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자락이 보입니다. 소나무가 많은 강원도라 하나 강 옆 산벚나무는 빨간 잎으로, 마당에 심어놓은 목튤립과 자작나무는 노란 잎으로 갈아입고 겨울을 준비합니다. 어느 산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했네, 어느 산에는 억새가 만발하네 하는 가을 산행 이야기가 라디오에서 며칠 동안 나옵니다. 추수가 끝난 시골도 이제 곧 농한기에 접어들겠지요. 단풍 구경 삼아 산행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지금 강원도는 또 다른 농사 준비로 바쁩니다. 다름 아닌 마늘이지요.
처음 시골 내려왔을 때 일입니다. 마을을 지나가다 깜짝 놀랐어요. 쟁기질을 소가 아닌 사람이 하고 있는데, 그것도 동네 아주머니가 하시는 광경이었습니다. 밭은 규모가 작고 경사진 비탈에, 기계 값은 비싸고, 일하는 소는 귀하니 어쩌겠어요. 저는 밭은 매더라도 절대 스스로 소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죠. 허나 결심이 무색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마늘밭에 거름을 주던 날 저도 ‘소’가 되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 마늘 값이 폭락해 한 접도 팔지 못하고 지인들과 나눠 먹었지요. 작년부터는 마늘을 가족과 나눠 먹을 만큼만 심고 있답니다.
마늘 심을 때쯤이 오징어도 제철이라 그때마다 오징어순대를 만들어 먹던 기억도 떠오르네요. 제가 사는 삼척은 산골이지만 10분만 나가면 동해 바닷가가 있어 농사일 끝내고 나면 어머님이 종종 오징어회를 사주시곤 하시지요. 오징어 풍년일 때는 동네 분들도 항구에 가서 오징어 사다 말리시기도 합니다.
바람 없이 높은 밤하늘에 별이 총총 떠 있는 날, 동해안을 따라 나있는 7번 국도를 지나다 보면 지평선 가득 노오란 불등이 총총 떠 있는 장관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오징어 배지요. 까만 밤하늘과 바다를 수놓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요즘 오징어가 없어 비싸다더니 며칠 전부터 잡히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새벽시장에 나가봤어요. 동해안 쪽에서 잡히는 생선은 명태 말고는 오징어나 대게가 대부분인데 대게는 비싸니 친정어머니가 해주시던 오징어젓갈을 한번 만들어보려고요. 파는 오징어젓갈은 짜고 맵고 양념 맛이 너무 강하지만 어머니가 해주셨던 오징어젓갈은 담백하면서도 시원해서 가끔 생각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음식도 습관이고 추억이 분명하지요? 나이가 들수록 어렸을 때 먹었던 음식들이 그리운 거 보면 말입니다.
낙엽 떨어지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11월은 왠지 모르게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보다 더 쓸쓸해지곤 하죠. 마늘을 심다 생각해보니 ‘달력의 숫자로 한 해의 시작과 끝을 나누는 게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마늘의 시작은 겨울이니 어쩌면 일 년은 봄여름가을겨울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겨울봄여름가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화 중에 세 마리 물고기가 물속에서 여유롭게 헤엄치는 그림을 ‘삼여도’라고 해요. 세 가지 여유라는 뜻인데 ‘삼국지’ 위지 ‘왕숙전’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했죠. 동우라는 사람이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이에게 학문하는 데는 세 가지 여유 시간만 있으면 된다고 충고했다고 합니다. 하루의 나머지 시간인 밤과 일 년 중 쉬는 시간인 겨울,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는 비 오는 날, 이 세 가지 여유 시간만 잘 활용해도 학문하기 충분하다는 뜻이죠. 곧 밤이 긴 겨울이 시작됩니다. 그동안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미뤄뒀던 바느질을 이 여유 시간을 잘 활용해서 해야겠습니다. 산골의 겨울은 시작일까요? 마무리일까요?
숄 재활용해 만든 조끼
“추울 때 걸치면 어깨가 따뜻한 숄을 재활용해서 조끼를 만들었어요. 팔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을 내고 등에는 천 조각으로 장식했답니다. 잘라낸 천으로는 코르사주와 바늘꽂이를 만들었고요.”
준비재료 숄, 펜, 가위, 실, 바늘, 자투리 천
만들기
1 숄에 팔이 들어가는 위치를 찾아 잘라내고 버튼홀 스티치로 마감한다.
2 자투리 천을 세 장 이어 등 부분에 반박음질로 장식한다.
3 숄에서 잘라낸 천을 하나는 돌돌 말아 감침질로 마무리해 뒤에 핀을 꽂아 코르사주를 만든다.
4 나머지 하나는 조각 천을 덧대 바늘꽂이를 만든다.
”오랜만에 새벽시장에 나가 오징어 한 두름 사서 젓갈도 담그고, 오징어순대도 만들어 봤어요. 젓갈은 무오징어 김치라고 해야 될까 봐요. 툇마루에 앉아 늦가을 들녘을 보며 묵은지를 곁들여 오징어순대를 먹으니 이보다 행복할 수 없네요.”
무채와 버무린 오징어젓갈
■ 준비재료
오징어 3마리, 소금·검은 통깨 약간씩, 무 ½개, 쪽파 20대, 다진 마늘 2큰술, 까나리액젓·고춧가루·매실청 5큰술씩
■ 만들기
1 오징어는 내장을 제거하고 껍질을 벗긴 뒤 씻어서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소금을 친다.
2 오징어를 냉장고에 넣고 하룻밤 숙성시킨다.
3 무는 채썰어 소금을 약간 뿌려 1~2시간 정도 재운다.
4 쪽파는 4~5cm 길이로 썬다.
5 쪽파와 다진 마늘, 까나리액젓, 고춧가루, 매실청, 검은 통깨를 섞어 양념을 만든다.
6 무과 오징어를 양념에 버무린다.
묵은지 넣어 만든 오징어순대
■ 준비재료
오징어 3마리, 당면 50g, 묵은지 ¼포기, 쪽파 5대, 청양고추 3개, 당근·두부 1개씩, 녹말가루·초고추장 적당량
■ 만들기
1 오징어는 몸통과 다리를 분리해 몸통 내장을 제거하고 씻는다.
2 당면, 오징어 다리, 묵은지, 쪽파, 고추, 당근을 잘게 다진다.
3 두부는 으깨서 ②와 섞는다.
4 오징어 몸통 안에 녹말가루를 바르고 ③을 넣은 뒤 이쑤시개로 입구를 막는다.
5 ④를 찜통에 쪄서 초고추장과 곁들여 낸다.
김희진씨(40)는…
강원도 삼척 산골로 귀농해 남편은 천연염색을 하고, 그는 규방공예를 하며 살고 있다. 초보 시골 생활의 즐거움과 규방공예의 아름다움을 블로그(http://blog.naver.com/meokmul)를 통해 전하고 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