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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돌풍 ‘덕혜옹주’ 작가 권비영 뒤늦게 꽃피운 문학 인생

글 박혜림 사진 조영철 기자 || ■ 장소협찬 충정각

입력 2010.04.16 13:21:00

한 무명작가의 소설 ‘덕혜옹주’가 출간 이후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정상을 지키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밀어내 화제다. 12월 중순 출간된 후 4주 만에 1위 자리를 차지한 것. 3월 중순 현재 약 30만부가 팔릴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덕혜옹주’의 작가 권비영씨를 만났다.
인기 돌풍 ‘덕혜옹주’ 작가 권비영 뒤늦게 꽃피운 문학 인생


올해는 경술국치 1백주년이 되는 해다.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고 쓸쓸하게 그 이름을 잃었다. 사람들은 경술국치를 말할 때 비운의 황제 고종을 떠올리지만 올해는 유난히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고종 황제의 막내딸 덕혜옹주(1912~1989)다. ‘옹주’는 왕이 후궁에게서 얻은 딸을 일컫는다. 1912년에 태어난 덕혜옹주는 고종이 자주 “내 삶의 유일한 기쁨”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랑받는 존재였지만 그 누구보다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가 뒤늦게 세간의 관심을 끄는 데는 작가 권비영씨(55)의 공이 크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권비영씨은 “이런 열풍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덕혜옹주’는 그가 세상에 내보인 두 번째 소설이다. 1995년 신라문학상으로 문학계에 등단한 그는 2006년 첫 창작집 ‘그 겨울의 우화’를 냈다. 등단한 후 15년 동안 책 2권은 결코 다작이 아니다. 등단에 욕심이 없었을 뿐 20대 초반부터 신춘문예를 비롯해 다양한 문학대회에 응모해온 걸 감안하면 뒤늦게 빛을 본 작가라는 말이 맞다. 덕혜옹주를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전적으로 감정에 이끌려서였다.

덕혜옹주의 기구한 삶 접하고 펜 들지 않을 수 없어
2007년 무심코 신문을 읽어내려 가던 권비영씨는 한 장의 사진에 시선을 빼앗겼다. 대한제국을 다룬 특집 기사에 실린 덕혜옹주의 사진. 순수하고 맑기 그지없으나 강인하고 총명해 보이는 소녀였다.
“어떤 매체였는지 어떤 기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요. 함께 실린 덕혜옹주의 사진만이 또렷이 기억나요. 마음이 이끌렸어요. 저분에 대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죠.”
덕혜옹주에 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어둡고 뿌연 미로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도서관의 책장 사이를,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분주히 오갔다. 아버지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연이은 어머니의 죽음. 일본 귀족과의 강제결혼 그리고 딸 정혜의 자살. 정신병원 감금. 마지막 황녀인 그의 삶이 너무도 기구해서 가슴을 쳤다.
권비영씨가 목표로 한 출간일은 2009년 초였다.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난 지 20주기가 되는 해였다. 이왕이면 그때 덕혜옹주의 묘비에 책을 올리고 세상에 옹주를 내보이고 싶었다. 주변 사람에게 책을 꼭 낼 것이라 말하고 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보랏빛 소국을 덕혜옹주의 묘비 앞에 올리던 날 그는 부탁했다.
“덕혜옹주여, 당신의 삶을 되살리고 싶습니다. 영혼이나마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로부터 사흘 후 꿈속에서 덕혜옹주를 만났다. 보랏빛 소국을 두 손에 들고 아무 말 없이 한참 바라보다 홀연히 사라졌다. 권비영씨는 소설이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덕혜옹주가 모든 과정을 보살폈다고 믿는다.
덕혜옹주의 남편은 소 다케유키. 그는 일본 대마도 번주 가문 출신으로 덕혜옹주가 강제로 결혼한 상대였다. 작은 흔적이나마 더듬고 싶었기에 대마도 여행길에 올랐다.
“무엇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결혼봉축비와 만상원을 봤죠. 만상원은 소 다케유키의 선산인데, 덕혜옹주에 관한 자료가 너무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갔어요. 2008년에 대마도를 두 차례 더 다녀왔죠.”
그럼에도 여전히 덕혜옹주의 삶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알고 지내던 문인으로부터 ‘덕혜희-이씨 조선 최후의 왕녀’라는 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인 혼마 야스코가 썼다고 했다. 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는 느낌이었다. 번역본이 없었고 원서도 시중에 판매하지 않았다. 저자가 직접 울산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한 것이 유일하다고 했다. 울산에 살고 있던 그는 덕혜옹주가 어딘가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기 돌풍 ‘덕혜옹주’ 작가 권비영 뒤늦게 꽃피운 문학 인생


“책의 존재를 알려준 사람도 번역을 도와준 사람도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어요. ‘덕혜옹주’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말을 많이 하고 다녔더니 건너서 연락을 해왔어요. 신기한 일의 연속이었죠.”
‘덕혜희’를 지인이 매일 한 장씩 번역해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한글로 번역된 덕혜옹주의 삶을 공부하고 정리해 다시 글로 써내려갔다. 2008년이 끝나갈 무렵 소설은 거의 완성돼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우연히 혼마 야스코의 책이 이미 번역 돼 ‘덕혜옹주’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된 사실을 알게 됐다.
자칫 혼마 야스코의 번역본과 유사한 작품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겠다 싶던 권씨는 개작을 결심했고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허구적인 소설적 구성을 풍성하게 살리기로 결심한 그는 나인이던 허복순과 그림자처럼 덕혜옹주를 지킨 박무영이라는 인물에 치열하게 숨을 불어넣었다. 당초 예상했던 1월이 지나고 시간은 5월을 달리고 있었다.
그때 다시 절망이 찾아왔다. 큰 트럭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한 것.
“마티즈를 몰고 가는데 덤프트럭이 달려와 박아버렸죠. 차가 완파되고 유리 파편이 머리에 튀어 피가 낭자했어요. ‘아, 이대로 죽는구나’ 했죠. 다행히 병원에서 피를 닦아내니까 예상보다 부상이 심하지 않았어요. 기적이라고 했어요. 오른쪽 머리부분에 5바늘을 꿰매고 한 달 정도 후에 퇴원했거든요.”
결국 책은 2009년을 보름 정도 남긴 시점에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되레 행운이 찾아왔다. 예상치 못했던 경술국치 1백년과 때를 같이해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것. 권씨는 덕혜옹주가 도와준 것이라 믿고 있다.



“두 아들과 지역 작가들이 저보고 자랑스럽대요”
그는 소설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끼적거리며 써내려가길 좋아했다. 숙제로 가져간 글짓기 공책을 본 담임선생님은 언니의 글을 베꼈다며 공책을 그대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중학교 때 만난 선생님은 권씨에게 본격적으로 글을 써볼 것을 권유했다.
“방학 숙제로 소설을 써오라 하셨어요. ‘비영이는 다른 친구들이 해야 하는 숙제는 안 해도 되니 소설을 써와라’ 하시며 용기를 불어넣으셨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글을 계속 써왔네요.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야’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신 거죠.”
그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정식 등단 과정으로 여기는 신춘문예에서 번번이 낙방했다. 그러나 글쓰기 자체를 좋아한 권씨에게 신춘문예는 붙으면 좋고 떨어지면 조금 아쉬운 그런 것이었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서울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10년 후 지금 살고 있는 울산으로 내려온 후에도 늘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다.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정식으로 등단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신혼 때는 여러 대회에서 수상하고 부상을 살림에 보태기도 했어요. 아이들 낳고 울산에 내려오고 어느덧 쉰다섯이 됐지만 제게 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죠. 울산에서 지역 작가들과 교류하며 꾸준히 글을 써왔어요.”
지난 2006년 봄, 권씨는 ‘그 겨울의 우화’라는 창작집을 출간했다. 정식 등단 이후 10여 년 동안 써온 글들 중에서 작품을 엄선했다. 양공주·노인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때 권씨의 글쓰기 인생에 처음으로 슬럼프가 찾아왔다.

인기 돌풍 ‘덕혜옹주’ 작가 권비영 뒤늦게 꽃피운 문학 인생


“책은 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죠. 선배 한 분이 신문사에 책을 보내보는 건 어떠냐고 해서 유명 신문사 일곱 군데 정도에 보냈어요. 답조차 없었죠. 이미 예상은 했지만 창피하고 허탈했어요. 내가 이 짓을 왜 했나 자책하기까지 했죠.”
어둠 속에서 웅크려 있던 시간은 결국 한 해를 넘겼다. 천성적으로 집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보다 집 안에서 홀로 보내기를 좋아한 탓에 외출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때 힘을 준 사람은 두 아들이었다.
“아들이 ‘엄마, 내 친구가 도서관에서 엄마 책 봤대’ 하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어요. 늘 엄마가 작가라는 사실을 뿌듯해하니 고마울 뿐이죠.”
어느덧 스물일곱, 스물여덟 살인 두 아들은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다. 큰아들은 수원에서, 작은아들은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엄마를 보며 “회사 그만두고 우리 엄마 전용 운전기사 해버릴까” 하고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권씨의 손에는 첫 창작집을 내던 때 큰아들이 선물해준 몽블랑 만년필이 들려 있었다. 딸처럼 애교가 많고 붙임성이 좋은 큰아들이 유명한 작가가 되면 사인회 때 쓰라며 선물한 것이다. 아들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방황의 시간들이 이제는 꿈처럼 느껴진다.
요즘 가장 흐뭇한 일 중 하나는 지역 작가들의 반응이다. 권씨의 책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자 울산에서 교류하던 작가들과 타 지역 작가들의 연락이 끊이질 않았다.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해보자는 분위기가 됐어요. 전화를 주시는 분도 계시고 모임에서 자주 이야기를 해요. 제 이름 뜻이 ‘클 비(丕)’에 ‘비칠 영(映)’이에요. 그 정도면 이름값은 했다고 말하시는 동료 문인도 있었죠.”
인터뷰를 하는 동안 몇 번이나 휴대전화가 울렸다. 권씨와 만나길 원하는 매체였다. 지금도 권씨처럼 펜을 잡고 글을 써내려갈 작가들에게 한마디 부탁했다. 쉰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대중의 사랑을 얻게 돼서일까. 말 속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글을 쓰는 일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라면, 끝까지 펜을 놓지 마세요. 언젠가는 내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꼭 쥐고 있으면 반드시 빛을 봅니다.”

여성동아 2010년 4월 5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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