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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애리 궁금한 무대 밖 인생

글 오진영 사진 지호영 기자

입력 2010.05.18 13:06:00

정애리가 엄마를 소재로 한 연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로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그 역시 한 엄마의 딸이자 딸의 엄마다. 연극은 그가 자신의 엄마에게 바치는 절절한 사모곡이자 10대 딸에게 내보이는 일기 같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멈출 수 없어’에서 갖은 방법으로 며느리를 궁지에 몰아넣는 악독한 시어머니와 ‘너는 내 운명’에서 딸을 잃고 애절한 눈물을 흘리는 엄마 역의 정애리(50)는 한 사람이면서도 전혀 다른 배우 같았다. 폭넓은 연기력으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출연하는 드라마마다 높은 시청률을 이끌어내는 그가 오랜만에 대학로에서 관객들과 눈길을 맞추고 있다. 연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송옥숙과 더블 캐스팅으로 주인공 엄마 역을 맡은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말기암을 선고받은 중년 여성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95년 드라마로 방영된 뒤 소설, 대본집으로도 발간돼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 연극은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를 만든 이재규 PD가 연출을 맡아 기대감이 크다.

땀보다 눈물 더 많이 흐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연습 현장

정애리 궁금한 무대 밖 인생


감초 연기자 박철민은 손대는 사업마다 번번이 실패하고 누나 속을 썩이는 망나니 동생 근덕 역을 맡았다. 지난해 한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애리가 자신의 로망이라고 밝혔던 박철민은 “선망해온 선배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고 밥 먹고 양치질 할 수 있어 긴장되고 설렌다”고 말했다.
정애리는 안톤 체홉의 고전 ‘갈매기’의 니나를 10년의 간격을 두고 두 번 연기한 바 있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마차’에서 1인 다역을 맡아 97년 서울연극제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다. 하지만 생방송이나 다름없는 연극무대가 주는 긴장감은 베테랑 배우도 피해갈 수 없다. 정애리 역시 출연을 결심하고도 여러 번 “과연 잘한 선택인가” 스스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오랜만에 연극에 출연하는 소감이 어떤가요.
“연극이 체력소모가 심하긴 하지만 워낙 슬픈 이야기라 우느라 더 힘들었어요. 처음 대본 받아 읽어보던 날부터 시작해서 연습시간마다 배우, 스태프 할 것 없이 다들 하도 울어서 ‘공연장에서 관객들한테 티슈 나눠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할 정도였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너무 힘들어서 누가 몸을 방망이로 두들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체력 소모가 많은 작업이었지요.”
▼ 그렇게 힘들어도 빠져드는 걸 보면 연극은 배우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나봐요.
“드라마는 짧은 시간에 집중해야 하지만 일단 녹화가 끝나면 지나가버리는데 연극은 만들어가는 시간이 길어서 좋기도 하고 힘들기도 해요. 그래도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관객들의 호흡에서 큰 힘을 얻죠. 어떻게 보면 드라마는 소모적인 경향이 있는데 연극은 힘들게 준비하고 함께 작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긴 만큼 배우에게 남는 게 많아요.”
▼ 연극은 원작 드라마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사실 저는 이 작품을 드라마로 보지는 않았어요. 사람들을 많이 울린 드라마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어요. 당시 엄마 역을 맡은 나문희 선배 연기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되기에 이번 연극을 준비하면서도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고요. 드라마가 방영된 지 15년이나 흘렀기 때문에 아무래도 호흡이 빨라지고 시대도 많이 달라졌지요. 그래도 가족과 사랑이라는 기본적인 바탕이 주는 무게와 감동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애리 궁금한 무대 밖 인생


▼ 극중 특히 마음에 와 닿는 대사가 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말이 생각나네요. “여보 나 예쁘면 뽀뽀나 해주라” 라는 대사예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라는 대사도 있어요. 누구나 갖고 있는 아픔을 서로 나누어 가질 때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연극의 제목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 아닐까 생각해요. 언젠가 떠나야 하는 날, 이별해야 하는 날이 아름다우려면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답게 살아야겠죠.”
▼ 극중 엄마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데 정애리씨는 실제 어떤 엄마인가요.
“아주 헌신적인 엄마예요(웃음). 물론 전업주부인 엄마들만큼 아이에게 시간을 많이 내주지 못했겠지만 한 번도 가족을 일보다 뒤에 놓아둔 적이 없어요. 밤새워 촬영하고 새벽에 들어오더라도 딸아이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는 준비 같이 봐주고 문 앞에서 안아주면서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꼭 해줘요. 딸이 저를 걱정해서 ‘엄마 얼른 들어가서 자라’고 말하며 나갈지언정 그렇게 해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때면 딸과 함께 그날 있었던 일을 같이 이야기하고요. 같이 있는 시간이 길고 짧은 게 문제가 아니라 행복한 순간을 같이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봉사 다니면서, 나눔의 시간을 가지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저보다 어른스러운 딸에게서 나눔의 정신 배우는 중입니다”
정애리의 선행과 기부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고 다른 배우에게도 모범이 되고 있다. 지난 89년부터 아동시설인 ‘성로원’을 매주 방문하며 지원해왔고, 2004년부터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국제 구호단체 월드비전을 통해 2백 명 넘는 아이를 후원하고 있다. 또한 매년 가나·모잠비크·우간다·콩고·에티오피아·르완다·인도 등으로 해외 구호활동을 다녀온다. 2005년 자신의 나눔 활동을 에세이 형식으로 펴낸 책 ‘사랑은 버리는 게 아니잖아요’의 인세 1억원도 ‘정읍 사랑의 도시락 나눔의 집’에 내놓았다. 서울 흑석동에 ‘하래의 집’이라는 2층짜리 쉼터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케냐에 학교를 짓기 위해 토지를 구입하는 등 구호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정씨가 매년 기부하는 금액은 1억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 딸 지현씨도 엄마를 닮아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라고 들었어요.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인데 나중에 국제 비정부기구(NGO)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요. 언제부턴가 같이 봉사 다닐 때 딸에게서 배우는 것도 있고 딸 덕분에 저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기도 해요. 제 자랑 같습니다만, 딸은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 엄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해요(웃음). 저는 “너는 엄마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해줘요. 실제로 보면 그 나이에 저는 하지도 못했던 어른스러운 생각을 하고, 아직 어린데도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답니다. 지난해 딸과 함께 인도네시아 지진 현장에 다녀왔는데 ‘내가 이 아이만큼 정말 사람들을 많이 걱정하고 사랑하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어요.”

정애리 궁금한 무대 밖 인생


▼ 한창 꿈이 많을 나이인데, 딸이 어떤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나요.
“한동안 딸아이가 뮤지컬 배우를 할까 NGO 일을 할까, 흔들리고 있기에 아이에게 진지하고 단호하게 얘기해줬어요. 뮤지컬 배우로 성공하려면 그 일을 엄청나게 좋아하거나 아주 뛰어난 가창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우니 잘 생각하라고요. 고민하던 딸이 석 장의 편지를 적어 보냈는데 엄마 말이 맞고 자기에게 배우 소질은 없는 것 같다고 썼더라고요. 지난 겨울 케냐 어린이들로 구성된 지라니합창단과 만나서 친해지고 지금까지 연락을 하게 되면서 이제 NGO 쪽으로 마음을 정한 것 같아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타고난 딸아이가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 딸과 대화도 많이 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좋은 엄마인 것 같아요.
“저희는 쪽지를 많이 주고받아요. 늦게까지 일이 있는 날은 딸의 침대에 쪽지 남기고 나오고 또 아이는 제 침대에 ‘엄마가 자랑스러워, 힘내세요’라는 쪽지를 남기는 식이지요. 지난 1월 딸이 3주 동안 호주로 극기 훈련을 갔는데 그 3주 동안 저는 매일 딸에게 카드를 썼어요. 그 기간에 아프리카에도 다녀왔는데 불도 없이 어두운 곳에서 묵을 때도 하루도 안 빼고 썼답니다. 아이가 집에 오던 날 침대와 책상에 그 카드 21장을 붙여놓고 맞아줬어요. 이런 엄마가 정말 어디에 있겠어요?(웃음) 아이도 무척 좋아하면서 “엄마가 하루에 한 장씩 썼으니 하루에 한 장씩 읽겠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예뻐서 떼어내기 아깝다고 지금도 방에 그대로 붙여놓고 있어요.”

어머니가 오래오래 곁에 계셔주셨으면 하는 바람

정애리 궁금한 무대 밖 인생


정애리는 현재 어머니,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지난 2005년 오랜 별거 끝에 이혼했을 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돼준 이도 어머니와 딸이다. 지금 그의 바람은 무엇보다 어머니의 건강. 그 자신은 눈물 많고 마음이 여린 편이지만 엄마 앞에서는 씩씩한 딸로 기운을 북돋워드리려고 노력한다.
▼ 정애리씨는 어머니에게 어떤 딸인가요.
“하늘이 내려준 딸이 아닐까요(웃음). 농담이고, 지금까지 늘 같이 살면서 어머니로부터 큰 사랑과 도움을 받고 있어요. 4남2녀 중 막내딸인 저를 볼 때면 어머니는 피곤할까봐 더 많이 쉬게 해주고 싶으면서도 다른 자식과 있었던 이야기, 간혹 섭섭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신가봐요. 언제나 어머니가 제 옆에 계셔줄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2년 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나신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됐어요.”
▼ 어머니께 더 잘해드려야겠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어딜 가나 항상 붙어다니는 사이좋은 부부셨어요. 아버지가 편찮으셨을 때 엄마는 한 숟갈이라도 맛있게 잡숫게 하고 싶어서 새벽부터 시장을 봐오곤 하셨지요. 그러느라 관절이 많이 나빠지셨고 아버지 돌아가신 후 많이 쇠약해지셨어요. 요즘 연극 공연하면서 노인분들의 치매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고 어머니 건강 지켜주십사고 기도를 많이 합니다. 지난해에는 막내오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 후로 형제들이 더욱 자주 모이려고 하고 가까이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형제가 다 같이 모여 어머니 모시고 여행 다녀요.”
▼ 배우 박철민씨가 공개적으로 애정을 고백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분이 어느 방송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는데 1년도 더 지나서 우연히 집에서 그 재방송을 봤어요(웃음). 박철민씨가 출연한 연극 개막할 때 찾아가서 꽃바구니를 전해줬더니 ‘꽃이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평생 간직하겠다’고 하기에 한참 웃은 적도 있고요. 이번에도 박철민씨가 맡은 역은 원래 더블 캐스팅이 아니었는데 제가 출연한다는 말을 듣고 같이 하고 싶다고 제작자에게 사정해서 억지로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모여서 연습하던 날 갑자기 나타나서 모두 깜짝 놀랐지요. 철민씨는 실제로도 유쾌하고 웃기는 후배라서 즐겁게 같이 공연하고 있습니다.”

여성동아 2010년 5월 5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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