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12년 만에 돌아온 주병진의 뚝심

“막막한 어둠 속에서 방황했던 지난 세월, 다시 꿈을 꿀 수 있어 행복하다”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현일수 기자, MBC 제공

2012. 01. 17

최고 시청률 45%,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를 처음으로 토크쇼에 끌어내고 점잖으면서도 위트 있는 말솜씨로 ‘개그계의 신사’라 불렸던 토크쇼의 제왕. 하지만 성폭행 누명을 쓰고 12년 동안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했던 주병진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정통 토크쇼로 다시 돌아왔다. 나이 들어 노안도 생기고, 머리숱도 예전만 못하다지만 꼼수 부리지 않고 정공법으로 가려는 그가 반갑다.

12년 만에 돌아온 주병진의 뚝심


“냉동 인간이 됐다가 12년 만에 해동돼서 나왔는데 세상이 다 바뀐 느낌입니다. 아직 몸의 각 부위가 얼어 좀 서걱서걱합니다.”
얼마 전 CNN 간판 토크쇼 ‘래리킹 라이브’ 진행자였던 래리 킹이 죽어서 냉동되고 싶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자신의 명성이 죽어서도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미국에 래리 킹이 있다면 한국에는 주병진(53)이 있다. 그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 ‘주병진쇼’ ‘주병진의 데이트라인’ 등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하며 인기를 끌었다. 지난 12월 MBC ‘주병진 토크 콘서트’ 진행을 맡아 컴백한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12년간 냉동 인간으로 살았노라”고 고백했다. 주병진의 사연은 래리 킹과는 사뭇 다르다. 냉동 시점은 2000년 11월, 냉매는 성폭행범이었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누명을 벗었지만 그는 그 상처로 방송 활동을 중단하고 대중과 담을 쌓은 채 사업에만 전념했다.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던 언론들이 정작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는 2~3줄 단신 처리를 하고 넘어가더군요. 주병진 하면 그 사건만 떠올리지, 제가 무죄 판결을 받았는지 어떤지는 아직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세상에 나서는 게 두려워 저 스스로 감옥을 짓고 그 안에 갇혀 살았죠.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갇혀 살아야 하나, 헤쳐 나갈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세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는 사업에 성공해 세계적인 회사를 만드는 것, 또 하나는 외국으로 나가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는 것, 마지막으로 가장 편하게 생을 끊는 것. 그런데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고, 이민 수속도 밟았지만 어머니 때문에 여의치 않았어요. 생을 마감하는 것도 어머니께 큰 불효라는 생각에 포기했죠.”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정도로 고통받았지만, 아직 내가 무죄였다는 것 모르는 사람도 있다”
20대 때 자기 자본 한 푼 없이 카페를 시작해, 6개월 만에 빚을 다 청산할 정도로 사업 수완이 탁월했던 주병진은 자신이 운영하던 속옷 회사 ‘좋은 사람들’을 한때 연매출 1천6백억원을 올리는 알짜 기업으로 성장시켰으나 2008년 2백70억에 매각하고 현재는 서울 홍대에서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2년 전부터 복귀를 준비하며 담배를 끊고 운동을 시작했다는 그는 막힘 없는 말솜씨나 매너 등은 여전했지만, 사진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보니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다리는 떨고 있었고, 손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첫 녹화 때는 더 심했어요. 노안이 생겨서 프롬프터를 읽지 못하면 어쩌나, 머리를 숙이면 머리숱 없는 게 드러나지 않을까, 극도로 긴장해 두렵기까지 했는데 다시 고향에 왔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앉혔어요. 제가 원래 발동이 늦게 걸리는 스타일이라 3~4회 녹화는 지나야 전성기 때 감을 되찾을 것 같아요.”
12년이면 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세월이다. 누구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반복일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생의 어떤 순간보다 길고 지루했던 기다림의 시간이었을 터. 다시 방송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까 봐 한동안 TV도 보지 않았다는 그는 다시 무대에 선 소감을 묻자 “이제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오래전 헤어졌던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벅차고 설레더군요. 그동안 막막하게만 느껴졌던 내 삶에 희망과 감동이 다시 찾아왔어요.”
그의 컴백은 반가운 일이지만 토크 콘서트 출연을 확정하기에 앞서 매끄럽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다. 당초 그는 MBC 라디오 윤도현의 ‘두시의 데이트’ 후속 프로그램 DJ를 맡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MBC가 윤도현 측과 사전 조율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에 반발해 윤도현이 라디오에서 하차하는 등 파장이 커지자 주병진도 라디오 DJ를 고사했던 것.
“라디오 진행을 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에요. 방송 흐름도 알 수 있고 음악도 좋아하니까. 그저 MBC에 ‘라디오를 하고 싶다’고 제 뜻을 전하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후 2시 시간대가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그럼 윤도현씨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프로그램을 하기로 했다’고 해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마치 제가 윤도현씨 자리를 뺏은 것처럼 기사가 쏟아져 당황했어요. 어떤 기사를 보면 제가 2시 라디오를 맡아 SBS ‘컬투쇼’와 붙어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맹세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제가 왜 가장 잘나가는 프로그램과 붙겠다고 하겠어요? 저 그렇게 무리수 두는 사람 아니에요(웃음).”

12년 만에 돌아온 주병진의 뚝심

‘주병진 토크 콘서트’는 자극적이지 않은 내용으로 유명인의 진솔한 이야기를 끌어내 일단 내용 면에서는 호평을 얻고 있다.



자극적인 프로그램에 중독된 방송계에 정통 토크쇼로 승부수
1977년 개그계에 데뷔한 주병진은 ‘일요일 일요일 밤에’ 진행을 통해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SBS ‘주병진쇼’를 맡아 토크쇼에 첫발을 내디뎠다. ‘주병진쇼’는 주말 심야 시간대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평균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고, 그는 MBC ‘주병진 나이트쇼’, SBS ‘주병진의 데이트라인’ 등으로 간판을 바꿔가며 입담을 과시했다. 30대 초반에 이미 최고 MC 자리에 오른 그는 당시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와 정치인들을 초대해 민감한 질문도 적절히 던지며 웃음을 자아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토크쇼 무대로 끌어낸 것도 바로 그다. 그런 주병진이 보는 요즘 토크 프로그램은 어떨까.
“그동안 집단 MC 체제 등 변형된 형태의 토크쇼가 많아 시청자 입장에서 재미있게 봤는데 정통 토크쇼는 사라진 것 같더군요. 젊은이들이 변칙 스타일을 정통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고요. 지금으로선 정통 토크쇼를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봐요.”
지금까지 ‘주병진 토크 콘서트’를 거쳐 간 게스트는 박찬호·차승원·신승훈이다. 주병진은 게스트를 몰아붙이거나 사생활에 관한 자극적인 질문 대신 그들이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도한다. 최근 토크쇼나 오락 프로그램의 지극히 달고 매운 맛에 길들여진 시청자들에게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시청률도 첫 회 박찬호 편(8.5%)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다. 더군다나 같은 시간대 경쟁 프로그램 ‘해피투게더’는 포맷까지 바꿔가며 주병진의 등장에 적극 대처했다. 아무래도 시청률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 것이다.
“‘해피투게더’와 우리 방송은 콘셉트가 달라요. 운동 경기로 치자면 축구와 야구를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래서 둘을 비교할 때는 서로 다른 잣대를 써야 한다고 봐요. 시청률도 기준이 되겠지만, 얼마나 인간적이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끌어냈나 하는. 돈만 좇다 보면 인생이 황폐해지는 것처럼 시청률에만 신경 쓰다 보면 방송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말초적인 흥미에만 치중하고, 국민 정서에 악영향을 미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돼요.”



12년 만에 돌아온 주병진의 뚝심


“마음보다 몸이 앞섰던 젊은 날, 이제는 여유 갖고 천천히 가고 싶다”
요즘 정치 풍자가 개그의 주요 소재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정치인의 토크쇼 출연도 관심사다. 주병진도 “예전에는 정치인이 출연하면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니까 그런 면에서 위압감을 느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자신감을 내비치면서도 올해와 내년이 총선 대선 정국이라 쉽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요새는 정치인들이 너무 맞아서 기를 못 펴는 것 같아요. 너무 기를 죽이면 제대로 일을 못할 테니 북돋아주는 것도 우리 역할 아닐까 생각돼요.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걸 보면 우리나라가 둘로 쪼개진 것처럼 정치 얘기만 나오면 다들 민감해져서. 저는 중간나라예요(웃음). 정치인을 토크쇼 게스트로 모시면 정치 외적인 이야기로 인간적인 깊이를 가늠해볼 수 있어서 사회적으로도 도움 되는 면이 있다고 보는데, 밸런스를 맞추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주병진은 거듭 “예의를 갖추고 자극적이지 않은 내용으로 토크쇼를 이끌어가겠다. 시청률 싸움에 매몰되지 않고 정말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어릴 적 집안이 가난해 거기서 비롯된 콤플렉스가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지기 싫어 전투적으로 살았죠. 내가 맡은 일은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는데 그게 주변 사람들에게는 부담으로 다가간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이런저런 일로 구설에 올라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런 사건을 겪고 나니 몸을 먼저 보내고 마음이 쫓아가는 것보다 마음을 먼저 보내고 몸은 천천히 움직이는 게 때론 옳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성취감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더군요. 예전만 못할 수도 있지만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