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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시인 최영미 ‘가지 않은 길’

글 김명희 기자 | 사진 조영철 기자

2009. 05. 21

94년 발표한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스타덤에 올랐던 시인 최영미에게 지난 15년간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소설로 외도를 했으나 “내 길은 아니었고” 오랜 침잠 끝에 발표한 시집 ‘돼지들에게’는 논란만 남긴 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저리 치이며 나이테를 촘촘히 새긴 시인은 말한다. 어차피 쓸쓸함은 생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을 즐기라고.

시인 최영미 ‘가지 않은 길’

최영미 시인(48)을 만나러 가는 길엔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선운사에서’ 중에서)이라고 아쉬워하던 시인은 2년 전 사철 봄빛이 사그라지지 않는 강(봄내-춘천의 순우리말) 근처로 거처를 옮겼다.

나그네처럼 떠돌기만 하던 삶, 진득하니 한곳에 머무르고 싶어 춘천행
이곳에서 시인은 서울에서 열리는 사교모임은 우아하게 거절하고 모처럼 찾아온 평안에 감사하면서 산다. 자동차 없이 멀고 가까운 길을 걸어다닌 덕분에 그는 여전히 군살 없이 날씬하고 예뻤다. 그가 춘천으로 이사한 데는 낭만적인 이유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컸다. 94년 펴냈던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50만 권이나 팔렸지만 그 이후 작품활동이 뜸했던 탓에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것. 그 사이 무리하게 빚을 얻어 장만한 경기도 일산 아파트 대출금이 가슴팍을 조여왔다. 그는 “춘천으로 이사하며 생활 규모를 줄였더니 마음도 편해지고 시도 다시 나오더라”고 말했다. 스무 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는 그에게 외롭지 않은지 물었다.
“쓸쓸함이 내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즐겨요. 좋아하는 야구, 축구 경기도 다른 사람과 같이 보면 재미를 모르겠어요. 여러 사람과 먹으면 밥맛도 잃고…. 지금 돌아보면 젊은 날 사랑은 어떻게 했는지 그게 미스터리예요(웃음). 사랑을 한 건지, 하고 싶었던 건지, 이제는 사랑을 했다는 사실조차도 가물가물하지만.”
먼 길 떠날 나그네가/살아서 떠돌/지상의 모든 길이/영원히 푸른 하늘과 닿게 하소서(‘내일을 위한 기도’ 중에서)

시인 최영미 ‘가지 않은 길’

최영미 시인은 춘천으로 이사한 후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는 네 번째 시집 ‘도착하지 않는 삶’을 냈다. 아련한 푸른색 표지는 하늘과 땅, 지상과 영원의 모호한 경계 같다. 시인은 이제 한 공간에 머물고 싶지만 “첫사랑처럼 우직하게 한 행 한 행 시를 밀고 나갔던” 젊은 날의 열정도 잃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동안 저는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 않은 삶을 살았어요. 유목민처럼. 돈·집·결혼 같은 세속적인 가치들을 우습게 알았죠. 그런데 이 나이가 되니까 2년마다 집을 옮겨 다니는 것도 그렇고, ‘여기에서 저기로’ 떠도는 게 피곤해지더라고요. 이젠 한 군데 정착하고 싶어요.”
서울대 서양사학과 재학시절 시인은 남들보다 머리 하나 더 얹어놓은 듯 훌쩍한 키에 선 굵은 외모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선뜻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남학생들은 없었다. 콧대 높은 그는 남들 다 가는 평범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가정을 이루지 않았고 작가 외에 다른 직업도 갖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야 자신이 버린 패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론가 갈 곳이 있어/달리는 바퀴들이 부러웠다./앞만 보고 질주하다/길모퉁이에서 부드럽게 꼬부라지는/빨갛고 노란 불빛들이 부러웠다.…//신호등을 읽었다면,/멈출 때를 알았다면,/나도 당신들의 행렬에 합류했을지도……//내게 들어왔던, 내가 버렸던 삶의 여러 패들은/멀리서 보니 나름대로 아름다웠다.(‘지루하지 않은 풍경’ 중에서)

언제나 따라다니던 생활인으로서의 의무도 중년이 되자 새삼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피하는 데까지 피했던 집안 행사에도 고개를 내밀어야 하고, 부모님 노후도 걱정해야 한다. 아버지는 어느 날 그를 부르더니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상 묘의 위치를 일러주며 관리를 맡겼다.
“2년 전 대학 동창회에 갔는데 제가 제일 가난하더라고요. 집 없고 차 없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웃음). 그때 다른 길을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건 남자일 수도 있고, 다른 기회일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아쉽기도 하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시인은 운명적으로 타고나는 것 같아요.”
시인으로서의 그의 운명은 개인사에서 연유한다. 시인의 아버지는 여러 시국사건에 휘말려 집안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가장이 제 역할을 못하자 넉넉하던 살림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네 살 때부터 밥을 하며 엄마를 도왔다. 좀 더 커서는 할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친척들의 손에서 키워졌다.

시인 최영미 ‘가지 않은 길’

할아버지는 시골 작은 역의 역장이었다. 그는 지금도 철길을 보면 핏줄 같고 집안 내력 같아 ‘울컥’한다고 한다. 철길에 오래 머물며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소녀는 후에 여행가방만 봐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하는 방랑벽을 갖게 됐다.
외로움을 견뎌야 할 땐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하도 책을 많이 빌려 읽어 하루는 도서관 사서가 물었다. “학생, 아직도 더 읽을 책이 남아 있어?”
2005년 발간한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는 이런 개인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 “소설이 자전적 내용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한사코 부인했다. 누군가가 “경험담이라고 하면 책이 더 잘 팔릴 것”이라고 귀띔해줬지만 부끄러웠고 무엇보다 가족이 상처를 받을까 염려 돼 밝힐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제 와서 이 이야기를 새삼 다시 꺼내는 것은 소설에서 다시 시로 회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한국의 독자나 평론가들이 흔히 지적하는 제 시의 도발성(시인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독자들을 자극하는 강렬한 표현)은 제 굴곡진 개인사와 관련 있어요.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소설을 쓸 수 없어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하니까 자전적 에세이가 되고 말죠. 저처럼 굴곡진 개인사를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시가 더 맞아요. 소설에 익숙해진 문체를 시 문체로 바꾸는 건 마치 완행열차를 타다가 비행기로 바꿔 타는 것처럼 아찔했지만 소설에서 허용되지 않는 비약과 비유로 자유로워질 수 있었죠.”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한 뒤 작가는 비로소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하다고 한다. 하루하루 책상에 쌓인 원고를 보는 기쁨, 퇴고 뒤 책으로 묶여 팔리기까지의 고통도 달콤하게 느껴진다고.

시를 써서 먹고사는 것 이상 바라지 않아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나를 위로하기 위해//혀를 깨무는 아픔 없이/무서운 폭풍을 잠재우려//봄꽃의 향기를 가을에 음미하려/잿더미에서 불씨를 찾으려//저녁놀을 너와 함께 마시기 위해/싱싱한 고기의 피로 더럽혀진 입술을 닦기 위해//젊은 날의 지저분한 낙서들을 치우고/깨끗해질 책상서랍을 위해//안전하게 미치기 위해/내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에 복수하기 위해//치명적인 시간들을 괄호 안에 숨기는 재미에/부끄러움을 감추려, 詩를 저지른다(‘나는 시를 쓴다’)



시인은 얼마 전 유쾌한 경험을 하나 했다. 미국 버클리대 초청으로 문정희 최정례 황인숙 나희덕 등 다른 여류시인들과 시낭송회 ‘Lunch poem’에 참여한 것. 대학, 서점, 미술관 등에서 자신의 시를 낭독했고 즉석에서 독자들과 소통했다.
미국에서의 반응은 꽤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그는 문화 한류스타다. 지난 2005년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출판돼 문단과 독자들의 호평을 동시에 얻었다. 한국에서는 외국에서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게 살짝 억울하기도 하지만 시인은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제가 시를 쓰는 이유는 저와 저처럼 외롭고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예요. 몇 해 전 친한 선배가 병원에서 수술 받는다기에 가봤더니 병상에 ‘돼지들에게’가 놓여 있더라고요. 그 책을 읽으면서 힘을 얻었다고. 제가 누군가의 인생에 도움이 됐구나 싶어 행복했어요.”
기자와 헤어지면서 그는 “나를 참아줄 만한 좋은 남자가 있으면 소개시켜달라”고 했지만 진심은 아닌 듯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는 또다시 쓸쓸하게 자신과 대면할 것이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뼛속 깊이 새겨진 시인의 운명에 감사하며.
“사람은 결국은 자기가 원하는 걸 얻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시를 써서 먹고사는 것보다 더 큰 꿈을 꾸지 않아요. 단지 걱정은 시인으로서 경쟁력을 잃지 않을까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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