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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참회의 메시지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 진솔한 내면 고백

글 오진영 사진 지호영 기자

입력 2010.05.18 13:48:00

이어령 교수가 인생 황혼기에 신앙을 갖게 됐다. 3년 전 기독교 신자로 세례를 받아 큰 화제가 됐던 그가 낮은 어조로 인간의 한계 앞에 겸허해질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을 들려줬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 진솔한 내면 고백


지난 2007년 전 문화부 장관인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76)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됐다는 소식은 기독교계를 넘어서는 큰 화제였다. 문학 평론가이며 교수로, 언론인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문화 행정가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지성인이던 그가 고희를 넘어 종교에 귀의했다는 것은 흔한 말로 ‘쇼킹’한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이 무엇이 그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신앙을 갖게 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달변가이면서 화려한 수사의 글쓰기를 해왔던 그동안의 모습과 달리 그는 신앙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교회 강연 등 제한적인 자리에서 이어령 교수가 한 간증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는 입소문만 전해질 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세례를 받은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신앙인이 되기까지 겪었던 가슴속 슬픔과 외로움, 나약함과 무기력함을 털어놓은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발표했다.
서울 태평로에 위치한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난 이교수는 “종교를 갖게 된 것은 개인적인 일이라 책으로 내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토씨 하나까지 철저하게 저자 교정을 보는 편인데 이번에는 마지못해 내놓는 책이라 내버려뒀더니 오식이 많이 나왔고 부득이 책 나온 지 얼마 안 돼 개정판을 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안 내겠다고 몸부림을 치다 나온 책이라 오식도 있고 부분적으로 조금 틀린 것도 있지만 여기 담은 이야기는 나의 내면을 그대로 털어놓은 거짓 없는 기록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괴로움과 슬픔에 종교가 큰 위안이 된다는데 그 종교가 대체 뭐기에 그러는가, 라며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딸에게 닥친 암과 실명 위기, 손자의 ADHD 증후군…잇단 시련
이어령 교수는 세례를 받기 전,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딸 이민아씨(50)에게 닥친 암과 실명 위기, 외손자의 질병 등을 곁에서 지켜보는 아픔을 겪었다. 이민아씨는 대학 때 전과목 A학점을 받으며 3년 만에 영문학과 불문학 복수전공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 간 수재였다. 미국에서 영문학 석사를 마친 후 전공을 법학으로 바꿔 변호사 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유명 로펌에 스카우트돼 변호사 일을 하다 검사가 됐던 영민하고 자랑스러운 딸, 남들이 보기에도 탄탄대로를 걸었던 딸이다.
그랬던 딸이 언제부턴가 국제전화로 통화를 할 때마다 교회와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아버지냐. 땅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도 있다”며 핀잔을 주려다가 참기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똑똑하던 아이가 어쩌다 광신적인 아줌마와 다름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너무 싫었지만 딸이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암과 싸우면서 신앙을 통해 많은 힘을 얻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언짢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딸 민아씨는 92년에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치료를 받았지만 96년과 99년 재발해 항암치료와 검사를 반복하며 살다가 2002년에야 완치 판정을 받았다. 민아씨의 네 자녀 중 둘째 아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할 정도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증상이 심해 더욱 고통스럽던 시간이었다. 연이어 딸에게 닥치는 시련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그는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깊이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딸이 암에 걸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을 때, ADHD로 손자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매일 밤 울며 지낼 때, 지상의 아버지가 주지 못한 그 이상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내 딸을 구해주신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라는 생각이 들어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 진솔한 내면 고백


이민아씨에게 일어난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6년 갑작스러운 실명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아들을 보낼 학교를 찾을 수 없어 하와이로 이주한 직후였다. 망막이 분리돼 곧 실명하게 될 것이라는 딸의 전화를 받고 아내와 함께 급히 달려간 하와이에서 그는 난생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딸이 가자는 대로 따라 나선 작고 초라한 교회, 하와이 원주민들의 소박한 교회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는 기적을 당신의 딸 민아에게서 거두어가지 마십사고 기도했습니다. ‘제게 글을 쓰는 것과 말하는 천한 능력이 있으니 민아가 앞을 보게 해주신다면 그 능력을 당신께서 이루고자 하는 일에 쓰실 수 있도록 바치겠다’고 믿지도 않는 낯선 하나님에게 약속을 하고 만 겁니다.”
그 후 딸은 치료를 받기 위해 귀국했다. 그런데 한국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천만다행으로 눈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망막분리라는 건 말하자면 영상이 맺히는 스크린이 찢어져 나갔다는 건데 그게 다시 멀쩡해졌다는 겁니다. 하와이 병원에서 오진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딸아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지요.”
딸의 눈이 빛을 잃지 않는다는 소식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이고 넘치는 감격이었지만 그 와중에 그의 가슴 한구석이 켕겼다. 이제는 꼼짝없이 하느님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할 판이었다.
“하나님이 정말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낫게 해주셨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쨌든 내 입 밖에 내놓은 약속인데 어떡합니까. 어린아이와 한 약속도 지켜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한 약속을 말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것을 해주면 저것을 해드리겠소, 라는 식의 오만한 약속이었지만 그래도 약속이었으니까요.”
영성의 세계로 향하는 문, 그 앞에서 서성거린 지는 오래되었지만 문지방을 넘기는 무척 어려웠는데 결단의 시간이 왔다. 긴 망설임과 주저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고 이듬해 7월 그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손자 죽음 통해 영성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돼
그는 ‘딸의 눈을 낫게 한 기적을 보고 이어령이 기독교 믿게 됐다’는 식으로 이야기되는 것이 많이 못마땅한 듯했다. 딸에게 일어난 일은 그가 신앙을 갖게 되고 영성을 의지하기까지 한 발씩 걸어온 고독하고 외로운 여정의 일부였을 뿐인데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지 말아달라고 했다. 특히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 중 하나가 내 식구와 내 민족의 편협한 울타리를 넘는 이웃 사랑인데 ‘내 딸 낫게 해줘서 믿는다’는 말은 너무 잘못된 오해라고 강조했다.
“내 자식의 병을 고쳐주면 믿고 안 고쳐주면 안 믿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망막이 고쳐졌다고 언젠간 안 죽나요? 눈이 나았다고 해도, 암이 없어졌다 해도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예수의 부활뿐이고 하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 외에 기적은 없습니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 진솔한 내면 고백


딸을 오랫동안 근심하게 했던 외손자의 ADHD 증상이 많이 호전돼 마침내 학교를 졸업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치유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던 아이 엄마의 강한 신앙이 가져온 결과”라고 말했다.
“에디슨도 아인슈타인도 ADHD라서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했다고 합니다. ADHD 아이들 중에 나이가 들면서 낫는 경우가 많고 남들과 다른 특별한 기질을 장점으로 잘 살리기도 합니다. 우리 딸은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 격리시키거나 포기하지 않고 긴 세월 기도하면서 기다렸어요. 하나님이 아이를 사랑하고 감싸주실 거라는 제 엄마의 믿음이 아이를 낫게 한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아이를 고쳐주는 그런 기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교수가 세례를 받은 지 겨우 3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의 큰 외손자가 25세의 꽃 같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한동안 기도를 드릴 수도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민아씨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큰 외손자는 버클리대학을 졸업하고 법대를 가려고 준비 중이던 눈부신 젊음의 한가운데서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실려가 19일 만에 숨을 거뒀다.
“어려서부터 내가 키우다시피 한 손자였어요. 제 어미가 학위다, 변호사 시험이다, 힘들 때마다 마치 소포처럼 우리 집에 보내오곤 했지요. 어미 없이 내 집에서 살 때, 아침에 출근하러 나서면 ‘할아버지 가지 말라’고 넥타이를 잡고 안 놔주는데 천하장사도 그 손을 놓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먼 LA와 서울을 오가며 자란 게 딱해 유난히 눈에 많이 밟혔던 손자인데 그렇게 잃어버리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시험인가, 이제 나이 많고 허약해 시험을 이길 힘도 없는데 어쩌라는 것인지 몰랐다. 더 이상 하느님을 찾지 않고 슬픔 속에 나날을 보내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 손자를 잃은 할아버지가 나 혼자뿐이겠는가, 부조리하게 까닭 없이 죽어가는 아들 딸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인간사의 삶과 죽음을 모두 하나님과 연관시켜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감사하고 기뻐한다는 성경 말씀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어요. 논리를 따질 수 없고 죄 없이 시련을 당했을지라도 믿는 것이 신앙이고 종교입니다.”
손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 펼쳐놓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처럼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사람이,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사람 누군가가, “이 아무개도 그랬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다는군. 그게 대체 뭐기에 그런겨?”라는 마음을 먹고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 또한 이웃 사랑이 될 것 같아서 꺼내놓는다고 했다.
“어차피 인생은 슬프고 고달픈 겁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의 슬픔은 믿지 않는 슬픔과 많이 다릅니다.”
이어령 교수는 신앙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 자신의 개인사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오늘날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종교 회귀 현상의 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지성과 과학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산업화 시대의 신화가 무너진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거쳐 지금 이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영성으로 극복하려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아바타’를 보면 최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끝없는 풍요를 누리고자 하는 사회가 부딪친 한계를 보여주고, 자연과 교감하고 조상과 소통하는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나비족에게서 그 대안을 찾습니
다. 영성을 찾아가는 것을 이 아무개 개인만의 변화로서가 아니라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사회를 거쳐 바이오 생명 자본주의 시대로 이어지는 큰 조류 안에서 읽어준다면 더 큰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내 식구와 민족 초월한 이웃 사랑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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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는 5월 초 결혼하는 장동건과 고소영의 주례를 맡게 된 것에 대해서도 종교인의 이웃 사랑 실천이라고 언급했다. 이 교수는 아들 이승무 감독(48)이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은 할리우드 영화 ‘용사의 길’에 장동건이 출연한 인연으로 주례를 맡게 됐다. 이승무 감독이 영화 ‘반지의 제왕’ 제작자와 손잡고 만드는 이 영화는 2차 작업 직전, 미국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세계 경제위기 때문에 완성이 늦어져 올해 여름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 두 사람은 사생활 없이 대중에 노출된 삶을 살던 스타들인데 이번에 자신들만의 성을 짓는다기에 그 성 만드는 돌 하나 놓아주는 것도 이웃 사랑이라는 생각으로 응낙했습니다. 두 별이 합쳐져 더 크고 아름다운 빛으로 세상을 환하게 만들 거라는 축복을 해주고 싶어요.”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은 신앙을 받아들이고 난 후 그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그가 기독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화다.
“혈통과 신분에 관계없이 생명을 존중하는 이웃이 되는 삶, 신앙이 가져다준 변화입니다.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지 못한다면 종교를 받아들인 의미가 없어요. 지금까지 내 아내와 내 자식들만이 소중하고 내 민족만 특별했는데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걸 기독교가 내게 가르쳐줬어요. 물론 사랑의 실천이 잘 안되고 늘 어렵습니다. 다만 그 길로 가는 중입니다.”
아직 영성에 이른 게 아니기에 책 제목도 ‘지성에서 영성으로’ 라고 붙였다. 농업시대의 끝자락에 태어나 산업화와 정보사회를 살아오는 동안 늘 지적인 갈증과 배고픔을 풀고자 골몰하는 지성인이던 그는 지금 이렇게 “마지막 단계인 영적인 갈증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중”이라고 고백했다.

여성동아 2010년 5월 5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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