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따금 술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대체로 “순수한 애정 때문이죠” 하고 답하는데, 그러면 대개 질문을 건넨 상대는 개운치 못한 표정을 짓는다. 순수한 애정이란 본래 타인에게 간략하게 전달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그럴 때마다 나는 잠시 멜로드라마의 세계관이라도 빌려오고 싶은 기분이 든다. 철저한 멜로드라마의 세계관에 온몸을 담그고 다시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내 앞에는 순식간에 너른 바다가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발끝 언저리까지 다가왔다 멀어지는 파도와 마주 선 채 손나팔을 만든 뒤 목 놓아 외칠 것이다.
“좋아하니까!”
다음 순간에는 좋아하는 데 다른 이유는 필요 없는 거 아니냐고 혼잣말하며 모래사장 위에 털썩 주저앉아 굵은 눈물을 방울방울 떨굴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세계에서 매번 이토록 요란한 반응을 선보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차분히 마음을 다잡고 그간 가졌던 술자리 중에 마음에 남아 있는 장면을 떠올려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추려본다. 추억 속 순간순간을 곰곰이 더듬어보았더니 공통점의 윤곽이 잡힌다. 그것은 바로 술이라는 것이 엇비슷한 매일의 삶 속에서 무언가를 이끌어내고, 새로 보게 하는 제법 효과적인 ‘계기’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올봄의 일이다. 나는 올해 들어 첫 캠핑을 준비하면서 아이스박스 안에 지인에게 선물받은 냉이술을 소중하게 챙겨 넣었다. 뿐만 아니라 약주 전용의 둥글고 낮은 잔도 따로 가져갔다. 내가 평소에도 그토록 준비성이 있는가 하면 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나는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이라 언제든 두 손을 털고 포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또한 평소에는 캠핑장에서 실컷 멍 때리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게다가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끼리 짐을 나를 일도 까마득하므로) 먹고 마실 재료의 준비를 최소로 하자고 주변을 설득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 돋은 잔디 위에서 봄을 알리는 냉이 향을 머금은 술을 음미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내게서 부지런함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하던 냉이술을 마신 뒤의 고양감은 여름과 가을의 캠핑을 약속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누군가의 의외성을 발견하는 계기를 주는 것으로써 타율이 좋은 게 술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마냥 밝은 줄 알았던 지인의 유년에 어떠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는지, 모두에게 부러움을 살 만한 스펙을 쌓고 일과 양육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처럼 보이는 친구의 내면을 가로지르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지, 명절에만 뵈었던 큰외삼촌이 학창 시절부터 고이 간직했던 꿈은 어떤 것이었는지 하는 이야기들을 나는 모두 술잔을 앞에 두고 들었다. 특히 막역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관계에서, 또한 어느 정도 세대 차를 가지고 있는 관계일수록 그러한 의외성과 마주하는 순간은 귀하다. 바로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내밀한 사연을 영영 전해 듣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무척 독특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몇몇 첨단 플랫폼을 활용하는 데 능하기만 하면 대륙을 넘나들며 안부를 전하고 소통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혈육이라고 분류되는 이들과 얼굴을 마주할 때도 고작 스몰 토크로 시간을 때우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한 잔의 술이 그 데면데면하고 꺼끌꺼끌한 순간을 단숨에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멜로드라마의 세계관을 빌려오는 수고에 비하면 얼마나 손쉬운 방법인지 모른다. 그리하여 눈앞에 놓인 빈 잔을 채울 때, 내 마음은 다시금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른다.
은모든
망원동 다양한 술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애주가들의 각양각색 진솔한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린 ‘애주가의 결심’으로 2018 한경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돼 등단했다. ‘술희’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자타 공인의 애주가인 소설 속 주인공만큼이나 술을 사랑한다.
기획 김명희 기자 사진 셔터스톡 디자인 김영화
“좋아하니까!”
다음 순간에는 좋아하는 데 다른 이유는 필요 없는 거 아니냐고 혼잣말하며 모래사장 위에 털썩 주저앉아 굵은 눈물을 방울방울 떨굴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세계에서 매번 이토록 요란한 반응을 선보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차분히 마음을 다잡고 그간 가졌던 술자리 중에 마음에 남아 있는 장면을 떠올려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추려본다. 추억 속 순간순간을 곰곰이 더듬어보았더니 공통점의 윤곽이 잡힌다. 그것은 바로 술이라는 것이 엇비슷한 매일의 삶 속에서 무언가를 이끌어내고, 새로 보게 하는 제법 효과적인 ‘계기’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올봄의 일이다. 나는 올해 들어 첫 캠핑을 준비하면서 아이스박스 안에 지인에게 선물받은 냉이술을 소중하게 챙겨 넣었다. 뿐만 아니라 약주 전용의 둥글고 낮은 잔도 따로 가져갔다. 내가 평소에도 그토록 준비성이 있는가 하면 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나는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이라 언제든 두 손을 털고 포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또한 평소에는 캠핑장에서 실컷 멍 때리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게다가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끼리 짐을 나를 일도 까마득하므로) 먹고 마실 재료의 준비를 최소로 하자고 주변을 설득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 돋은 잔디 위에서 봄을 알리는 냉이 향을 머금은 술을 음미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내게서 부지런함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하던 냉이술을 마신 뒤의 고양감은 여름과 가을의 캠핑을 약속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누군가의 의외성을 발견하는 계기를 주는 것으로써 타율이 좋은 게 술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마냥 밝은 줄 알았던 지인의 유년에 어떠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는지, 모두에게 부러움을 살 만한 스펙을 쌓고 일과 양육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처럼 보이는 친구의 내면을 가로지르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지, 명절에만 뵈었던 큰외삼촌이 학창 시절부터 고이 간직했던 꿈은 어떤 것이었는지 하는 이야기들을 나는 모두 술잔을 앞에 두고 들었다. 특히 막역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관계에서, 또한 어느 정도 세대 차를 가지고 있는 관계일수록 그러한 의외성과 마주하는 순간은 귀하다. 바로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내밀한 사연을 영영 전해 듣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무척 독특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몇몇 첨단 플랫폼을 활용하는 데 능하기만 하면 대륙을 넘나들며 안부를 전하고 소통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혈육이라고 분류되는 이들과 얼굴을 마주할 때도 고작 스몰 토크로 시간을 때우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한 잔의 술이 그 데면데면하고 꺼끌꺼끌한 순간을 단숨에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멜로드라마의 세계관을 빌려오는 수고에 비하면 얼마나 손쉬운 방법인지 모른다. 그리하여 눈앞에 놓인 빈 잔을 채울 때, 내 마음은 다시금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른다.
은모든
망원동 다양한 술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애주가들의 각양각색 진솔한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린 ‘애주가의 결심’으로 2018 한경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돼 등단했다. ‘술희’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자타 공인의 애주가인 소설 속 주인공만큼이나 술을 사랑한다.
기획 김명희 기자 사진 셔터스톡 디자인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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