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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다시 태어나다

미국 검사에서 청소년 사역가로 변신 이어령 딸 이민아 첫 인생 고백

“이혼. 실명위기. 큰아들 사망. 자폐아들... 기적을 알기에 시련도 두렵지 않아요”

글·김유림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2011. 09. 15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딸이자 미국 캘리포니아 주 검사로 활동하던 이민아씨. 평생 이성(理性)에 기대어 살던 아버지를 신 앞에 무릎 꿇게 한 주인공으로 유명한 그는, 4년 전 큰아들을 잃은 뒤 술과 마약에 빠진 ‘땅끝의 아이들’을 돌보며 청소년 구제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동안 이씨에게 닥친 시련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축복”이라고 말한다.

미국 검사에서 청소년 사역가로 변신 이어령 딸 이민아 첫 인생 고백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과 강인숙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사이에서 1녀2남 중 장녀로 태어난 이민아씨(52).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조기 졸업한 뒤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이후 해스팅스 로스쿨(Hastings LawSchool)에서 학위 및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캘리포니아 주 검사로 임용돼 청소년 범죄 예방과 선도를 맡아왔다. LA지역 부장검사까지 역임하며 승승장구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이력과 달리 그의 인생은 부모의 품을 떠난 순간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의 힘겨웠던 날들이 세상에 알려진 건 2007년 한평생 자신의 지성과 이성에만 기댄 채 무신론자로 살아온 이어령 전 장관이 기독교 세례를 받으면서다. 당시 그가 신에게 복종한 결정적인 이유는 딸 이민아씨 때문으로 알려졌다. 망막 박리로 실명 위기에 놓여 있던 이씨가 어느 날 기적처럼 다시 빛을 보게 되자 아버지는 남은 인생을 신을 위해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8월 중순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이민아씨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만났다. 영인문학관은 이어령의 ‘령’과 강인숙의 ‘인’을 따서 부부가 함께 설립한 문학박물관으로 이곳의 안주인인 강 여사가 딸과 함께 나와 반갑게 취재진을 맞았다. 사진 촬영이 시작되자 “여기가 사진이 잘 나와요” 하며 평창동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원으로 사진기자를 안내했다. 1시간 정도를 예상하고 시작한 인터뷰는 이민아씨의 열정적인 답변으로 2시간을 훌쩍 넘겼고 그나마 어머니 강 여사의 만류로 마무리됐다.
얼마 전 이씨는 고난의 시절에 그가 직접 체험한 사랑의 기적, 그 여정을 담아 간증집 ‘땅끝의 아이들’(시냇가에 심은 나무)을 펴냈다. 책 출간은 지난해 한국에서 눈 수술을 받은 뒤 요양을 하고 있을 때 “네가 하고 싶은 얘기를 녹음한 뒤 그 내용으로 책을 펴내자”는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됐다. 이야기는 늘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라하던 어린 시절의 이민아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워낙 유명한 분이시니까 저도 아버지의 딸답게 살려고 애썼고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다른 아이보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말썽도 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야만 아버지가 저를 사랑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저를 사랑하셨지만 유교 가정에서 자란 아버지는 자식에게 애정 표현을 잘 하지 못하셨어요. 아버지에게 몇 번 안아달라고 매달린 적이 있는데, 늘 글을 쓰시느라 바쁘셨던 아버지는 저를 냉정하게 밀쳐내셨어요. 그것이 평생 저를 공격하는 상처가 됐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죠.”

이혼한 딸에게 “그냥 쉬어라” 한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씨는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첫사랑에게서 구하려 했다. 결국 스물두 살에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하지만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모에게 손 벌리기 싫어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힘겹게 생활을 꾸려가느라 두 사람은 서서히 지쳐갔다. “피곤해 죽겠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해!” 하고 언성을 높이는 남편을 보면서 그는 또다시 스스로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에 좌절감을 느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나 지금 원고 마감 시간이야. 얘 좀 데려가!” 하고 소리 지르던 아버지의 모습과도 오버랩돼 상실감은 더욱 컸다. 결국 그는 첫 남편인 김한길(전 문화부장관)과 결혼 5년 만에 이혼했다.
“이혼하자마자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갓난아이를 안고 고향에 갔어요. 비행기를 타고 가는 내내 아버지가 저를 질책하실까 봐 두려움에 떨었죠. ‘아빠 나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하면서 아빠 품에 안겨 울고 싶었지만 그동안 제가 아버지를 너무 밀어냈기 때문에 안길 품이 없다는 사실이 더 슬펐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저를 보시자마자 ‘여보, 쟤 너무 말랐다. 밥 좀 먹여’ 하시면서 부엌으로 들어가시더군요. 처음으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순간 용기를 내서 아버지께 ‘아빠, 미안해요. 아빠, 창피하게 해서 너무 미안해요’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네가 지금 내 걱정하게 생겼니, 그냥 쉬어라’ 하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결혼하기 전에 쓰던 방에서 모든 걸 잊고 며칠 동안 먹고 자고를 반복했어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학업을 마친 이씨는 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 재혼을 했다. 이후 아이를 셋이나 더 낳았다. 다시금 안정이 찾아왔나 싶었지만 둘째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자폐 판정을 받았다. 그때부터 악전고투가 시작됐다.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리라 다짐한 그는 아이와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함께 크리스천 학교를 다녔다. 학교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바람에 아이를 맡기는 대신 그가 보조교사로 활동해야 했다.

미국 검사에서 청소년 사역가로 변신 이어령 딸 이민아 첫 인생 고백


“남들은 하와이가 낙원이라고 하지만 저는 광야 중의 광야였어요. 아이와 씨름하는 것도 힘든데, 보조교사 노릇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주로 하는 일은 시험지 채점과 같은 단순 업무였지만 제게는 결코 쉽지 않았어요. 그들은 제가 허드렛일 시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일부러 틀리게 해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더라고요. 하와이에 있는 동안 아이의 상태가 좋아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기대를 많이 하고 간 곳에서 아이도 저도 울기만 많이 울었죠.”
둘째 아이와의 하루하루는 전쟁과 같았다. 마음으로는 아이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싶지만 먼저 나오는 말은 비난과 원망이었다. 아이를 윽박지르고 몰아붙이자 아이도 그를 무서워하며 거부했다. 마치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밀쳐낼 때와 같았다. 문득 아이와의 관계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마음을 비우고 신앙에 의지하며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려 애썼다. 아이에게 사랑과 칭찬의 말을 해주자 놀랍게도 아이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자폐를 가진 아이들은 어느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만 해요. 못하게 말리면 난리를 피우죠. 그런데 어느 날 아이에게 ‘이제 그만 하고 자리를 옮겨야 해’ 했더니 처음으로 ‘응. 그러지 뭐’ 하면서 선뜻 하던 일을 멈추는 거예요. 정말 믿기 힘든 광경이었죠. 그때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하나님이 아이에게 사랑을 부어주신다는 걸 몸으로 느낄 정도로 빠르게 달라졌어요. 사실 그 전까지 남들이 저를 보면 ‘저 여자 미쳤구나’ 싶었을 거예요. 친구가 아이는 좀 괜찮아졌냐고 물으면 ‘당연하지. 다 나았어. 하나님이 다 낫게 해주실 건데 뭐가 걱정이야’ 하면서 독불장군처럼 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정말 아이가 많이 건강해졌고, 올해 열아홉 살인데 운전도 하고 자폐 증상이 남아 있지 않아요(웃음).”



큰아들 죽음으로 더욱 견고해진 신앙심
둘째 아이의 변화를 통해 신앙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씨는 2002년 세례를 받은 지 10년 만에 자신의 신앙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고 고백한다. 그때부터 그는 주위의 권유로 구원간증을 하기 시작했고 한인교회 내에서도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특히 자폐인 자녀를 가진 부모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그 자신이 망막 박리로 실명 위기에 놓인 것. “점점 세상이 뿌옇게 보이더니 어느 날 망막이 찢어졌다는 판단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7개월 뒤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의사로부터 “망막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은 거였다. 정리하자면 찢어졌던 망막이 다시 붙은 것이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기적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씨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졌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다.
하지만 그 순간 신은 또다시 그에게 잔인한 시련을 안긴다. 4년 전 버클리대에 다니던 큰아들 유진군이 돌연사 한 것.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며 쓰러진 아들은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19일 만에 그의 곁을 떠났다. 아이를 보내고 석 달 동안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1년을 눈물로 보냈다.
“매일 울면서 신을 원망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큰 시련을 제게 주시는지, 그 이유가 뭔지를 묻고 또 물었죠. 불구덩이 속에서 살이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어느 순간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내가 부활이고 내가 생명이다’라는 구절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됐어요. 유진이는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것일 뿐, 죽은 게 아니에요. 아이의 묘비명을 ‘Resting in his Father’s house(아버지의 집에서 쉬다)’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죠.”
이후 이민아씨는 아들 또래 비행청소년들 즉, ‘땅끝의 아이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2009년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각 주와 오스트레일리아, 푸에르토리코, 아프리카, 중국 등지를 돌며 열정적으로 청소년 사역에 앞장서고 있다. 자살 충동, 약물 중독, 부모와의 대립 등으로 시들어가는 아이들에게 물과 빛이 돼주려 애쓰고 있다. 그가 청소년 선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검사 시절 갱단 범죄에 연루된 교포 아이 K가 종신형을 선고받게 되자 한인교회 목사의 부탁으로 아이와 면담을 진행하면서다. 당시 그는 아이를 변호해주려고 검사의 신분을 버리고 변호사로 이직했다.
“지금껏 상담한 아이들 중에는 자식에게 헌신적인 부모들이 많아요. K라는 아이만 봐도 부모에게서 상처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엄마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뛰쳐나갔어요. 이는 ‘사랑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이 받고 싶어하는 사랑과 부모가 주고 싶은 사랑이 분명 똑같지만 표현에 있어 완전히 다른 언어가 되고 마는 거죠. 우리 셋째 아들이 가출한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데리고 오는데, 그러면 저는 그 아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해요. 어느 날은, 아이를 돌려보냈는데 아들이 와서 하는 말이 ‘엄마, 분명히 내 친구 엄마가 친구를 돌려보내달라고 했어?’ 하고 묻는 거예요. ‘당연하지. 엄청 걱정하더라’ 했더니 ‘그런데 내 친구 엄마는 정신이 이상한 거 같아. 친구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당장 나가! 하고 소리를 질렀대’ 하면서 의아해하는 거예요. 이게 우리나라 문화권에 있는 부모들의 현실이에요. 아이가 ‘내 부모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구나’라고 느끼면 반항과 폭력의 세계에 있던 아이들도 부모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요.”

땅끝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사랑
상처받은 아이들을 치료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그들에게 정체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땅끝의 아이들 중에는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특히 문화적·세대적 갈등을 동시에 겪는 이민 가정의 아이들 중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문에 힘겨워하는 이들이 많다. 그럼에도 부모는 아이들과의 대화를 어려워하고, 다가가는 방법을 몰라 아이들의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지지 못한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아이들을 보면 어릴 적 제 생각이 많이 나요. 부모들은 상담하면서 ‘제가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아이가 제게 이럴 수 있죠’라고 한탄하지만 아이들의 생각은 정반대죠. 대화가 없기 때문이에요. 저 역시 어른이 돼서야 느낀 거지만 제 부모와 제가 살아온 세대는 하늘과 땅 차이예요. 부모님 세대는 밥 굶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대화가 없으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거죠.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사랑이다’라는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려고 해요.”
열등감 있는 아이에게는 자신감을 심어줘야 한다. 이민아씨는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예로 들며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거지와 화가의 이야기였는데, 길거리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는 화가에게 어느 날 거지가 다가와 자신의 모습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한다. 흔쾌히 거지의 요청을 받아들인 화가는 1주일 동안 열심히 그림을 그린 뒤 거지에게 보여줬다. 그림 속 거지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멋진 신사의 모습이었고, 그 모습에 감동한 거지는 “당신이 본 내 모습이 이렇다면 나는 그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결국 몇 년 후 어엿한 CEO로 변신했다고 한다.
“저도 만나는 의사들마다 앞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부모님의 기도와 사랑으로 얼마 전 새 세상을 만났어요. 아버지는 안과 의사만 만나면 우리 딸 좀 고쳐달라고 하셨는데, 지난해 추석 때 부모님을 뵈러 왔더니 저를 보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좋은 의사를 찾았으니 가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여태껏 모든 의사가 망막 박리 기록 때문에 선뜻 수술하자는 말을 못했는데, 이번에 만난 의사 분은 몇 가지 검사 후 ‘백내장이 있네요. 수술합시다’ 하시더군요. 올 2월에 수술을 받았는데, 백내장 수술을 하면 시력 교정이 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저는 안대를 푸는 순간 감동에 북받쳐 엉엉 울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 이후로 이렇게 세상이 깨끗하게 보인 건 처음이거든요. 다 부모님 덕분이에요(웃음).”
지난 30년 동안 이혼과 실명 위기, 아들의 죽음 등 롤러코스터와 같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켜온 이민아씨. 그는 오히려 고난을 축복이라 말한다. “내 생애 가장 기뻤던 순간은 죽을 것 같은 진통 끝에 첫아이를 낳았을 때였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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