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교육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영어는 거액을 들여서라도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부모들이 많다. 요즘 임신부들 사이에서 불고 있는 영어태교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어느새 영어유치원이 초등학교 입학 전 통과의례가 됐고, 해외 캠프며 조기유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영어 세계로 밀어 넣는 부모들이 많다. 하지만 비싼 사교육비에 가계 부담은 나날이 커지는데 기대하는 효과는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영어 사교육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게 효과적일까.
2009년 발족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영어사교육포럼 대표를 맡고 있는 서울대 영어교육학과 이병민 교수에게 이런 부모들의 고민을 전하자 단호하게 결론을 내려준다. “영어 조기교육은 투자비용 대비 비효율적이다. 굳이 일찍 영어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이 교수에 따르면 조기교육이 아닌 적기교육(適期敎育)이 필요하다. 영어 교육은 빠를수록 좋다는 가설은 영어를 모국어처럼 배울 수 있는 상황에서만 가능할 뿐, 우리나라에서는 영어를 일찍 시작한다고 해서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조기교육의 효과가 부풀려진 측면이 많아요. 부모가 반드시 알아둬야 할 것이, 미국과 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가 아닌 한 한국에서 조기교육을 했다고 해서 아이가 원어민처럼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죠. 많은 학부모들이 영어를 가르치는 목적을 물었을 때 ‘원어민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수준’,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처럼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어쩌면 헛된 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어 공부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너무 일찍부터 많은 돈을 들여가며 굳이 영어유치원에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영어유치원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반드시 보내야 하는 과정인 것처럼 착각하는 부모들이 많은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이가 충분히 모국어를 습득하고 영어 학습에 대한 동기 부여 등이 생겼을 때 시작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에요.”
초등 2~3학년이면 6개월 만에 따라잡아
실제로 유아 때부터 영어를 시작해 5년에 걸쳐 습득한 학습량 정도는 초등학교 2~3학년짜리가 6개월 안에 따라잡을 수 있다고 한다. 영어를 익히는 것은 수영이나 스케이트를 배우는 것과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갓난아기에게 수영을 가르친다고 했을 때 아이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하지만 초등학생에게 수영을 가르친다고 생각해보세요. 갓난아기와 비교하면 금세 수영을 익히죠. 영어도 같은 논리입니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는 영어를 학습으로밖에 익히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전제하에, 어느 정도 아이가 지적으로 성숙했을 때 학습을 시작해도 늦지 않고, 오히려 그게 더 효과적이에요. 실제로 캐나다의 연구결과를 보면 유치원 때부터 4천 시간에 걸쳐 프랑스어를 배운 아이들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2천 시간을 투자해 프랑스어를 배운 아이들을 비교하자 비슷한 수준으로 나왔어요.”
이 교수는 얼마 전 자신이 감수를 맡아 진행한 실험을 또 다른 예로 들었다. 실험 참가자는 중국어를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5, 10, 20세로, 이들은 일주일 동안 똑같은 조건 아래 중국어를 배운 뒤 테스트를 받았다. 과연 누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을까. 정답은 뇌가 가장 성숙한 20세. 이처럼 영어를 모국어가 아닌 학습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환경에서는 조기교육은 크게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실험도 눈여겨볼 만하다. TV 앞에 블라인드를 설치한 채 학부모들에게 한 한국인의 영어 연설 비디오를 들려준 뒤 소감을 물은 실험인데, 모든 학부모들은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영어유치원을 다니는 내 아이가 훗날 저 정도밖에 안 되는 영어 실력을 보인다면 너무 실망스러울 것 같다”고 말한 부모도 있었다고. 한편 똑같은 내용을 외국인에게 들려주자 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칭찬 일색이었다. 그렇다면 이 연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다.
조기교육의 또 다른 문제점은 영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한 금세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자신이 인터뷰한 고등학생을 예로 들며 유아 때 기억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네 살 때 미국에서 유치원을 다닌 학생이었는데 현재 영어 실력은 좋지 않아요. 이 학생 역시 ‘엄마가 저 어릴 때 아빠와 떨어져 캘리포니아에서 1년, 워싱턴D.C. 근처에서 2년 살았다고 하는데 저는 전혀 기억이 안 나요’라고 해요. 당연한 겁니다. 네댓 살 때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미국에서와 똑같은 조건으로 영어에 노출됐다면 모를까, 이후에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린 거죠. 반대로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경우, 영어를 빨리 익히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에 집에서 전혀 한국어를 쓰지 않으면 아이는 1년도 안 돼 한국어를 다 잊어버리고 말아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학부모들은 “어쨌든 영어유치원에 다니면 어려서부터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자신감 상승에 효과적이지 않겠느냐”고 항변할지 모른다. 이에 대해 이병민 교수는 “초등학교 때 영어를 시작해도 아이 스스로 흥미를 찾는다면 자신감은 충분히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영어유치원에서 배우는 학습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학습은 암묵적인 학습과 명시적인 학습으로 나뉘는데, 대부분의 학부모는 영어유치원에서 일상생활에서 한국어를 배우듯 자연스럽게 암묵적인 학습이 이뤄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디스 이즈 펜(This is pen)’ ‘디스 이즈 북’이라고 얘기하며 명시적인 학습을 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다양한 노래와 율동 등을 곁들이긴 하지만 아이들이 그 뜻을 제대로 알고 따라 부르는지는 장담할 수 없죠. 반대로 아이가 우리말 ‘이모’를 익혀가는 과정이 어떤지를 생각해보세요. 보통은 엄마들이 아이에게 설명할 때, 결혼해서 자녀를 둔 사람은 ‘이 사람은 ○○ 엄마야’라고 말하고, 싱글인 경우에는 ‘이 사람은 ○○ 이모야’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면 아이들은 이모라는 단어를 처음에는 남편이나 자식이 없는 여자라고 인식해요. 그렇지만 점점 다양한 상황들을 접하면서 이모라는 단어의 뜻을 넓혀가고 세상의 원리를 배워가는데, 영어유치원에서는 그게 이뤄질 수 있을까요. 실제로 동덕여대 아동학과 우남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영어유치원에 다닌 아이들이 일반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보다 창의력 점수가 떨어진다는 결과를 얻었어요. 아이들에게 익숙한 한국어로 설명하면 더 다양하고 세분화된 의미를 가르칠 수 있는데, 영어라는 낯선 단어를 주고받으니까 한정된 의미만 알게 되는 것이죠.”
엄마들의 또 다른 편견 중 하나는 어릴 때 영어를 배워야 발음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초등학교 3~4학년 때 영어를 시작해도 발음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영어유치원에서 원어민 선생님의 발음만이 최선이 아니다. 가정에서 원어민이 녹음한 영어 동화 CD를 틀어줘도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한글·영어 동화책 많이 읽어줘야
그렇다면 과연 효과적인 영어 교육은 어떤 것일까. 이 교수는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힐 것을 당부한다. 어려서부터 책 읽는 걸 좋아하고, 활자에 익숙해져야만 영어 공부를 시작할 때도 쉽게 흥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노래나 비디오 등 너무 자극적인 방법으로 영어를 접하다 보면 책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이 교수는 “어차피 공부란 책으로 하는 것인데, 책에 대한 흥미를 갖지 못하면 어떤 공부도 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영어 조기교육 없이도 수준 높은 영어 실력을 갖춘 아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이다. 흔히 영어 교육을 두 개의 컵으로 비유하는데, 완전히 비어 있는 컵과 돌이 들어차 있는 컵에 동시에 물을 붓는다고 가정했을 때 어느 쪽이 빨리 넘치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즉 영어가 물이라면 한글 독서로 얻은 지식은 돌이라고 할 수 있다. 폭넓은 우리말 독서로 이뤄진 배경지식이 있으면 영어 책을 읽고 이해하는 속도도 빨라진다.
영어유치원이나 학원이 아니더라도 영어를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이병민 교수는 굳이 비싼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무료 온라인 영어 학습 사이트를 비롯해 시중에 나와 있는 교재와 학습지 등을 적절히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EBS 온라인 사이트에 있는 파닉스 프로그램(Alice’s Wondergarden)을 아이와 함께 일주일에 두세 번, 하루에 20~40분 정도 시간을 내 함께 이용해보는 것도 좋다. 이병민 교수는 “유아, 초등학생 시기에는 영어 실력보다 전반적인 학습 역량과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조언한다.
“아이가 영어에 흥미를 붙인다면 그다음부터는 의도적인 학습에 들어가야 해요. 공부에 있어서는 편법이 있을 수 없어요. 무조건 일찍 시작하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영어를 잘할 거라 생각하지만, 이는 부모들의 헛된 꿈일 뿐이에요.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요. 영어를 말하기, 쓰기, 듣기, 읽기로 나눈다면 말하기를 잘하려면 많이 얘기하고, 잘 쓰려면 많이 써야 하고, 잘 들으려면 많이 들어야 하는 거죠. 그런 노력 없이 영어를 마냥 잘할 순 없다는 걸 분명히 알아둬야 합니다.”
더불어 그는 영어는 평생 배워야 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 교수는 “나는 요즘도 출퇴근 길에 AFN 방송을 듣고, 영자 신문을 본다”며 “영어를 잘하고 싶다면 이처럼 평생 배워야 하는데, 유아 때 영어유치원을 다니고 안 다니고는 훗날 아이의 영어 실력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걸 학부모들이 빨리 깨닫길 바란다”고 말했다.
|
||||||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