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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시인의 삶

새 시집 ‘둥근 세모꼴’ 펴낸 유안진

수줍은 소녀를 시로 이끈 팍팍한 삶 고백

글·김유림 기자 사진·지호영 기자

2011. 08. 17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유안진 시인이 새 시집을 펴냈다. 이번 시집은 일단 재밌다. 그러면서 무릎을 ‘탁’ 칠 만한 인생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정년을 1년 남겨두고 서울대 교수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그는 유학파 지식인이라는 화려한 이력 뒤에 시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힘겨웠던 유년 시절이 자리하고 있다. 일흔의 나이에도 언어의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유안진 인생 이야기.

새 시집 ‘둥근 세모꼴’ 펴낸 유안진


서울대 명예교수인 유안진 시인(70)이 새 시집 ‘둥근 세모꼴(서정시학)’을 펴냈다. 짧은 서정시를 일컫는 ‘극서정시(極抒情詩)’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는 위트와 해학, 천천히 곱씹게 만드는 진리가 담겨 있다. 종교와 예술, 페미니즘 외에도 옛 애인을 보고 가슴 콩닥거리는 소녀의 감성이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봤을까?/ 날 알아봤을까? (‘옛날 애인’ 전문)
아기 안은 엄마를 구경하던 원숭이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제 새끼를 안고 와 보여준다(‘자랑거리’ 전문)
에덴동산이 한국 땅에 있었더라면/ 안타깝다/ 아담이 한국 남자였더라면/ 절대로 아내 말을 듣지 않았을 텐데.(‘한국 남편’ 전문)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뜨려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뜨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는 그런 거겠지.(‘계란을 생각하며’ 전문)
어제는/ 나 그대와 같았으나/ 내일은/ 그대가 나와 같으리라.(‘은발이 흑발에게’ 전문)

장맛비가 지루하게 내리던 7월 초,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유안진 시인은 잿빛 도시를 비웃듯 화사한 코발트블루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기자가 시인의 패션 감각을 칭찬하자 “아휴, 10년도 더 넘은 옷이에요” 하며 손사래를 친다. 그러고는 이내 목을 감싸고 있는 목걸이를 가리키며 “이건 갑상선 수술 자국을 가리기 위해 착용한 거예요” 하고 수줍게 웃는다. 옷차림새에서도 느껴지듯 억지로 멋을 내지 않는 자연스러운 성향은 그의 문학에도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담백하고 꾸밈없는 글귀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물론이고, 이번 시집에도 유안진 시인의 청초함이 묻어난다.
‘둥근 세모꼴’이란 제목은 상호 모순되는 현실을 말한다. 누구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완전한 세계가 있지만, 현실은 그 이상향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둥근 세모꼴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아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세계에는 충분히 있을 수 있어요. 막노동자 출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참 좋아하는데, 그는 대학교수라는 안전한 위치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 노동을 하며 살았어요. 그는 말이 안 되는 걸 억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시에서는 사실 말을 빼면 실체가 사라지잖아요. 그렇기에 저는 그가 말하지 못한 걸 시로 말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둥근 세모꼴이 이 세상에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비슷한 모양의 것이 있으니, 바로 메밀 열매다. 하얀 메밀꽃이 지면 밑은 둥글고 끝은 뾰족한 둥근 세모꼴의 열매가 맺히는데, 경북 안동이 고향인 유안진 시인은 배고팠던 어린 시절, 산비탈에 심어놓은 메밀로 초가을 허기를 달랬다. 성인이 된 뒤에는 줄기는 빨갛고 꽃은 하얀 메밀이야말로 시인의 삶과 같다고 생각했다.
“한 편의 시를 꽃피우려고 자신의 몸뚱이는 피로 물들이는 치열한 삶을 사는 게 시인이거든요. 하지만 시인의 삶은 너무 기름져도 안 되고, 풍족해서도 안 돼요. 반드시 결핍이 있어야 좋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죠.”
미국 유학을 하고 30년 넘게 서울대 교수로 활동해온 그가 결핍을 말한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에게도 인생을 뒤바꿔놓은 마음의 생채기가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그것이다. 가난한 집의 맏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새장가 들 것을 강요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그의 밑으로 남동생이 둘이나 태어났지만 어려웠던 시절, 전염병과 영양결핍으로 갓난아이들은 첫돌도 되기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결국 아들 없이 네 자매만 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었고,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유안진 시인은 어려서부터 여자의 일생에 깊은 회의가 들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안동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내방가사’를 즐겨 부르셨다. 어머니의 한 서린 시조를 듣고 자라며 유안진 시인은 자연스레 시의 음률을 익혔다고 한다.

메밀에 담은 시인의 삶, 결핍이 빚어낸 아름다움



새 시집 ‘둥근 세모꼴’ 펴낸 유안진


“문학적 재능은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것 같아요. 고향 마을에서는 봄가을로 한시 짓는 백일장이 열렸는데, 특히 봄에는 아낙네들끼리 경치 좋은 산속에 가서 진달래꽃으로 전을 부쳐 먹으면서 가사를 짓는 화전놀이를 했어요. 그럴 때면 어머니는 가사를 잘 지으셨는지 매번 버선감이며 홑적삼감 등을 상품으로 타 오시곤 했죠(웃음). 시로 자신의 한을 다 삭힐 순 없었겠지만, 그 시절 어머니께 시조는 큰 위로가 됐을 거라 생각해요.”
할아버지도 직접 그에게 글을 가르쳤다. 집안의 맏딸로 아들 몫까지 해야 했던 그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을 줄줄 외우고 다녔다. 그때 익힌 3·4조, 4·4조의 음률은 나중에 그가 글을 쓸 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안진 시인은 “할아버지는 저녁에 죽 한 그릇 드시고 한밤중에 허기가 찾아오면 시조와 한시를 읊으셨다. 비록 돈은 없지만 글을 읽는 것이 양반가의 체면을 유지하고 가난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시인의 문학적 감수성은 학창 시절부터 피어났다. 안동 시골마을에서 대전으로 이사해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옹달샘에서 바다로 나온 것처럼 도시 생활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힘들어 그가 매일 찾은 곳은 헌책방. 날마다 무서운 속도로 책을 읽어나간 그는 얼마 안 돼 그곳에 있는 모든 책을 읽어버리고 말았다. 더는 읽을 게 없자 헌책방 주인은 시집이라도 읽으라며 김소월 시인의 ‘소월시초’를 그에게 내놓았다. 시를 읽자마자 그는 스펀지처럼 온몸으로 시가 흡수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시구 하나하나가 저절로 외워지면서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 사건이 벌어졌다.
“문예반에 들어갔는데 어느 날 김소월 시인의 ‘산유화’를 읽다가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라는 시구를 보게 됐어요. 순간 ‘왜 봄 여름 가을 순서가 아니고 가을부터 나올까, 또 왜 가을이 아니고 ‘갈’이라 했을까. 한 자 한 자 두 자 두 자 음률을 맞춘 걸까’ 하고 많은 궁금증들이 생겨났죠. 그래서 선생님한테 질문했는데, 그때만 해도 제가 숫기가 없어서 조리 있게 질문을 하지 못했나 봐요. 선생님이 그만 제 말을 무시하고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주더라고요. 그때 얼마나 속이 상하고 선생님이 원망스럽던지, 선생님한테 복수하기 위해 반드시 시인이 되겠노라 다짐했어요(웃음).”
그날 이후 시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김소월의 ‘산’이라는 시를 접하고는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라는 시구 때문에 몇날 며칠을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산골마을에서 자라면서 오리나무를 많이 본 그는 ‘떡갈나무, 소나무처럼 멋있는 나무도 많은데 왜 하필 볼품없는 오리나무를 선택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스케키를 사달라고 조르는 동생에게 아이스케키 대신 노래를 불러주는 어머니를 보고 그간의 고민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부른 노래는 다름 아닌 나무를 묘사한 노래. “가자 가자 감나무, 방귀 뽕뽕 뽕나무, 칼에 찔려 피나무, 십리절반 오리나무….” 순간 그는 왜 시인이 산새를 오리나무에 올려놓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거리 개념이 오 리, 십 리였거든요. 님을 떠나오는 슬픈 마음을 노래한 시인만큼 산새도 멀리 오 리 밖을 내다본다는 의미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시는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 하고 처음 깨달았어요. 시는 다양한 중첩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하고 시상도 그래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죠.”
고등학교 진학 후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하지만 모든 집안일의 결정권자인 할아버지는 아들을 새장가 보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맏손녀를 졸업과 동시에 시집보내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보며 남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몸부림치던 그는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집에서 학비를 대줄 리 만무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곳이 서울대 사범대학. 당시만 해도 학비가 전액 면제인 데다 방학 때면 집에 내려갈 차비까지 지급했다. 하지만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캠퍼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휴교령이 내려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학교가 문을 닫자 그는 자취방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쓸쓸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 덕에 시인 박목월과의 인연이 맺어졌다.

“저런 숙맥이 시는 잘 쓰겠다”며 추천해준 박목월

새 시집 ‘둥근 세모꼴’ 펴낸 유안진


“대학 다니면서 가정교사를 했어요. 낮에는 시간이 많으니까 자취방에서 매일 뭔가를 썼죠. 하루는 가정교사 월급을 받고 서점에 갔는데 ‘현대문학’을 보다가 시인이 되는 방법 중에 시인에게 세 번의 추천을 받으면 된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순간 박목월 시인이 떠올랐어요. 고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박목월 선생님이 제 시를 보고 칭찬하셨던 기억이 났거든요. 그날 바로 한양대 교수실로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어요. 그리고 며칠 뒤 자취방 툇마루에서 엽서 한 장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유군, 습작노트를 가지고 한양대로 놀러 오게. 목월’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얼마나 가슴이 뛰고 흥분이 되던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죠(웃음).”
박목월 시인을 만나러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그는 ‘제발 선생님이 자리에 계시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차마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탓이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교수실 문을 두드렸고, 마침 시내에서 볼일이 있던 박목월 시인은 그를 반갑게 맞은 뒤 종로 뒷골목에 있는 설렁탕집으로 데리고 가 점심을 사줬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유안진 시인은 박목월 선생이 자신의 설렁탕에만 소금을 넣고 그에게 소금통을 밀어주지 않자 아무런 간도 안한 설렁탕을 먹어야 했다.
“나중에 박목월 선생님께서 쓴 수필을 보니까 그때의 저를 가리키며 ‘저런 숙맥이 시는 잘 쓰겠다 싶어서 시인으로 추천했다’는 말씀을 하셨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저는 선생님이 정말 저를 추천해주실지 몰랐어요. 3, 4학년 때 일 년에 서너 번 시를 들고 선생님 댁을 찾아갔는데, 하루는 저를 보고 ‘유군은 영문과도 국문과도 안 나왔는데 유군을 시인으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시를 안 쓰면 나는 뭐가 되노?’ 하면서 정색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시를 접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해 졸업을 앞두고 ‘현대문학’ 2월호에 저를 추천해주시는 글이 실렸어요. 잡지를 보고 깜짝 놀랐죠. 65년, 66년, 67년 차례로 추천을 해주셨고 저는 결국 시인이 됐어요(웃음).”
박목월 시인과의 인연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대학 졸업 후 교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어느 겨울 날, 하얀 눈을 맞으며 학교 운동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바로 박목월 선생이었다. 마침 근처에 볼일이 있었던 박목월 시인이 그를 만나러 일부러 일정을 당겨 그의 학교로 찾아온 거였다. 갑작스러운 명사의 방문에 학생과 선생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한다. 이날 박목월 선생은 그에게 시를 잘 쓰려면 전공분야인 교육심리학을 더 공부하고 유학도 가라고 조언했다.
결국 그는 교편을 잡은 지 3년 만에 학교를 떠나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아버지는 끝내 아내와 자식들을 등진 채 새 가정을 꾸렸고, 그는 실질적인 가장이 됐다. 다행히 대학원 공부와 병행해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생활비를 댈 수 있었다. 국비유학생으로 뽑혀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월급은 계속 나왔다. 그는 “유학 중 학비는 물론 생활비에 연필 사서 쓸 돈까지 다 나왔다. 그걸 절약해서 집으로 보내기도 했다”며 웃었다.
유학 중 그는 함께 간 직장 동료와 결혼을 했다. 한겨울에도 마당에 홀로 나와 가슴을 열어젖히며 화를 삭이던 어머니를 보면서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지만, 운명처럼 엮인 인연은 피해갈 수 없었다.
“남편 친구들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저희 둘을 이어줬어요. 주말에 집으로 초대해도 저와 남편만 부르고, 어디 놀러 가면 항상 저와 남편만 한 차에 타게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서서히 정이 들었고 남편 친구 대여섯 명을 하객으로 두고 약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어요. 당시 멀리 여행 갔다가 하와이에서 하룻밤 묵고 와야 했는데, 결혼식도 안 올린 상태에서 같이 잘 순 없잖아요(웃음). 그래서 여행 떠나기 전에 20달러 하는 결혼반지를 하나씩 나눠 끼고, 드레스도 남편 친구 아내가 입었던 걸 빌려 입었어요. 아무리 높은 구두를 신어도 드레스는 밟히고 저는 눈물범벅이 됐죠. 제대로 격식을 갖춰서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결혼한 것은 제 사정을 고려한 남편의 배려였다고 생각해요.”

새 시집 ‘둥근 세모꼴’ 펴낸 유안진

‘극서정시’의 진수를 보여주는 유인진 시인의 새 시집 ‘둥근 세모꼴’.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30년 넘게 어머니와 산 그는 그간 함께 생활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증이 함께 쌓였다고 고백한다. 아버지를 둘러싼 문제들에서 해방되지 못하다 보니 어머니와의 갈등도 끊이지 않은 탓이다. 유안진 시인은 “수 차례 아버지와 이혼하라고 얘기했지만 어머니는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물론이고 돌아가신 뒤에도 한동안 어머니와 관련된 시를 못 쓰겠더라”고 말했다. 그러다 이번 시집에 드디어 어머니를 그리며 쓴 시를 담았다.

늘 두 손에 나눠 쥐고 주셨지/“이건 아버지가 보낸 거, 이건 내가…”/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에서 탕자를 껴안은 아버지의 두 손이/남자 손과 여자 손인 걸 알고서야/엄마의 한 손도 늘 아버지 손이었음을/엄마이자 아버지였던 내 어머니/하느님아버지도 어머니신 줄 비로소 알았다.(‘어머니의 아버지 손’ 전문)

시는 입에서 사탕처럼 굴릴 수 있어야
어머니는 언제나 올리던 기도대로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 평온하게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늘 자식들을 위해 하시던 기도가 있어요. ‘하느님, 저에게서 아들은 다 데려가시고 남은 건 몸도 약하고 언제나 바쁜 네 딸입니다. 부디 비도 눈도 안 오고, 춥지도 덥지도 않을 때 딱 열흘만 앓다가 자듯이 주님 곁으로 데려가주십시오’ 하고요. 그런데 정말 20년 전 6월4일, 병원에 입원하신 지 열하루 만에 편안하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저도 남은 인생을 영적으로 풍요롭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에게는 두 아들과 딸이 있다. 하지만 큰아들은 몇 해 전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며느리와 손자 손녀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며 담담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오히려 강인한 모성애가 느껴졌다. 현재 작은아들은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로 재직 중이고, 서양화를 전공한 막내딸은 대학원에 다니면서 유학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과거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듯, 딸이 하루빨리 결혼하기를 바란다는 그는 “나도 결혼이 늦었다고 했는데, 딸은 나보다 더 늦었다”며 웃었다.
일흔의 나이에도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그는 20년 넘게 해온 에어로빅을 그 비결로 꼽았다. 하지만 지난달부터는 무릎이 아프기 시작해 당분간 에어로빅은 끊기로 했다. 대신 그가 다니는 방배동 성당 주차장을 돌면서 걷기를 즐긴다.
“글 쓰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참 힘들어요(웃음). 특히 저는 새벽에 일어나 잠시 묵상 겸 기도를 하고 다시 잠이 들기 때문에 이른 시간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에어로빅 다닐 때도 아침반은 안 끊었어요(웃음).”
젊어서는 서재가 따로 없어 늦은 밤 아이들 방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글을 썼다는 그는 요즘에도 주로 밤에 시를 짓는다. 수필과 시 중 어떤 것에 더욱 애착이 갈지 궁금한데, 그의 대답은 확실했다.
“신문이며 사보에 수필을 쓴 덕에 집도 사고 차도 샀으니 더는 수필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수필가협회에도 등록돼 있지 않고, 어디에서 상을 준다 해도 안 받은 때가 많은걸요. 수필은 ‘지란지교’ 한 편으로 남으면 됐어요(웃음).”
하지만 시에 대한 열정만큼은 여전하다.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시를 입에 넣고 ‘눈깔사탕’ 굴리듯이 자연스럽게 외우고 다니는 거라고 한다.
“외롭고 쓸쓸할 때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 제 시가 문득 떠오르면 좋겠어요. 시인으로 제 이름 석 자가 기억되길 바라는 게 아니라 제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바라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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