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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꽃보다 아름다운 의지

김호경 시련 극복기

‘꼴통’ 자퇴생에서 美 존스홉킨스 병원 의사로

글 이설 기자 사진 랜덤하우스 제공

입력 2009.12.22 11:10:00

10대는 작은 것에도 울고 웃고 상처받는 유리 같은 나이다. 모두에게 힘든 시절이지만 김호경씨의 청소년기는 특히 암울했다. 부모의 불화와 문제아의 낙인이 버거워 학교를 그만두고 방에서 숨어 지냈다. 극약 처방으로 혈혈단신 미국으로 떠나 독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인 지 10년. 이제야 자존감을 되찾은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김호경 시련 극복기


너와 나의 삶은 다르면서도 많이 닮았다. 세상에 나와 해를 거듭하며 시기마다 주어지는 옷을 바꿔 입는다. 옳고 그른 것으로 통하는 길도 정해져 있다. 학업에 매진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 성공, 궤도에서 이탈해 ‘마이웨이’를 외치면 실패의 꼬리표가 붙는다.
몸과 마음이 설익은 10대도 이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학교보다 바깥세상에 관심이 많거나 개성을 고집하면 ‘문제아’로 불린다. 어른들은 이들을 “겉멋이 들었다”고 간단히 정리하지만, 알고 보면 이들의 속내도 성인의 그것만큼 복잡하다. 섣부른 단정은 문제아를 더 심각한 문제 상황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한국 학생들은 하나같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는 압력을 받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아요. 다른 개성과 열망을 이해하며, 아이비리그 졸업장보다 안정되고 균형 잡힌 심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죠. 사회는 공부뿐 아니라 다양한 학생들의 필요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최고 의학도들이 모인다는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미국·러시아·인도·중국 등 각국의 인재 가운데 한국인 김호경씨(29)도 있다. 그는 누가 봐도 촉망받는 청년이다. UCLA, USC 의대를 거치며 ‘올해의 학생’으로 선정됐고, UCLA에서는 만점에 가까운 학점을 받아 최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전미 응급의학 임상국가고시에서 3년 연속 존스홉킨스 병원 최고 점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현재 그는 존스홉킨스 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양지를 걸었던 건 아니다.
“저는 떠나야 합니다, 가야 합니다. 제발 저에게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소서. 저는 당신께 행복, 성공,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번의 기회를 바라옵니다.”
열일곱 살이던 97년 2월 어느 밤,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가 미국행을 택한 건 유학을 위해서도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현재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부모의 불화였다. 그의 기억 속 일상은 오로지 싸움이었다. 더하거나 덜하거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매일 밤이 악몽이었다. 아버지는 만취해 어머니를 공격했고, 어머니는 온 힘을 다해 맞섰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박살난 접시 조각이 전날의 상흔을 짐작케 했다. 중학생 이후 이런 시간이 계속되면서 자상하던 아버지와 현명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차츰 잊혀갔다.
“가정의 슬픔은 어느 순간 분노로 바뀌어 제 정신을 삼켰어요. 사춘기 시절 항상 불만에 가득 차서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곤 했죠. 중학교에 진학한 뒤 엄격한 분위기에 적응을 못 했고, 집에서도 싸움소리가 들리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방관했죠. 그런 답답함을 문제아들과 어울리면서 해결하기 시작했어요.”
수업이 끝나면 당구를 치거나 술을 마셨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담배도 피웠다. 그런 그를 걱정한 아버지는 터전을 옮겨 새 생활을 설계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모는 다시 마찰을 빚었고, 결국 아버지는 따로 살게 됐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간신히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바닥을 기는 성적으로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중학교 때처럼 함께 반항할 동지도 없어 마음 기댈 곳이 없었다. 4, 5개월쯤 지났을까. 철저히 혼자인 채 집과 학교를 기계처럼 오가던 그는 자퇴를 결심한다.
“처음에는 홀가분했지만 시간이 지나 삶의 근본을 뒤흔드는 불안에 휩싸였어요. 인생의 목적 없이 방에서 시간을 보냈죠. 방이 감옥처럼 느껴졌어요. 뒤늦게 후회해도 너무 멀리 와 방법이 없었죠.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학교를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 대신 취미생활과 운동, 책을 읽으며 학교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마음을 안정시킬 방법을 찾을 겁니다.”

미국에서 시작한 제2의 인생, 철저한 계획 세워

김호경 시련 극복기

존스홉킨스 병원에 첫 발을 내딛는 날 동료들과 함께.



16개월을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처럼 지내던 중 뜻밖의 기회가 왔다. 아들의 망가져가는 인생을 걱정한 아버지가 미국행을 제안한 것. 한 해 전 캐나다에서 한 달간 어학연수를 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칭찬, 자율, 흥미로운 수업이 있는 그곳에서의 일상은 즐거웠다. 난생처음 영어를 배우든 여행을 하든, 무언가에 열정을 갖는다는 가슴 벅참을 깨달았다.
“유일한 탈출구였죠. 곰팡이가 서린 작은 방과 가족갈등에서 벗어나 뭔가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아버지에게도 미국은 과거를 지우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의 땅, 용서의 땅이었고요.”
서운함과 안타까움으로 그를 말리는 어머니의 손길을 뿌리치고 아버지와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새 여정을 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진 않았다. 독립과 자유가 있는 기회다운 기회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와 고모에게 시애틀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대학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리를 잡은 뒤 가족들을 모을 계획이었던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모두가 깨진 유리잔이라는 걸 아는데 아버지만 몰랐어요. 아버지와 함께 지낸다면 공간이 바뀌어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죠.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 없이 어머니가 어렵게 마련해준 2천 달러로 시애틀 생활을 시작했어요.”
제2의 인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했다. 꼼꼼하게 홈스테이와 학교를 정하고 대학에 갈 계획을 세웠다. 2년제 지역전문대학을 거쳐 4년제 대학에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영어라는 기본 과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캐나다에 다녀온 뒤 영문법을 열심히 공부해 문장구조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어 표현은 낯설기만 했다. 일단 가장 잘 팔린다는 영어 대사전부터 샀다. 그때부터 그는 크고 무거운 사전을 팔이 빠져라 어디든 가지고 다녔다. 동시에 새로운 단어를 외울 때마다 카드에 적어 단어집을 만들었다.
“일단 문법을 익힌 뒤 단어카드를 갖고 다니며 달달 외웠어요. 그다음 쉬운 소설, 신문, 교과서, 잡지, 광고까지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작문을 배웠죠. 물론 처음에는 모르는 단어가 많아 제대로 읽어나갈 수 없었어요. 하지만 몇 년이 걸릴 것을 생각하고 참아냈죠.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도 큰 도움이 됐어요. 나중에는 미국 학생들의 리포트를 고칠 정도로 영어가 익숙해졌습니다.”



시련과 고통은 자유를 위한 수업료
영어를 마스터하고 나니 학업이 다소 수월해졌다. 과목 하나하나를 모든 것을 건 시험이라 생각하고 매 순간 혼신을 다했다. 교과서를 100% 이해할 때까지 읽고 또 읽었고, 도서관 4,5곳을 옮겨가며 공부했다. 수학 방정식과 물리학 법칙도 영혼에 흡수하다시피 했다. 수업시간에는 하품조차 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열 배, 스무 배 더 노력하며 지칠 때마다 지난날 방치한 시간을 떠올렸다.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학업 이외의 것이었다. 어머니가 쥐어준 돈이 바닥나자 궁핍이 찾아온 것이다.
“몇 주 만에 돈이 바닥났어요. 우산 살 돈이 없어 비를 맞고 다녔고, 햄버거도 부담스러워 점심은 아예 굶었죠. 홈스테이에서 주는 저녁이 유일했는데, 음식을 다 먹어도 허기가 가시질 않았어요. 결국 교내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해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잡초를 뽑는 일이었죠.

김호경 시련 극복기

1 의료현장에서는 냉철하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동료들. 2 응급의학과 전국 학회 후 동료 전공의들과 함께. 3 24시간 깨어 있는 존스홉킨스 병원 응급실 입구.



맥도날드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공부하는 것처럼 일도 몸이 부서져라 했어요. 가장 먼저 달려가 쓰레기통을 비우고 화장실을 청소했죠. 그랬더니 한 달이 지나 이달의 직원으로 뽑히더군요. 저에겐 모든 일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든 특별한 사건이에요.”
개인적 욕구를 차단하고 시계추처럼 2년을 보낸 결과 영어수업에서 백인을 제치고 1등을 도맡을 정도가 됐다. 지역대학을 우수하게 마쳐 대학에, 그것도 UCLA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의대에 관심이 생겨 의대 예과에 진학하기 위해 필요한 수업을 채워나갔다. 모든 수업이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도전이었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의과대학 입학시험인 MCAT와 합격의 관건인 봉사활동을 하며 하루를 25시간처럼 살았다.
“의대 입학에도 경험과 활동이 중요해요. 저는 연구소·적십자·지역교회 등에서 활동을 했죠. 고등학교 중퇴자임에도 피나는 노력으로 UCLA 최우등생이 됐다는 점도 강조했죠. 결국 USC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의대에 가서도 봉사활동은 이어졌다. 특히 폭력중재프로그램 센터의 경험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센터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따라온 아이들의 숙제를 돕고 함께 놀아주는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넘어 아이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고 싶었다. 가정폭력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밝게 뛰어노는 아이들이지만, 가슴은 아픔으로 얼룩져 있다는 걸 알아서다. 그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동안 자신의 상처가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2007년 그는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10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여동생을 껴안고 한참을 눈물로 대화했다. 그들과 함께 전북 익산의 집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 머물던 그 아파트였다. 변한 건 없었다. 어머니의 이마 주름은 깊어지고 어린 여동생은 어른이 됐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읽던 책, CD, 화날 때마다 던진 물건에 망가진 옷장 문짝, 그리고 곰팡이까지 그의 방은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그 공간에서 몸을 돌돌 말고 웅크리던 시절이 단숨에 되살아났다. 아버지, 미국에 가서도 계속 어긋나기만 하던, 현재도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인 아버지도 떠올랐다.
“시련의 근원인 아버지와의 갈등이 생각날 때마다 달렸어요. 한쪽에는 ‘고통’, 다른 한쪽에는 ‘자유’라고 새겨진 운동화를 신고 달리다 보면 가슴 깊숙이 묻어둔 고통이 지친 몸 밖으로 배출되는 것을 느꼈죠. 갈등과 고통을 단순히 피하는 것은 해결방법이 아니에요. 다른 형태로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근본적인 불안감이 더해질 뿐이죠. 전과 다른 시각과 깊은 진정성, 그리고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해요. 믿을 만한 지인, 그리고 자기 자신과 진실한 대화를 나누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죠. 그러면 원하는 것과 그를 위한 열정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여성동아 2009년 12월 5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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