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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속 그녀

최원석 전 회장 첫 부인 배우 김혜정 41년 만의 인터뷰

“바깥세상 이야기에 눈과 귀 다 막고 살아온 지난날, 반듯하게 자라준 아이들 고마울 뿐”

글 김명희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2010. 07. 16

‘한국의 소피아 로렌’이라 불리며 60년대를 주름잡았던 배우 김혜정씨는 70년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과 결혼 후 홀연히 은퇴했다. 5년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후 최 전 회장은 가수 배인순씨에 이어 아나운서 장은영씨와 재혼,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41년 만의 외출, 구구절절한 사연도 상처도 많았지만 그에게는 원망도 미움도 없었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고독과 은둔 속에 살아온 이 여배우가 처음으로 털어놓는 진솔한 내면 고백.

최원석 전 회장 첫 부인 배우 김혜정 41년 만의 인터뷰

지난 6월 중순 ‘꿈’상영회에서 만난 김혜정씨. ‘한국의 소피아 로렌’이라 불리던 예전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배우 김혜정(69). 나이 든 이들에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조 섹시스타로, 젊은이들에겐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67)의 첫 아내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1958년 영화 ‘봄은 다시 오려나’로 데뷔해 69년 ‘지옥에서 온 신사’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후 전설로 남은 그의 근황을 여러 차례 수소문했으나 동료 배우들조차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했다. 자녀들과 외국에서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런 김혜정씨가 41년 만에 처음 공식 나들이를 했다. 지난 6월12일 서울 상암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고 신상옥 감독의 영화 ‘꿈’ 상영회에 모습을 드러낸 것. 이 작품은 신상옥 감독이 55년 최은희씨 주연으로 제작했으며 67년 김혜정씨를 주연으로 다시 한 번 리메이크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변했음에도 김씨의 큰 키와 또렷한 이목구비에는 영화 스틸 사진으로 남아 있던 전성기 때 모습이 엿보였다. 그는 영화 상영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니 신 감독이 그립고, 촬영하다 고생한 일도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했다. 상대 배우이던 신영균씨는 “김혜정씨는 당시 최고 인기 배우였다. 그녀와 함께 영화를 찍는다고 했을 때 다른 남자배우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행사를 마치고 극장 로비로 나오자 올드 팬들이 그에게 반갑게 알은체했다. 팬들에게 둘러싸인 그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이런 관심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외국에 갔다고 소문을 내고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도 따돌렸다. 이제는 다 잊힌 사람인데 인터뷰는 해서 뭐 하나”라며 사양했다. 여러 차례 설득 끝에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그의 집은 정갈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도우미가 와서 청소를 해준다고는 하지만 먼지 한 점 없는 대리석 바닥, 집안 곳곳에 놓인 가족사진과 화분에서 안주인의 살림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그의 이름이 다시 회자된 건 지난 5월 최 전 회장이 장은영 전 아나운서와 이혼하면서다. 최 전 회장의 결혼 이력이 들춰지며 첫 아내이던 그의 이름이 거론된 것. 김씨와 최 전 회장은 69년 결혼, 1남(40)1녀(35)를 두었으나 5년 뒤 이혼했다. 김씨와 최 전 회장은 ‘연예인-재벌 커플 1호’로 기억된다. 하지만 결혼도, 이혼 배경도 베일에 싸여 있다. 김씨는 “너무 오래전 얘기라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에게 실례가 될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혼생활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연예인-재벌 커플 1호, 결혼생활 외적 문제로 이혼

최원석 전 회장 첫 부인 배우 김혜정 41년 만의 인터뷰


몇 년 동안은 행복했다. 남편이 가져다주는 월급으로 알뜰하게 살림하며 아이 낳아 키우는 게 재미있었다. 신혼 때부터 가계부 쓰는 게 습관이 돼 지금도 십 원 단위까지 꼼꼼하게 가계부를 쓴다. 하지만 말 못할 사정으로 떼밀리다시피 이혼했다고 한다.
이혼 후에는 동료 배우들과의 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오직 아이들 키우는 데 전념하며 살았다. 미용실·목욕탕도 늘 다니던 곳만 다녔다. 최 전 회장과 관련된 소문에도 눈과 귀를 다 막았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아 백화점이란 곳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연예계에 다시 돌아갈 엄두도,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지금 여배우들은 결혼해서 아이 낳고도 계속 활동하지만 당시는 결혼하면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은퇴하는 분위기였어요. 사실 연기에 대단한 열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학교 다닐 때 주변 사람들이 인물이 좋다고, 영화배우 해보라고 해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이만홍 감독의 ‘봄은 다시 오려나’로 데뷔, 첫 작품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좋은 줄 모르겠더라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하도 쳐다봐서 부끄럽기만 하고. 그렇게 수줍음 많이 타는 성격인데 연기는 어떻게 했는지 몰라. 그래도 영화는 대사를 안 해도 되니 나았지. 그때는 후시 녹음이라 내가 연기를 하면 성우가 대사를 입혔거든. 드라마에도 출연할뻔 했는데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데다가 대사 처리가 영 어색해 불발됐지요(웃음).”



최원석 전 회장 첫 부인 배우 김혜정 41년 만의 인터뷰


당시에는 이혼도, 싱글맘도 흔치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고된 삶이었지만 당시엔 어린 두 아이 건사하느라 그런 생각 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고 한다.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엄하게 키웠어요. 잘못하면 회초리도 들고, 문 밖에서 벌을 세우기도 하고…. 그러다 아이가 잠들면 상처에 약을 발라주면서 ‘내 분을 못 이겨서 아이에게 너무 심하게 한 건 아닌가’라는 자책감에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그래도 어릴 적 일이라 아이들이 기억 못할 줄 알았는데 언젠가 딸이 사위와 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어릴 때 엄마가 문 밖으로 내쫓았는데 무서워서 혼났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들은 그렇게 기억력이 좋다니까(웃음).”
다행히 아이들은 반듯하게 잘 자라주었다. 아들은 현재 건설 관련 자재를 납품하는 회사를 운영중이고 딸은 가정을 꾸려 두 아이 엄마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들은 맛있는 식당을 발견하면 ‘엄마도 맛을 보셔야 한다’며 그의 손을 잡고 꼭 한 번 다시 들른다.

아이들 아빠 건강하고 행복하길 빌어
한창 나이에 혼자 된 그에게 재혼을 권하는 이들도 있었다. 프러포즈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때는 전혀 그런 생각을 안 했는데, 요즘 와선 후회도 되네요(웃음). 재혼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과 만나 교류하면 세상 물정도 알고 사는 게 좀 더 재미있었을 텐데….”
최 전 회장에 대해서는 미움도 원망도 없이 마음을 비웠다고 한다. 딸의 결혼식에 최 전 회장과 장은영씨가 혼주로 나섰을 때도 “나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많이 타니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대신 자신의 손님을 따로 초대해 간소하게 피로연을 열었다. 최 전 회장과는 예전에는 가끔 연락하며 지냈지만 최근에는 전화 통화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와 아이들은 왕래가 있을 법한데 최근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뜸해졌다고 한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도리는 다 하라고 항상 강조합니다. 저도 그분이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라고요. 아버지가 불행하면 아이들도 마음이 아플 테니까.”
몇 년 전부터는 신앙을 갖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있다. 새벽기도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즐겨 보던 드라마도 안 보고 기독교 방송을 챙겨보며 매 시간 기도한다고 했다. 그렇게 딱딱 시간 맞춰 익숙한 일을 계속하는 게 마음 편하다고.
“예전에 시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몇 번 교회에 따라 나갔는데 그때는 믿음이 없어 뺀질뺀질했죠(웃음). 그러다 3년 전 어떤 일을 계기로 믿음을 갖게 됐어요. 아이들과 아이들 아빠를 위해 기도하면 내 마음도 편하고 행복해지더라고. 살아보니 남녀 사이에 영원한 사랑은 없어요. 부모 자식 간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영원하지요.”
그가 가장 따르는 선배 최은희씨가 아니었더라면 지금껏 그래왔던 대로 대중의 눈을 피해 조용히 살았을 것이다. 은퇴 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배우 그레타 가르보처럼. 하지만 몇 년 전 가까운 동네로 이사 온 최씨가 그를 자꾸 세상 밖으로 이끌었다.
“은희 언니가 ‘혜정아 그렇게 살지 말고 밖에도 좀 나오고 사람들도 좀 만나라’고 해서 얼마 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배우들 모임에 나가고 있어요. 오랜만에 선후배들 만나니까 반갑더라고요. 그 외에도 은희 언니가 자꾸 이런저런 자리에 함께 가자고 권하는데 언니는 영화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니까 할 일도 많고 모임에도 자주 나가야겠지만, 나는 그런 게 아니니까 며칠 생각해 보고 꼭 나가야겠다 싶은 곳에만 가곤 하죠.”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몇 시간의 짧은 만남임에도 그는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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