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사교육에 자연스럽게 노출돼 있다. 교육 전문가들이 아무리 자기주도학습을 외쳐도 학부모와 아이들은 여전히 사교육에 목을 맨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남의 얘기만 같은 자기주도학습을 내 아이 책상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올 초 방영돼 화제를 모은 EBS ‘사교육 제로 프로젝트, 4000시간의 실험’이다. 지금껏 학원과 과외를 당연하게 여기던 학생들이 사교육을 끊고 혼자서 공부를 시작했더니 뜻밖에도 성적이 더 향상됐다는 내용으로, 참가자는 고등학교 1학년 21명. 약간의 상위권 학생과 대다수 중하위권 학생으로 구성됐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6개월 뒤 언어·수학·영어 3개 과목에서 60%가 성적이 올랐다. 전체 평균이 두 배 이상 오른 학생, 3개 과목 석차가 1백등 이상, 최고 2백80등까지 올라간 학생도 있었다. 4명은 전교 석차가 1백등 이상 올랐다. 한마디로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얼마 전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정영미 작가(45)가 방송에서 다 보여줄 수 없었던 이야기를 엮어 책 ‘학원 끊고 성적이 올랐어요(메디치)’를 펴냈다.
실험이 시작되고 첫 일주일은 아까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도 정확한 방법론을 몰라서 교육 전문가들을 취재하며 함께 배워갔어요. 이론적으로 보면 자기주도학습은 결코 어려운 게 아니에요. 자기가 공부 계획을 세워서 실천하고 검증하고, 잘못된 것은 수정하고 또 실천하는 것. 그게 전부에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 관리예요. 계획표 자체도 치밀해야 하지만 계획표대로 얼마나 잘 쫓아가느냐가 더 중요하죠. 솔직히 처음 실험을 진행할 때는 이런 방법들이 과연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어요. 하지만 실험이 끝난 뒤 우리가 옳았다는 확실한 증거들이 나타났어요.”
자기주도학습의 뼈대는 아이 스스로 공부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혼자 공부 계획표를 짜본 적이 없는 아이들은 언제,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막막해했다. 심지어 시험을 앞두고 시험공부를 어떻게 진행할지, 단 2주일간의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 시간 구분 없이 그저 오늘은 영어와 수학, 내일은 영어와 언어 식으로 계획을 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의 교사 멘토들이 일일이 참가자들에게 공부 계획을 제대로 세우는 방법을 설명했다. 1개월 정도 지나자 아이들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계획표를 만들기 시작했고, 교사 멘토들은 아이들이 만들어 온 계획표를 보고 제대로 실행에 옮겼는지 점검을 했다.
“한 달 만에 만난 학생이 전에 비해 매우 디테일한 계획표를 갖고 있어서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아이 스스로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하고 깨달았죠. 결국 그 친구는 실험을 마쳤을 때 성적이 많이 올랐어요. 공부 계획을 제대로 세우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이라고 볼 수 있어요. 계획이 잘 짜여 있으면 실천도 빠른 법이거든요.”
공부 계획표를 짜기 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실질적 공부 시간과 패턴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자신이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하루에 외울 수 있는 영어 단어가 몇 개인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좋다. 무리하게 짠 계획은 반드시 실패하기 때문이다. 정 작가는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조금씩 성취감을 맛볼 때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부모가 정기적으로 아이 공부 스케줄 체크해야
자기주도학습을 시작한 뒤 치른 첫 시험에서 아이들의 성적이 대부분 떨어졌다. 대학 입시 관문을 향해 죽어라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한가하게 실험이나 하고 있어서 되겠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실험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이들은 천천히 조금씩 달라졌다. 실험이 중반을 넘어섰을 때는 ‘동기부여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동기부여 프로그램이란 참가자들이 구체적으로 진학 목표를 세우고, 진학 계획을 짬으로써 학습 의욕을 갖게 하는 과정이다. 실험 참가자 전원이 원하는 대학과 학과를 선정한 뒤 직접 해당 학교를 방문해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요리사가 꿈인 아이가 있었는데 대학을 방문한 뒤 목표 대학을 2년제에서 4년제로 바꾸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요리사가 되려면 공부보다 자격증만 많이 따면 된다고 생각하던 아이예요. 그런데 대학을 방문했을 때 조리학과 대학생으로부터 ‘대입에 성공하려면 자격증보다 공부가 중요하다. 또 요리를 잘 하려면 수학·과학도 잘 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충격을 받더군요. 그날부터 자신의 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걸 볼 수 있었어요.”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혼자 공부하라는 건 어쩌면 가혹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자기주도학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멘토다. 이 실험에서는 교사들이 멘토가 돼줬는데, 가장 큰 아쉬움은 개별 맞춤 프로그램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교사들은 멘토가 교과서로 사용할 만한 공부 계획서 작성 지침과 다양한 동기부여 프로그램을 제공받기 원했지만 아직까지 아이디어는 있어도 교과서로 사용할 만한 지침서는 없다. 그럼에도 멘토들은 퇴근 후 개인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스스로 공부하려는 아이들을 독려하고, 공부의 방향을 잡아줬다.
“아이들이 계획표를 내밀고 그동안 공부한 것들을 먼저 보여주니까 선생님들도 해줄 얘기가 많아졌어요. 한동안 영어만 집중한 아이한테는 ‘ 수학은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더니?’ 하고 물어보고, 그러면 아이는 ‘너무 하기 싫으니까 계획표에도 안 넣게 돼요’ 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더군요. 그런 대화를 통해 선생님은 아이의 수학 실력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되고 ‘중학교 수학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등 효율적인 방법을 가르쳐줘요. 이번 실험을 지켜보면서 멘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은 동시에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교사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할 게 아니라 체계적인 자기주도학습 시스템이 하루빨리 완성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멘토는 선생님에게만 국한된 자리가 아니다. 정 작가는 “현실에서는 교사가 헌신적으로 아이의 멘토가 돼 주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최선의 대안은 부모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실험에서도 부모의 역할이 매우 컸다. 예전에 부모들은 “학원 다녀왔니?” “공부 왜 안 하니?”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구체적인 공부 계획표를 갖게 되자 부모도 자연스럽게 얼마나 실천했는지, 오늘은 어떤 특별한 일이 생겨 실천이 어려웠는지, 어떤 시간에 공부가 잘 되지 않는지 등 아이의 생활 전반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 아이와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아이의 고민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부모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해요. 멘토의 첫 번째 역할은 아이가 얼마나 계획대로 잘 실천하는지를 체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고민 상담, 마지막 세 번째는 아이가 벽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뚫고 나갈지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려면 부모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희생도 해야 하고요. 직장에 다니는 엄마라면 이 일에 따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죠. 매일 아이 공부를 점검하는 게 힘들면 주말에 한 번이라도 해주세요. 부모가 먼저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도 따라오게 돼 있어요.”
부모와 아이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자기주도학습에 앞서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부터 해야 한다. 정 작가는 아이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거나 편지 쓰기, 여행 함께 가기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보라고 권한다. 아이에게 공부를 종용할 때도 무조건 밀어붙이기 식의 방법은 좋지 않다. 만약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2시간 제대로 집중해 공부한 뒤에는 2시간 게임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준다거나, 잠이 많은 아이에게는 충분히 자되 깨어 있을 때 집중해서 공부해보자며 절충안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 정영미 작가는 “그 대신 한 번 정한 규칙은 확실하게 지켜야 한다. 부모가 변덕을 부리면 아이는 혼란을 겪는다”고 말했다.
공부로 성취감 얻자 성적 향상
6개월간의 실험 후 참가자들은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선 공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사교육이라는 간섭자가 사라진 것에 대해 불안함을 느꼈던 아이들이 실험 종료 후에는 자신이 세운 목표를 실천하는 것에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를 없애기 위해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다니고, 컴퓨터를 방에서 치운 아이도 있었다. 이처럼 생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시간 관리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이는 성적 향상으로 이어졌는데, 모의고사 시험에서 영어와 수학을 6등급에서 1등급으로 올려놓은 학생도 있었다.
자기조절학습 수치도 달라졌다. 인지조절 부분에서 두드러진 변화를 보인 것이 학습법 활용 능력인데, 실험 전 평균 57.45%이던 수치가 69.85로 높아졌다.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을 알아보는 자기 효능감 항목도 46.7%에서 66.15로 향상됐다.
실험을 마친 뒤 참가자의 30%가 다시 사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학원에 끌려가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공부 시간을 갖기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쪼개고 있다. 성적이 하락한 학생과 부모들도 실험에 참가한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6개월이란 시간 내에 이뤄내지 못했을 뿐, 자기주도학습에 도전하고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익힌 것에 대한 만족감이 컸기 때문이다. 정 작가는 “아이들에 따라 개인차는 분명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4000시간의 실험을 통해 자기주도학습 추종자가 된 정영미 작가는 아무리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아 고민이라면 과감하게 사교육을 끊고 아이 혼자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고 강조한다. 그 역시 12년 동안 사교육에 의존해 왔지만 대입에서 ‘대역전’을 이뤄내지 못한 아들을 둔 학부모로, 자기주도학습에 대한 미련이 누구보다 크다. 다행히 그는 아이가 대학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기주도학습에서 배운 바를 적절히 사용했고, 간판이 아닌 적성에 맞는 과를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결국 아이는 멋진 사회인이 되기 위해 어떤 스펙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며 열심히 캠퍼스를 누비고 있다고 한다. 대입뿐 아니라 평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기주도적 생활태도. 이번 방학부터 도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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