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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이순원이 들려주는 삶의 지혜

첫눈처럼 머무르는 선비 작가

글 이설 기자 | 사진 박해윤 기자

2009. 02. 18

까칠하고 동정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 쿨(cool)함의 뒤끝은 허전하다. 허전함을 채워주는 건 역시 ‘사람’. “팍팍한 현실에서 다시금 ‘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작가 이순원을 만났다.

이순원이 들려주는              삶의    지혜


작가 이순원씨(51)가 신작 소설을 펴냈다.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이후 6년 만이다. 멀고 가까운 지난 날 아껴뒀던 7편의 단편을 묶었다. 책 제목은 ‘첫눈’. “책 표지가 예쁘다고 다들 칭찬합니다. 허허.” 그의 말대로 첫눈에 봐도 첫눈처럼 맑고 깨끗한 표지가 호기심을 부른다.
표지 속 시골 마을은 온통 하얗다. 그 가운데 외딴집이 오도카니 섰다. 나흘 폭설에 방금 낸 길도 돌아보면 흔적 없다. 하지만 외딴집은 느긋하다. 매일같이 노동에 시달리던 터, 사방 눈에 갇혀서야 찾아온 어찌할 수 없는 휴식이 고마워서다. 과거처럼 천진하고 따스한 표정을 한 ‘첫눈’. 그 속에 실린 이야기들은 어떨까.
“요즘은 모든 것을 경쟁의 잣대로 판단하죠. 각박한 게 당연해진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늘 조급해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현대인에게 잊고 있던 따뜻한 삶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소설은 ‘따뜻한 삶’을 모토로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멀리 있는 사람’ ‘거미의 집’ ‘미안해요, 호 아저씨’ ‘첫눈’ ‘카프카의 여인’ 등의 수록 작품에서 가족의 정, 고령화 사회의 그늘, 야만을 방조하는 사회 등 불편해서 모른 척하고픈 문제를 풀어냈다.
그의 경기도 일산 집 작업실엔 햇살과 책과 옛것들이 가득하다. 벽면에 붙은 고향 강원도 지도도 눈에 띈다. 그중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옛날 물건에 눈길이 간다. 20년 전 장모가 주신 가래 열매와 할머니 때부터 써오던 물레와 고향 친구가 줬다는 솟대 장식품, 그리고 꼬질꼬질한 실내화도 빼놓을 수 없다.
이순원이 들려주는              삶의    지혜

가래 열매, 솟대, 그리고 이번에 출간한 소설집 ‘첫눈’.


“옛 향취를 좋아합니다. 물레는 원래 딸에게 물려주는 건데 물레로 실 짜듯 좋은 글을 지으라고 특별히 저에게 주셨지요. 시골에서 자랐는데, 20촌 이내 친인척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에요. 4백30년 된 대동계가 있어 관혼상제는 물론 모든 일을 서로 돕지요. 요즘도 부모님을 뵈러 자주 가는데 설이면 모든 마을사람이 의복을 갖추고 마을 어르신인 촌장에게 예를 올려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풍경이 참 그립습니다.”
그는 강원도 강릉 위촌리에서 자랐다. ‘우추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강원도 대표 산골 마을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우추리’를 치면 이장님 연설을 담은 내용물이 줄줄이 나온다. 이씨가 중년 남성 셋이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시골길을 걷는 사진을 내보인다. 사진 속 세상은 서울보다 시간이 더디 가는 듯하다. 왼쪽 가장자리 인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씨 본인이다. 그는 “전통의 가치는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한다”고 강조했다.
이순원이 들려주는              삶의    지혜

“전통이라고 하면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우리의 전통은 유교입니다. 이웃과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고 가족 간 서로 존중하는 유교 문화는 따뜻함과도 통하지요. 저희 5남매는 강릉에서 우애 좋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바빠도 자주 모이려 노력하고 반찬 하나를 먹어도 다른 형제를 생각하지요. 함께 협의할 일이 있으면 상대 입장을 먼저 고려하고요. 이는 자연스레 마을과 집안 분위기를 체득한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시골에는 여유가 있어요. 눈이 펑펑 내리면 도시 사람은 출근길을 걱정하지만 시골사람들은 느긋합니다. 눈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으니 고마운 것이지요(웃음).”
책에 실린 작품 ‘멀리 있는 사람’의 소재인 ‘명 어머니’도 어린 시절 경험한 시골 풍습을 소재로 했다. ‘명 어머니’란 생모가 아닌 아이의 명을 지키기 위해 인연을 맺은 다른 어머니. 외아들인 아버지에게 ‘명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기억을 모티브 삼았다. 소설은 피가 섞이지 않아도 충분히 진지하고 애틋한 명 어머니와 자식 간 관계를 그렸다. 자연스레 이야기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옮아갔다.
그의 어머니는 ‘우추리 형님’으로 통한다고 한다. 말과 행동 모두 반듯해서 가정 안팎에서 덕망이 높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자녀에게도 한없이 대범했다. 공부는 물론 실수나 크고 작은 잘못을 너그럽게 넘겼다.

이순원이 들려주는              삶의    지혜

자신만의 공간이 주는 여유와 행복
이 작가의 집에는 서재가 2개 있다. 하나는 그의 작업실 겸 서재이고 다른 하나는 아내만의 공간이다. 한집에 머무르지만 각자의 공간은 깍듯이 존중한다고 한다. 그는 “가정과 사회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말했다.
“여자가 결혼할 때 가구와 냉장고 등 필요한 물건을 장만하지만 버리고 가는 게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책상이지요. 회사에 자기 책상이 있지만 집에는 책상이 없는 경우도 많고요. 결혼한 대부분의 여성은 엄마가 됩니다. 저는 엄마들에게 책상은 필수라고 생각해요. 자신만의 공간에서 책을 읽고 생각을 다잡으며 지혜로움을 가꿀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면 아이, 남편과의 관계나 집안에서 본인의 위치도 재정립할 수 있고요.
요즘 엄마들은 너무 자녀 종사적으로 사는 것 같아요. 아이의 시험기간에 엄마가 외출하지 않는다는 게 저는 이해가 안 가요. 한국 엄마들은 다른 건 몰라도 공부로 지는 건 못 견디죠. 하지만 공부로 성공하는 사람은 1% 될까 말까 한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엄마들은 공부하며 지혜를 키우고 또렷한 주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풍에 이리저리 휘둘리게 되니까요.”
이순원이 들려주는              삶의    지혜

한 팬이 보내온 선물. 조약돌마다 그의 작품 제목을 새겨 넣었다.


‘거미의 집’도 어머니 이야기다. 자녀들에게 버림받은 어머니를 그렸다. 시어머니, 처가살이, 이민을 핑계로 어머니를 모시지 않겠다고 설전하던 형제들은 “몇 개월간 돌아가며 모시자”는 의견을 내기에 이른다. 이 대화를 엿듣던 노모는 소리 없이 집을 떠난다. 저자는 이 노모를 가리켜 “새끼들이 껍질만 남기고 파먹는, 서서히 말라가는 한 마리 거미”라고 표현했다. 그는 “본인은 어머니 세대와 다르고 나이 들어도 자녀와 지금 같은 유대를 계속 유지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건 착각”이라고 잘라 말했다.
“대부분의 한국 가정이 노부모를 모시는 문제로 갈등을 겪어요. 수명이 길어지고 효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면서 중요한 사회문제가 된 것이지요. 꼭 장자가 아니라도 누가 봐도 부모를 모시기에 합리적인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자녀가 그것을 거부하면 형제 사이가 삐걱거리죠. 그런데 부모 모시길 꺼려하는 사람이 자녀에게는 굉장히 집착해요. 본인은 자녀와 관계를 돈독히 해서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상황에 처하는 걸 무의식중 방지하고 싶은 것이지요.”
이 작가는 “좁은 공간을 공유하는 도시에 좋은 관계란 없다”고 했다. 부모자식 사이뿐 아니라 한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 간 인간적 갈등은 필연적이라는 것. 동물이 영역표시를 하듯 사람도 사적인 공간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데, 이 공간을 보장하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거나 정신적 스트레스를 전혀 주지 않는 부모라도 불편해진다.
“부모 모시는 문제는 구조적으로 극복하기 힘든 면이 있어요. 하지만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 됩니다. 서로에게 이로운 접점을 찾아야지요. 요즘에는 실버시설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른 세대는 실버시설을 양로원이나 고려장이라고 생각하는데, 보니까 시설에 모시는 자녀가 효자더군요. 자주 찾아뵙고 유대관계를 이어가면 부모자식 간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은 물론 생활도 편리해져요. 어차피 고향에 계시거나 따로 살아도 자주 찾아뵙지 못하니까요. 비용이 비싼 것이 문제인데, 사회보장제도가 발전하고 있으니 가격부담도 줄어들 거라고 봅니다.”

경쟁논리로 몰고 가는 성공의 함정
‘미안해요, 호 아저씨’는 야만을 방조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비판적으로 그렸다. 동남아시아와 중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원정결혼을 소재로 삼았다. 어느 날 고향마을에 걸린 ‘재혼, 장애자, 연세 드신 분.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본 주인공은 충격을 받는다. 약탈혼보다 더한 결혼이 횡행하는 현실은 절망스럽기만 하다.
그는 원정결혼뿐 아니라 요즘의 결혼문화에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서로 짝을 찾을 때의 평가 기준, 결혼 방식, 부모님이 자녀의 배우자를 보는 시각 등이 모두 뒤틀렸다는 것. 이 작가는 “조건보다 중요한 건 인성이다. 욕심을 버려야 하는데, 요즘 사랑은 TV 안에만 있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런 각박함의 뿌리를 이기주의와 배금주의에서 찾았다. 돈이 다른 모든 가치의 꼭대기에 서면서 이상한 일들이 당연한 것처럼 벌어지게 됐다는 것. 예컨대 연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이사할 때는 사람의 편리함보다 얼마의 돈을 남길까를 고려한다.
“언제부턴가 모두 물질과 성공의 노예가 됐어요. 그것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경쟁에 몰두하지요. 하지만 ‘왜 경쟁하는가’에 대해 반문할 필요가 있어요. 성공을 위해서라는데, 성공이라는 개념도 여러 측면에서 해석되니까요. 흔히들 말하는 빨리 출세하는 의미의 성공하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해요. 1백 명 중 98명은 다른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주관이 없으니 의미 없는 가치를 좇으며 불행해하는 것이지요.
현대인은 일의 기계처럼 보여요. 아침형 인간이 붐을 이뤘는데, 그건 늦는 사람에 대한 차별이에요. 사람을 지배할 때 가장 먼저 쓰는 방법이 그의 시간을 각박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근면 자체는 소중한 덕목이지만 그게 이데올로기화돼서는 안 되지요. 근면으로 경쟁을 시키는 사회에서 근면은 이미 덕을 상실한 폭력일 뿐이니까요.”
그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한 국책 금융기관에서 홍보 일을 하던 중 1985년 ‘소’로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1988년 ‘낮달’로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됐다. 등단 후에도 직장생활을 하다가 1995년 전업작가로 선회했다. 몇 해 전부터는 문학 지망생을 상대로 소설을 가르치는데, 등단 전 10년간 응모와 낙방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무엇이든 가진 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어려울 때 나누면 그 가치가 두 배로 빛을 발해요. 모두들 위축돼 있을 때 따뜻한 말과 정을 건네며 마음을 나누세요. 분명 가족애, 동료애를 되살리는 기회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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