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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간호보조원에서 외교관으로… 김영희 전 세르비아 대사 남다른 삶

글 오진영 사진 조영철 기자

입력 2010.04.16 11:25:00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여성 대사를 역임한 김영희 박사. 전라도 시골 마을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난 그는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파독 간호보조원 모집에 지원했다. 주경야독 끝에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외교관이 되기까지, 그의 남다른 인생 스토리.
파독 간호보조원에서 외교관으로… 김영희 전 세르비아 대사 남다른 삶


외무고시 최종 합격자 중 여성 비율이 남성보다 높아지면서 이른바 여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 외교계는 남자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국 외교 역사를 통틀어 여성 대사는 단 세 명뿐. 그나마 세 번째 여성 대사이던 김영희 전 세르비아 대사(61)가 물러난 이후론 해외공관장 중 여성이 한 명도 없다. 외교계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역대 세 번째 여성 대사인 김영희 전 대사의 삶은 순탄한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다. 독일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며 3년 주경야독 끝에 명문 쾰른대학에 입학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쾰른대학에서 독일어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외교부 독일 전문가 특별 채용으로 외교관이 되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의 세르비아 대사로 임기를 마치기까지, 오로지 자신의 두 손으로 자기 앞길을 열어온 셈이다.
“어릴 적 꿈이 외교관이었는데, 먼 길을 돌아 30년 만에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꿈을 이루기까지 정말 먼 길을 돌았다. 김 전 대사는 지금은 전주시로 편입된 전북 완주군 시골 마을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처음 외교관의 꿈을 품은 건 초등학교 시절. ‘빨간 머리 앤’ ‘톰 소여의 모험’ 같은 동화책을 달달 욀 정도로 읽어대던 때다. 서울은커녕 전주 시내도 가본 적 없는 산골 소녀는 책을 읽으며 ‘저 멀리 내가 모르는 넓은 세상에 언젠가는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외교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지만, 막연히 외교관이 되면 그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외교관을 꿈꿨다.

공무원 포기하고 간호보조원 양성소로
어릴 적 집안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하지만 오빠와 언니들이 상급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부모님이 농사짓던 땅이 자꾸만 줄어들었다. 여덟째인 그가 전주여고를 졸업할 무렵에는 대학 등록금을 대줄 형편이 안 되었다. 결국 직장에 들어가 야간 대학에라도 다닐 생각으로 9급 공무원 시험을 치렀다. 당시 여자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려면 전 과목에서 거의 만점을 받아야 했다. 군 가산점이 높아 여자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던 시절이다.
“요즘 청년실업이 문제라지만 그때는 모든 청년이 다 실업자였어요. 한국 사회가 산업화 초기여서 취직할 곳이 없었습니다. 2백 명 뽑는 서울시 공무원 시험에 1만 명 이상 응시했는데, 9등으로 합격했어요.”
바늘구멍 같은 공무원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해 서울 중구청에 들어간 이듬해 3월, 국제대학교(현 서경대) 야간부 국문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마침 주민등록증제도가 처음 도입돼 구청 민원실 직원들이 매일 야근을 해야 했다.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 없으니 성적이 형편없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70년 12월 어느 날, 시내 백화점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으로부터 간호보조원으로 곧 독일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방법이 있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릴 적부터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던 그로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당시 해외개발공사에서 모집하던 간호보조원 자격이 중졸 이상이었어요. 시험장에 가보니 중졸은 거의 없고 고등학교 독일어 선생부터 은행 직원, 공무원 등 저처럼 외국에 나가고 싶은데 방법이 없던 여자들이 태반이었어요.”
그는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도 자퇴했다. 1년간 간호보조원 양성소 교육을 받고 마침내 독일 땅으로 출발하는 비행기에 오른 것이 72년 8월27일. 그는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밤길 자전거 타고 다니며 외국어 공부

파독 간호보조원에서 외교관으로… 김영희 전 세르비아 대사 남다른 삶

김영희 전 대사는 독일에서 만난 미국인 대학교수 조지 헤서넌씨와 93년 결혼, 1년에 4개월 정도 함께 지낸다.



간호보조원 계약기간은 3년이었다. 하노버와 함부르크 사이에 있는 윌첸시 시립병원에서 근무했다. 독일 병원은 간병인이 따로 없고, 간호사와 간호보조원이 환자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맡았다. 그가 배치된 곳은 남자 정형외과 병동이었다. 사고로 몸이 부자유스럽고 온갖 보조기구를 몸에 매단 거구의 환자들을 씻기고 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중노동이 이어졌다. 3년 계약기간 동안 독일어를 공부해 독일 대학에 진학할 계획을 세운 그는 오전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근무를 자원해 저녁시간엔 독일어와 영어, 불어를 배우러 다녔다.
“시골 동네라 저녁 6시면 버스가 끊겼어요. 길이 없으니 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자전거를 하나 사서 비틀거리고 넘어져가며 연습한 끝에 밤마다 자전거를 타고 공부하러 다녔어요.”
그렇게 3년을 준비해서 대학 입학원서를 내려는데, 아무래도 대학 1년 중퇴 학력으로는 입학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또 길을 만들어야 했다.
“원서를 우편으로 보내면 한 번 쳐다보고 내버릴 게 뻔했어요. 밤 기차를 타고 대학이 있는 도시마다 찾아가 날이 밝을 때까지 역 대합실에서 기다렸다가 근무시간이 되면 대학에 가서 외국인 학생 입학처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직원이 ‘그냥 나한테 이야기하라’고 하면 꼭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했어요. 그렇게 애걸복걸 매달리면 결국 처장이 나와서 내 이야기를 들어줬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쾰른대학 입학처장이 그의 이야기를 가장 주의 깊게 들어줬다. 그리고 쾰른대학에서 가장 먼저 입학허가서가 날아왔다. 뒤를 이어 하노버와 함부르크 등 다른 대학에서도 합격통지서를 보내왔다.
“75년 쾰른대학 철학부 교육학 전공과정에 들어갔을 때, 학생 40명 중 유일한 외국인이었어요. 독일 대학생이 졸업하기까지 평균 6.5년 걸리는데 외국인인 제가 5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가장 먼저 졸업했어요.”
그는 학부 졸업 후 공부를 계속해 86년 교육학 전공에 철학·인류학 부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비과정부터 박사 학위까지 단 10년 만에 끝냈다. 독일 대학에선 대단한 기록이다. 그는 대학원생이던 79년부터 학생 조교로 강의를 시작해 쾰른대학 6백년 역사 최초로 전공과정을 강의한 외국인 강사가 되었다.
독일 대학에서는 박사 학위 취득 후 수년의 연구과정을 거친 다음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교수가 될 수 있다. 독일에서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교육철학을 강의하고 있던 90년 초, 한국 외교부(현 외교통상부)에서 독일전문가를 특별 채용한다는 공고가 눈에 띄었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꿈이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한걸음에 서울로 달려와 특별 채용 시험에 응시했다. 최종 면접에서 한 심사위원이 “외국에서 자유롭게 학문을 하던 사람이 제약 많은 외교관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한국은 나를 낳고 키워준 나라이고 독일은 내 정신세계를 성장시켜준 나라이니 두 나라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합격했지요.”
어린 시절 가슴에 품었던 외교관의 꿈이 나이 마흔이 넘어 이루어졌다. 91년 한국을 방문한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독일 대통령 통역으로 시작해 김영삼·김대중 정부의 독일 국빈 통역을 담당했다. 주독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과 공사를 거쳐 2005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대사로 임명됐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세르비아로부터 몬테네그로와 코소보가 독립하는 진통을 겪었다. 세르비아에 부임한 유일한 아시아인 여성 대사였던 그는 취임 3개월 후부터 공식 석상의 모든 연설을 세르비아어로 했다. 한국을 알리기 위해 세르비아 내 영재교육센터에서 한국을 주제로 하는 에세이 콘테스트를 열기도 했다. 국기원 시범단을 초청해 개최한 대사배 태권도대회는 세르비아 TV에서 12번이나 방영됐다.



파독 간호보조원에서 외교관으로… 김영희 전 세르비아 대사 남다른 삶


남편인 조지 헤서넌 교수(미국 세인트어거스틴 칼리지 철학과)와는 독일 유학시절 만났다. 네 살 연하의 미국 유학생이던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이 78년이고, 결혼은 93년에 했다.
“만난지 1년 정도 지나 제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는데, 남편이 철학 공부를 하며 독신으로 살겠다고 대답하더군요. 86년 조지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제가 한국에 왔다가 다시 독일 공관으로 발령이 나기까지 7년 동안, 우리는 크리스마스와 생일에 카드를 주고받는 것 외에 전화 한 번 안 했습니다.”
그가 본에 있는 주독일 한국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던 93년, 갑자기 조지가 찾아왔다. “7년 만에 만나는데도 어제 보고 헤어진 사람 같았던” 그 남자가 청혼을 했고, 두 사람은 그해 여름과 겨울 사이에 독일과 한국, 미국을 돌아가며 세 번의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미국의 대학교수와 한국 외교관이라는 각자의 직업을 지키며 방학 때마다 만나는 ‘방학 부부’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
“1년에 4개월 정도 만나니까 늘 신혼 같아요. 함께 있으면 시간이 아까워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니까 싸울 일이 없지요.”
떨어져 있는 동안엔 매일 전화하고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남편은 그가 외교관으로서 정상회담을 수행하는 등 며칠씩 통화가 어려울 때면 곰 그림이 그려진 카드에 빽빽하게 편지를 적어 보내곤 했다. 요즘은 함께 관람한 콘서트 등 둘만의 추억이 담긴 음악 파일을 ‘유튜브’에서 찾아 매일 이메일을 세 통씩 보내준다고 한다.
“외교통상부에서 퇴직한 후 왜 남편이 있는 미국으로 가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아요. 미국에 가서 대학 강의를 하며 편하게 살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제 꿈과 열정이 너무 뜨겁습니다. 독일의 통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지켜본 경험, 유럽에서 30년 이상 쌓아온 식견과 인간관계를 활용해 한국 사회에 기여할 부분이 분명 있을 것 같아 아직은 떠나고 싶지 않네요.”

독일, 유치원 때부터 민주적 절차 교육
그는 지난해부터 우석대학교에 일주일에 한 번 초빙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과 젊은이들의 현실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각자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을 거쳐 합의한 결론을 따르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유치원 때부터 교육합니다.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주관을 표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그곳 교육의 핵심이에요. 한국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지식은 많이 가르치지만 그 지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의력을 키워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대학 입시와 취업 경쟁에 쫓겨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가는 한국 젊은이들과 자식의 일류대 진학을 바라며 사교육에 비합리적으로 많은 돈을 지출하는 한국 부모들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자신의 젊은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우수한 자질, 풍요로운 경제적 배경을 갖추고도 ‘안정적인 직업’ 하나에 골몰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그가 따뜻한 충고를 담아 책으로 펴냈다.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동아일보사)가 그것이다.
“통신과 교통으로 전 세계가 연결돼 앞으로는 국경의 의미가 점점 희미해질 겁니다. 옆 집 학생, 옆 자리 동료가 경쟁자가 아니라 선진국의 인재들이 경쟁 상대인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경쟁 상대는 자기 자신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만 험난한 인생 항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여성동아 2010년 4월 5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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