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완전 건장한 남편은 저 때문에 동반여행을 떠납니다. 평생을 진실했고, 준수했고 성실했던 최고의 남편.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요.”
예순 넘은 나이에 머리에 알록달록 블리치를 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던 최윤희씨(63).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그가 어깨를 한번 툭 치며 “그까짓 일 갖고 뭘 그래. 힘내!”라고 말해주면 다시 일어설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그의 삶 자체가 긍정을 넘어 ‘울트라 초긍정’이었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 되던 해 결혼한 그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파산하면서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는 훗날 ‘신동아’ 기고에서 당시 가족 동반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동반자살을 하려고) 밖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렀는데, 아이들 눈에 엄마는 보이지도 않았다. ‘엄마, 빨리 말해. 빨리 말해! 지금 밖에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 재밌어 죽겠는데!’ 재밌어 죽겠다는 아이들을 차마 죽일 수는 없었다”고.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광고회사 카피라이터에 응시, 1천대 1이 넘는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이후 재치 있고 시원한 말솜씨로 인기 강사가 된 그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냥 전업주부로 살았을 것”이라면서 “사업 실패로 힘들었지만 사회생활을 하게 해준 남편이 지금은 너무 감사해서 매일매일 표창장을 준다”고 말했다.
얼마 전부터 잘 걷지 못해, 그래도 깔깔 웃으며 농담
예쁘지 않은 외모 때문에 스스로를 “엉겅퀴, 씀바귀, 고들빼기 삼종 혼합인간”이라고 부르면서도 “못생긴 거, 가난한 거, 무식한 건 죄가 아니다. 죄는 딱 한 가지다. 열심히 안 사는 거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 죽을 각오로 살면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그를 사람들은 ‘행복전도사’, ‘행복디자이너’라고 불렀다.
그랬기에 지난 10월7일 전해진 최씨 부부의 자살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모텔 주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따르면 그는 침대에 바른 자세로 누워 있었으며 남편은 욕실 수건걸이에 앉은 채로 목을 맸다고 한다. 남편이 그의 자살을 돕고 나서 뒤따른 것이다. 또박또박 정성 들여 쓴 ‘떠나는 글’이라는 유서도 남겼다. 죽기 바로 직전 쓴 것으로 보이는 유서에는 그간의 고통스러웠던 투병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2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에서 경계경보가 울렸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많이 지쳤다. 그래도 희망을 붙잡으려 노력했지만 추석 전주 폐에 물이 찼다는 선고를 받았고, 응급실에 실려 갔다. 심장에도 이상이 생겼다. 혼자 떠나려고 해남 땅끝마을까지 가서 수면제를 먹었는데 남편이 119 신고, 추적해서 찾아왔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 없다. 남편은 그런 나를 혼자 보낼 수는 없고… 그래서 동반 떠남을 하게 됐다.”
그의 정확한 병명은 전신성 홍반성 루프스와 합병증인 세균성 폐렴. 루프스는 면역계가 자기자신을 공격해 피부, 관절, 장기를 파괴하는 난치성 질환이다. 그가 자살을 결심할 즈음에는 병이 상당히 진척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년 지기인 조영남조차도 그런 사정을 몰랐을 정도로 최씨는 투병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 잘 걷지를 못했어요. 류머티스 관절염이라고 하더라고. 모두 나이 들면 조금씩 고장 나니까 그런 건 줄 알았지, 그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어요.”
그가 최씨를 마지막으로 본 건 추석 직전이었다고 한다. 조영남은 몇몇 지인들과 ‘청담중학교’라는 모임을 만들어 일주일에 서너 번씩 만나 밥 먹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수다도 떠는데 최씨도 그 멤버였다. 얼마 전부터 모임에 뜸하던 최씨가 추석 직전 모처럼 동석했는데 예전과는 달리 초췌해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나,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항상 모양을 내고 단정하게 모임에 나왔는데, 그날은 수척해 보이는 데다가, 블리치도 안 했더라고. 속으로 이젠 그런 거 안 하고 살기로 했나 보다, 생각했지. 워낙 자기 얘기를 안 하는 사람이라 왜 안 했느냐고 물어보지 않았어요.”
언제나 “당신이 옳다”고 말해주던 든든한 친구
그 후로 한 차례 전화 통화를 더 했다. 지난 9월22일 추석 특집으로 편성된 ‘조영남과 친구들’이라는 쇼에 최씨를 게스트로 초청하고 싶어, 그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전화 통화를 하는데 낄낄 웃으며 폐에 물이 찼다고 하더라고. 장난치는 조로 이야기해서 나도 심각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 그것도 내가 게스트로 나와달라고 부탁하니까 미안하다며 어쩔 수 없이 사정 이야기를 한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절대 아프다는 말을 안 했을 거야.”
조영남이 기억하는 최윤희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내성적이며 남에게 피해 끼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완벽주의자였다. 그가 최씨를 처음 만난 건 20년 전 최씨가 조영남을 인터뷰하러 오면서부터다. 최씨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겸 작가로 일할 때였다.
“인터뷰 후에도 다른 지인들과 어울려 여러 번 만났는데 그때도 듣기만 해서 원래 조용한 사람인가보다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어느 날, 지방 공연 갔다가 호텔방에서 TV를 틀었더니 행복전도사라며 방송에 나와서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렇게 재치 있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왜 그동안 조용히 듣고만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이야기 나누는 데 방해될까봐’ 그랬대. 그만큼 천성이 고운 사람이에요.”
사람이 20년 동안 알고 지내면 자연스럽게 사는 이야기도 털어놓고, 남편이나 자식 자랑도 하고 흉도 보기 마련인데 최윤희씨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을 함께할 정도로 부부 간의 정이 두터웠던 것도, 장성한 아들 딸 남매가 있었다는 것도 모두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알았다고 한다.
“뉴스를 보고도 믿기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받지 않더라고. 우리 멤버 중 한 명이 일산경찰서로 전화를 걸어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결국 유족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랬겠나, 남들한테는 웃으며 살라더니 어떻게 그렇게 갈 수 있나, 배신감을 느낀다, 의견이 분분한데 나는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아픈 것도 고통스러웠겠지만 투병이 길어지면 어쩔 수 없이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게 될 텐데 그게 싫었을 거야. 자기 죽은 다음에 사람들 오고 가게 하는 게 미안하다고 빈소도 못 차리게 한 걸 보면 짐작이 되지. 각자 삶의 방식이 다른 만큼 그 친구의 죽음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단,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조영남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최씨는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겐 빛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 그런 면에서 자신은 그에게 빚이 있다고 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손가락질할 때도 최윤희씨만은 ‘항상 당신이 하는 일이 옳다’며 응원해줬어요. 콘서트 할 때면 지겨울 법도 한데 매번 일찍 와서 자리를 지켜주고. 부모·자식, 부부도 힘들면 싫어지는데 그 친구는 언제나 무조건 한결같이 나를 지지해줬지. 방송국 가면 모든 사람들이 그 친구를 칭찬하고 그에게 격려받았다고 해요. 그 친구가 곁에 있어서 행복했는데 졸지에 백만 대군을 잃은 것 같아. 나는 죽으면 유산의 4분의 1을 마지막 여자 친구에게 주겠다고 했는데, 당신은 마지막 길을 함께 가줄 남편을 뒀으니 당신이 나보다 한 수 위야!”
이웃 주민이 본 최윤희씨 부부 “겸손하고 금슬 좋은 환상의 커플…”
고 최윤희씨 부부가 살던 아파트. 지금은 비어 있다.
최윤희씨의 자살 직전 마지막 행보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건강이 악화된 최근 1~2년 동안 방송과 강연 활동을 줄이고 외부와의 접촉을 최대한 피한 채 집 에서 칩거하다시피 지냈기 때문이다. 최씨 부부가 살던 경기도 일산 한 아파트 단지를 찾아가 봤다. 집은 비어 있었으며 장례를 마친 후 최씨의 아들이 동네주민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러 다녀갔다고 한다.
꽤 큰 단지였지만 이곳에서도 최씨 부부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세탁소도, 슈퍼마켓 주인도 그를 못 본 지 1년 가까이 됐다고 한다. 최씨 부부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는 한 이웃 주민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반상회에도 나오고 주민들과 꽤 잘 어울렸는데 방송 활동 등으로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왕래가 드물어졌다”고 말했다. 그가 최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추석 전후. 아침마다 집 앞에서 정발산으로 운동을 다녀오는 최씨와 마주치곤 했는데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엔 예전보다 많이 수척해져 있었고, 말을 건넸는데도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었던 탓에 듣지 못했는지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최씨 부부를 성실하고 금슬이 좋은 사람들로 기억했다. 최씨의 남편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비교적 건강해서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아침마다 아내를 위해 장을 봐다가 밥상을 차려주는 자상한 남편이었다고.
“남편분도 이웃과 별로 교류가 없었고, 절대 자신이 ‘누구 남편’이라는 걸 내세우지 않는 조용한 분이셨어요. 남편이 밖에서 일을 하고 아내가 집에서 살림하는 일반적인 가정과 반대로 그분들은 아내가 바깥일을 하고 남편이 집안일을 했지만 그런 걸로 한 번도 티격태격하거나, 집안이 삐그덕거리는 걸 본 적이 없어요. 환상의 호흡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죠. 빈소도 장례식도 없이 훌쩍 떠나신 게 서운하기도 하지만 마지막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으셨던 그분들 마음도 십분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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