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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보 화가’ 몽우 조셉킴의 반전 드라마 같은 인생

글·임지영 사진·지호영 기자

2011. 08. 17

어지러운 롤러코스터를 타고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간신히 빛을 보고 안도한 느낌이랄까? 이중섭 이후 한국 최고의 천재화가라 불리는 몽우 조셉킴과의 인터뷰가 딱 그랬다. 손바닥만 한 엽서 크기 그림 한 장이 1억원에 팔린 화가, 화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스스로 왼손을 망치로 내리친 화가, 뉴욕의 한 파티에서 5백 점의 그림이 단 이틀 만에 매진된 화가 등 숱한 이슈를 뿌리며 화제의 중심에 서온 그가 ‘바보화가’라는 책을 펴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천재에서 바보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 몽우 조셉킴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사.

‘바보 화가’ 몽우 조셉킴의 반전 드라마 같은 인생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오늘도 깔끔한 줄무늬 와이셔츠에 보라빛 넥타이를 맨 흠잡을 데 없는 정장 차림으로 그림을 그린다. 지루한 장마 끝에 경기도 안산 한 빌라 반지하에 자리 잡은 그의 사무실 겸 작업실은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고 녹이 슬어 있다.
“죄송해요. 집이 좀 지저분하지요? 나름 손님이 온다고 청소한 건데도 이래요. 괜찮으시면 여기 앉으시죠.”
“누추한 공간에 초대해 미안하다”며 사무용 의자를 권하는 몽우 조셉킴(35)의 얼굴에는 어둡고 습한 집의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를 이루는 소년 같은 해맑은 웃음이 피어 있다. 집과 아틀리에의 중간쯤 되는 그의 작업실에는 수많은 전각과 캔버스, 물감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책상 위에는 빨강과 검정이 강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그림 한 점이 물감도 마르지 않은 채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혹시 작업을 방해한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묻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진 촬영을 할 것 같아서 어제 밥을 적게 먹었더니 지금 상태가 좀 좋질 않네요. 제 얼굴, 잘 나올까요?”라고 동문서답을 한다. 생의 절반 이상을 지독한 가난과 병고 속에서 그림을 그렸고, 지금도 임파선암·복막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맑고 밝은 얼굴이다.

“울지 마, 지금 어둠이 깊은 것은 새벽이 가깝기 때문이야”
본명 김영진. 몽우의 첫 스승은 전각을 하던 아버지였다. 그의 부친은 음악, 서예, 전각, 그림 등 다방면에서 예술적 감성이 넘치는 예술인으로, 어린 몽우는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말보다 그림을 먼저 배웠다. 하지만 친구들과 한창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놀 나이에 그는 암과 백혈병, 간질 같은 잔인한 병에 시달려야 했다.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과 몸 전체에 퍼진 암세포로 인한 참을 수 없는 고통은 화가로서의 꿈을 키우던 어린 몽우를 점점 심약하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 병원에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의사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한 말을 그만 엿듣고 말았는데, 상태가 호전되지 않을 것 같고 설사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스무 살을 못 넘길 것 같다는 이야기였어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눈앞이 하얘지면서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죠.”
몽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꿈을 꾸고 공상을 하기에도 부족한 열 살, 그는 걸핏하면 울고 화를 내며 자기 파괴적인 나날을 보냈다. 어차피 열심히 살아봐야 일찍 죽어버리면 끝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은 그에게 꿈꿀 여유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바보 화가’ 몽우 조셉킴의 반전 드라마 같은 인생

몽우 조셉킴은 양복을 입고 그림을 그린다. 건강이 나빠 언제 마지막 순간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겠다며 학교를 그만두려는 어린 아들의 좌절에 아버지는 말할 수 없이 무력한 슬픔을 느꼈지만 결국 몽우가 5학년이 되던 해 이를 허락한다. 대신 그는 아들에게 전각과 서예, 초상화 등을 가르치며 몽우의 예술적인 재능과 감성을 키워주었다. 하지만 부친마저 몸이 안 좋아져 요양을 떠난 후 몽우는 형의 미술 스승이었던 유대인 아브라함 차로부터 조각과 미술을 비롯해 종교, 문학, 예술, 법학, 언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다.
남처럼 오래 살 수 없다면 살아 있을 때 좋아하는 그림이나 실컷 그려볼 생각으로 몽우는 인사동 거리에서, 마트 한쪽에 자리한 공방에서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다. 10대 시절 인사동 거리에서 그림을 그릴 때부터 외국인 컬렉터를 위해 ‘조셉킴’이라는 서명을 사용했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상하게 그림이 더 잘 그려지던 까닭에 ‘꿈이 내게 친구가 되어주었으면’하는 소망을 담아 ‘몽우(夢友)’라는 이름을 아호로 사용하게 됐다. 엽서만 한 것들부터 A4 사이즈의 그림까지 강렬한 컬러와 힘찬 터치가 트레이드마크인 몽우의 그림은 인기가 좋았다. 남다른 심미안을 지닌 한 외국인 관광객이 무명인 그의 그림들을 1백20만원에 통째로 구입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유달리 손이 빠른 초상화 화가로도 인기와 유명세를 누릴 무렵,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인사동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한 큐레이터가 그림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에게 계약을 맺자고 제안한 것. 몽우는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가슴 벅찬 환희는 곧 크나큰 실망으로 바뀌었다. 계약서 학력난에 ‘초등학교 중퇴’라고 적힌 것을 보고 갤러리 관장이 ‘도저히 안 되겠다’며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다시 인사동 거리로 나왔을 때 그의 앞에 한 독일인이 다가왔다. 세계적인 피카소 전문 컬렉터로 당시 한국에서 수집할 만한 미술품을 찾느라 인사동을 이 잡듯 뒤지고 있던 토머스 마틴이었다.
“마틴씨가 그날 제 그림 스무 점을 모두 사주셨어요. 한국의 혼이 담겨 있는 그림이라는 칭찬까지 해주셨죠.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넘지 못할 벽에 좌절해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죽음에 대비하려 늘 양복에 넥타이 매고 그림 그려
토머스 마틴을 두 번째 스승이자 매니저로 맞은 뒤 몽우의 한국화에는 서양화의 중후한 감각이 곁들여졌다. 화풍도 한층 세련된 분위기로 업그레이드됐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몽우의 지욕(知欲)과 학습 능력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에 비유할 만큼 무한적이었다.
1999년, 몽우는 인사동에서 알게 된 한 재미교포의 소개로 뉴욕에서 전시회를 연다. 몽우에게 ‘천재 화가’ ‘한국의 서정적인 피카소’라는 찬사가 쏟아지게 된 것이 바로 이때부터로, 저명한 미술 관계자들과 금융계 인사들이 모인 그 파티장에서 몽우의 작품 5백 점이 단 이틀 만에 매진되는 파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앞날은 장밋빛 인생을 예약하는 듯했다.

‘바보 화가’ 몽우 조셉킴의 반전 드라마 같은 인생

10대 초반부터 백혈병으로 투병했던 몽우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때로는 전투적이고, 때로는 몽환적이며 슬픔 속에도 꿈과 희망이 녹아 있다.



그러나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화가에게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평생 물감 값 걱정 없이 마음껏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을 거라는 누군가의 말에 혹해 손을 댄 앤티크 사업과 지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보증을 섰다 생긴 빚으로 그는 다시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망령처럼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사채업자들의 협박 전화는 곧바로 건강 악화로 이어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 죽음을 생각하는 고통의 날들이 지속됐고, 붓을 잡을 기력조차 남지 않아 마지막을 준비하던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때부터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초라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지금도 서울로 와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종종 받아요. 안산에 사는 게 불편하지 않느냐며. 하지만 저는 마음의 고향인 안산을 떠날 수가 없어요.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이곳에 묻혀 계신 데다 여동생도 이곳에 살거든요. 이곳을 떠나면 왠지 어린 시절의 추억은 물론 부모님과도 영영 작별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이유도 있어요. 제가 그림을 그리다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지면 돌아가신 부모님과 제 가족들이 더 마음 아파할까 봐서요.”
그 무렵, 그의 소식을 듣고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중소기업 사장이 찾아왔다.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며 돈다발을 던져주고는 “그냥 똑같이 그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거만하게 내뱉는 모습에 몽우는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돈 때문에 최후의 보루인 예술적 자존심마저 지키지 못했다는 모멸감에 그는 재능의 전부인 왼손을 망치로 사정없이 내리치기에 이른다. ‘왼손’이라는 그의 시그너처는 자해로 사라져버렸고, 그의 화가 생명도 그것으로 영영 끝이 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생은 모질고도 질겼다. 몽우에겐 불행 중 다행으로 오른손이 남아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천재가 범인으로 몰락했다’는 평단의 반응은 매서운 나머지 두렵기까지 했다. 몽우 스스로도 자신의 한계에 좌절해가고 있을 무렵, 그가 오른손 화가로 살아갈 수 있게 새 심장을 달아준 후원자가 나타났다. 미술평론가 송준 선생이 바로 그 ‘키다리 아저씨’다.
“제 생각에는 제가 그냥 길가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돌멩이 같은데 송준 선생님은 저더러 자꾸 보석이라고 하세요. 저는 천재 화가나 위대한 화가가 아닌데 말이죠. 돌멩이인데 보석으로 대해주시니까 제 스스로 진짜 보석이 되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기더군요.”
왼손으로 인해 교만을 알았다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 남은 오른손은 그에게 겸손을 가르쳐주었다. 생애 가장 무력한 때 오른손잡이가 되면서 그는 자신이 타고난 천재가 아닌, 그냥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화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객기와 호기도 점차 사라졌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천재 아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바보

‘바보 화가’ 몽우 조셉킴의 반전 드라마 같은 인생


2005년, 몽우는 그렇게도 원하던 첫 전시회를 부산에서 열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지인이 보여준 백석 시집을 보고 예술가로서 충격과 영감을 동시에 받게 된다. 이 충격은 예술 세계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그의 오른손은 왼손이 손쉽게 부리던 기교를 따라 하지 못했지만, 대신 왼손이 표현하지 못한 구상과 추상의 깊이를 풍부한 감성으로 표현해냈다. 오른손으로 인해 그의 그림은 고정된 캔버스 속 이미지에서 멜로디를 지닌 한 편의 시가 됐다. 그림을 통해 마침내 세상과 소통하게 된 지금, 그는 언젠가 자기 것이 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몰라요. 여유가 생겨서인지 이제는 사랑도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건 뱃살을 빼고 건강 관리를 한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아요. 요새는 날씬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배에 왕(王)자도 있어야 한다면서요?”
농담으로 치부하려던 그 말을 몽우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서른다섯 어른의 몸을 하고서도 여전히 때 묻지 않은 아이의 눈과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 전 그는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과 예술 세계를 독특한 삽화와 정갈한 글로 엮은 삽화 수필집 ‘바보 화가(동아일보사)’를 펴냈다. 책을 쓰기 위해 삶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는 몽우는 천재가 아닌 ‘바보’야말로 자신을 더 잘 표현하는 단어라고 말한다.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희망은 태양처럼 뜨더라고요. 그 태양을 못 보고 오랫동안 어둠 속에 나를 내던지고 방관했으니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짓이었지요. 고통스러워하며 밤을 새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괴로워할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자면 다음날 머리가 맑아지고 시야가 달라지는데 말이죠.”
인터뷰 후 몽우는 서울 가는 길에 심심하지 말라며 기자에게 어포와 별사탕을 한가득 쥐여주었다. 세상의 잣대로 잴 줄 모르는 몽우만의 독특한 환송법인 셈이다. 그가 건네준 형형색색 별사탕의 마법 때문이었을까? 몽우의 말처럼, 주말의 필연적인 교통 체증에도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아주 오랜만에 지루하지 않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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