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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써내려간 50년 의료일기

‘입양아 대모’ 조병국 전 홀트아동병원장

글 이설 기자 사진 지호영 기자, 삼성출판사 제공

입력 2009.12.22 11:24:00

“마음 아프게 살려고 의사 했니. 개업을 해.” 가엾은 아이들 틈에서 고군분투하는 딸에게 생전의 어머니는 이렇게 당부했다. 꺼져가는 어린 생명들 틈에서 힘들어하는 딸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한평생 그 길을 꿋꿋이 걸었다. 홀트아동병원 조병국 전 원장이 6만 입양아에게 띄우는 편지.
마음으로 써내려간 50년 의료일기


출생연도와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1933년 출생, 올해로 일흔여섯. 나이에 비해 피부결이 지나치게 곱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피부로 가꾼 비결을 묻자 “아이들 돌보느라 바빠 웃을 일이 없어 주름이 안 생겼지.” 온화한 미소로 건네는 농담이 “평생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지내서 이렇게 젊다”는 말로 들린다.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홀트아동병원)의 조병국 전 원장. 의사생활을 하는 50년간 그는 꼬마 환자만 돌봤다. 58년 연세대 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을 졸업한 뒤 63년 소아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서울시립어린이병원에서 14년, 홀트아동병원에서 30년 이상을 일했다.
너나없이 힘든 시절 아이들을 돌본 만큼 사연도 많다. 지난해 일흔다섯 나이로 퇴임한 그를 서울 서초구 잠원동 자택에서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입양 간 아이들의 사진과 편지가 빼곡한 앨범을 꺼내 보인다. 세월의 때로 반질반질한 사진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애정이 가득하다.
“진작 그만뒀어야 하는데 정년을 15년이나 넘겼어요. 박봉인 자리라 후임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거든요. 부모의 사랑을 알기도 전에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보다가 할머니가 된 거죠.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도 입양 보낸 아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해요. 참 이상하죠?”

의사의 한계로 괴로워하던 순간 기적처럼 살아난 영희

60년대 초반, 황폐한 서울 거리에는 전쟁고아들이 넘쳐났다. 갈 곳 없는 4세 미만 아이들은 우선 시립어린이병원으로 보내졌다. 이후 아프지 않은 아이들은 곧장 영아원으로, 유기아들은 공고기간 2주가 지나면 입양기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 원장은 밀려드는 아이들을 온 힘을 다해 돌봤다. 귀가 아파 더는 청진기를 대지 못할 때도 있었고, 과로로 팔에 마비가 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안타깝게 세상을 등지는 생명이 적지 않았다. 워낙 질병이 만연한데다 의료기술마저 열악했기 때문. 그곳에서 그는 체념과 기적을 배웠다.
“최선을 다해 진료해도 의사가 모든 환자를 살려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의사의 한계란 분명히 존재해요.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하기에 의사는 냉철하고 이성적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이유로 의사는 기적을 믿어요.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기적이라도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들거든요. 실제로 종종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요.”
70년대 초 시립어린이병원에서 만난 영희도 기적을 보인 아이 중 하나다. 진주처럼 희고 윤기 있는 피부에 크고 검은 눈.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영희는 그가 본 신생아 가운데 가장 예뻤다. 아이를 보려는 병원 스태프로 인해 영희의 침대는 늘 북적였다. 간호사들은 첫 자는 가나다 순서로, 둘째 자는 여자아이면 ‘순’, 남자아이면 ‘석’ 하는 식으로 아이들을 부르곤 했다. ‘영희’는 귀한 자식일수록 무난한 이름을 짓는 어른들 말씀에 따라 특별히 지은 이름이다.
한데 입양을 며칠 앞두고 영희가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설사가 그치지 않았고 물 한 모금에 구토를 했다. 설상가상 정맥주사를 놓기 위해 머리를 고정한 기구와 맞닿은 피부가 까맣게 변했다. 영문을 모르는 터라 사망진단서를 준비하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의사라는 직업에 최고로 회의를 느낀 때예요.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의사가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아픈 고아들 곁을 지키느라 내 자식들 간식 하나 못 만들어주면서도 항상 감사했어요. 한데 사그라지는 생명을 그냥 지켜봐야만 할 때는 ‘내가 의사가 맞나’하는 회의가 밀려드는 거죠.”

마음으로 써내려간 50년 의료일기




온몸에서 진물이 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됐을 때, 간호사들이 병실 한구석에서 곶감을 달였다. 어릴 적 배앓이를 할 때 할머니가 해주던 민간요법이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 원장도 숨죽이고 곁을 지켰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도 이해가 안돼요. 물 한 모금 못 넘기던 아이가 곶감 달인 물을 어떻게 받아먹었는지. 설사와 구토가 점점 줄더니 기운을 찾았죠. 의학적 지식으로 영희의 회생은 불가능했지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해외로 입양을 갔는데, 지금 삼십 줄 정도 됐겠네요.”
홀트아동병원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만 해도 그는 입양을 불신했다. 멀쩡한 친자식도 버리는 세상, 먼 나라 아이들, 그것도 장애아들을 데려가는 속내가 못미더웠다. 하우스메이드로 부려먹을 심보인가. 72년 미국으로 날아가 직접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이런 생각이었다.
“미국에서 다리가 불편한 입양아를 만났는데, 그 아이가 양부모에게 왜 정상아가 아닌 자신을 입양했냐고 물었대요. ‘내가 다리를 절어서 너의 불편함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또 우리 집에는 휠체어 때문에 문턱도 없다. 네가 오면 나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라는 게 양아버지의 대답이었죠. 그 이야기를 듣고 참 부끄럽고 창피했어요. 세상에는 그런 마음 씀씀이도 있구나 싶었죠.”
입양가정을 신뢰한다 해도 아이들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가난해서, 살기 힘들어서 쓰레기봉지에 돌돌 말려 화장실에 버려진 아이들. 부모 품이 아닌 차가운 병실을 전전하는 아이들. 양부모와 다른 피부색이 이상해 피부가 발개지도록 얼굴을 문지를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했다. 그래서 조 원장은 해외 입양아가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한국을 방문할 때가 가장 기쁘다. 그 아이가 다시 홀트에서 입양을 하는 경우엔 더욱 가슴이 벅차다.
“88년 홀트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를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의대생이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몰랐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가 한참 데리고 있던 아이였어요. 아홉 살 때 보육원에 맡겨진 영수였죠. 자신의 병을 겪으며 재활의학과나 소아과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부인을 만나 결혼했지만 불임이었어요. 영수는 받은 사랑을 갚는다며 한국 아이를 입양했죠. 그런데 입양하고 몇 년이 지나 아이가 생겼어요. 고맙게도 제 이름을 따 아이 이름을 ‘병국’이라 지었죠.”
조 원장이 의사를 꿈꾼 것은 동생 둘을 내리 잃고 나서부터. 하나는 코피를 많이 흘려 출혈사로, 다른 하나는 홍역으로 떠나보냈다. 특히 작은 동생은 본인 탓인 것만 같아 지금껏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 의사 말을 듣지 않고 밖으로 아이를 업고 나왔는데, 그때 쐰 찬바람의 타격이 컸나 싶어서다.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 시절 6·25를 치르면서 사람 살리는 일에 대한 갈구가 더 커졌다. 의사가 된 뒤에도 속절없이 아이를 떠나보낼 때가 가장 힘들다.
“여자 속바지에 싸여 버려진 태희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탯줄과 태반을 그대로 달고 있었죠. 힘들게 살렸는데 심장기형이 발견됐어요. 국내에선 치료가 불가능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죠. 한데 비행기에서 아이 배가 불러오고 입술이 파래졌어요. 도착하자마자 수술실로 들어갔어요.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한 달 뒤에 죽었어요. 한국의 여러 병원을 거쳐 겨우 양부모를 만나 미국으로 간 건데. 이후 태반을 단 채 병원으로 실려 오는 아이가 있으면 꼭 ‘태희’라는 이름을 지어줬어요. 이번에는 제발 불행한 출생을 딛고 오래오래 살라고.”

마음으로 써내려간 50년 의료일기

1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네 아이를 길러낸 지니 여사. 2 조 원장은 매일 입양아들을 위해 “출생의 불행을 딛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크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입양은 자기 안의 사랑 일깨우는 계기
오랜 기간 입양기관에서 일한 덕에 그는 반 입양 전문가가 됐다. 입양에 대한 사명감도 생겼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부모를 찾기 위해 모국방문을 할 때면 어김없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오래전 없어진 영아원도 많고 대부분 기록도 소멸돼서다. 고희가 넘은 나이, 이제는 쉴 법도 한데 입양 후 경과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한다.
“입양은 평생을 인내해야 하는 일이에요. 아이가 커봐야 결과를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국내 입양은 자료가 굉장히 부족해요. 해외 입양은 충분히 시행착오를 거쳐 경과에 대한 내용들이 알려졌는데, 국내 입양은 입양된 이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죠. 그간 입양된 아이들의 경우를 조사해 양부모에게 믿을 만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싶어요.”
파양에 대한 관심도 많다. 전체 입양아동의 40%에 머물렀던 국내 입양비율이 최근 59%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 통계가 입양문화의 성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근래에 친자확인 의뢰가 늘었는데, 이는 친자를 확인하려는 게 아니라 친자가 아님을 확인해 파양하기 위해서다’라는 ‘입양 괴담’이 이를 보여준다.
“다섯 살 난 기원이는 네 번이나 파양을 당했어요. 다섯 번째 엄마 집에 가서는 첫날 이불에 똥을 눴다고 하더군요. 파양이 반복되면서 아이도 깊이 상처를 받은 거죠. 힘들었지만 그 엄마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심한 투정을 참아내며 아이를 보듬었죠. 7개월이 지나서야 기원이가 엄마 목을 꼭 끌어안았대요.”
파양은 보통 큰 병이 발견되거나, 아이가 적응을 못하거나, 부모나 가정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경우 일어난다. 아이를 되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조 원장은 “어떤 경우에든 파양은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음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보다 더디 낫고, 특히 아이라면 평생 상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조 원장은 “입양하는 부모들은 큰 부자도, 지식인도 아니다. 주기만 하는 마음을 아는 평범한 사람들이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다”며 자신 안의 사랑을 일깨울 것을 당부했다. 그는 최근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삼성출판사)를 펴냈다.

여성동아 2009년 12월 5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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