서 자고 아이들 얼굴 볼 수 있어서 좋아요.”

▼ 아이들이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아나요.
“딸은 엄마가 유명한 탁구 선수였다는 것을 알고 아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엄마를 알아보는 걸 오히려 신기해하죠.”

▼ 현정화가 되고 싶은 엄마의 모델이 있다면.
“나중에 자식한테 존경스럽다는 이야기를 못 들으면 부모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저를 떠올리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우리 엄마는 그랬지 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부모로서의 모습도 있겠지만, 가정에서도 자상하고, 자기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주고, 항상 우리 편이었던 엄마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 좌우명이 있나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자’가 어릴 때부터 신념이었어요. 노력하면 무조건 성공이 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을 대하는 관계에서도 진심을 보여주면 상대방도 제게 진심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우선이지 능력이나 지위 같은 것은 우선이 될 수 없죠.”

녹색 테이블의 여제 현정화

현정화가 딸 서연, 아들 원준과 2009년 여름에 찍은 사진(오른쪽). 그는 “아이들이 그때보다 많이 컸다”며 휴대전화로 다시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다(왼쪽 위).



꼼수 없는 인생, 탁구에서 배워
▼ 운동 선수들은 자신의 주종목을 인생에 비유하곤 하던데요.
“탁구야말로 정말 인생 그 자체예요.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제가 33년째 탁구를 하고 있잖아요. 탁구를 통해 인생의 진리를 배웠어요. 첫째는 인내하는 법이죠. 인내가 없으면 뭐든 할 수 없잖아요. 혼자서 참고 견뎌야 하기 때문에 부단히도 인내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아요. 둘째, 규정을 따라야 하는 게 스포츠니까 룰을 지키는 법을 배웠죠. 아마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거예요(웃음). 탁구는 정직한 스포츠예요. 심판이 설사 보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알 수 있는 운동이죠. 이기다가 뒤집혀서 지는 경우도 많고,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면 승기를 잡을 수 있죠.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확 날리면서 경기에서 패하는 상황도 생기고요. 경기는 인생의 축소판이에요. 탁구 서브를 할 때는 도를 닦아야 한다고 해요. 변화무쌍한 심리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면 시합에서 절대 이길 수 없거든요. 1:1로 자기가 끝까지 그 경기를 끝내고 나와야 하죠.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어요. 또 한 가지, 탁구는 땀 흘린 만큼만 자기에게 돌아와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안 나오죠. 그걸 알기 때문에 도망갈 수가 없어요. 남이 본다고 해서 열심히 하고, 안 본다고 노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자세로 훈련에 임해야지만 얻을 수 있어요. 가뜩이나 1등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드렸기에 결코 지고 싶지 않았어요. 탁구에서는 말 그대로 ‘꼼수’가 있으면 안 돼요. 보여주기 위한 액션이 있어도 안 되고요. 사실 라이벌은 단순히 눈앞에 있는 선수가 아니라 모든 선수이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아요.”

▼ 앞으로 현정화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탁구를 했으니까 후배들을 위해 뭔가 해야죠. 나아가 한국 체육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분야니까요.”

장소협찬 | 커피킹(02-792-6220)

여성동아 2012년 1월 5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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