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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소녀의 상처와 치유과정 담은 소설 펴낸 작가 김형경

글·김수정 기자/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8.07.17 18:18:00

작가 김형경이 3년 만에 장편소설을 펴냈다. 부모 잃은 슬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춘기 소녀의 삶을 그린 소설 ‘꽃피는 고래’를 통해 “슬픔을 충분히 겪고 나면 강해진다”고 말하고 싶었다는 그를 만났다.
사춘기 소녀의 상처와 치유과정 담은 소설 펴낸 작가 김형경


올해는 작가 김형경씨(48)가 장편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로 ‘국내 최초 1억원 고료 작가’가 된 지 15년째 되는 해다. 그동안 소설 ‘세월’‘성에’ 등과 에세이집 ‘천개의 공감’‘사람풍경’까지 많은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그가 최근 부모를 잃고 상실감에 빠진 열일곱 살 소녀가 주변 인물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슬픔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 ‘꽃피는 고래’를 들고 돌아왔다.
지난 6월 중순, 비 오는 서울 홍대 앞 북카페에서 김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하기 전 기자의 질문지를 살펴보던 그가 테이블에 종이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기자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했다.
“사람들과 조건 없이 만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선후배들, 죽마고우는 물론이고 낯선 사람과도 교감을 나누죠. 잡지기자로 8년간 일하면서 많은 취재원을 만났고, 우연한 기회에 한 신문에서 심리상담 코너를 맡아 독자들의 고민을 읽고 카운슬링을 했는데,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레 경험이 생기고 사람 보는 눈을 갖게 되더라고요. 심리상담가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적인 치료를 할 수는 없지만, 제 작품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치유되면 좋겠어요.”
‘꽃피는 고래’는 열일곱 살 니은이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서 어마어마한 상실을 겪은 니은이는 아빠의 고향 처용포로 무작정 떠나고, 그곳에서 포경금지령 때문에 ‘신화처럼 숨 쉬는 고래’를 더 이상 잡지 못하면서도 고래잡이배를 손질하는 장포수 할아버지와 평생토록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슬픔을 일기쓰기를 통해 극복하는 왕고래(고기)집 할머니를 만난다. 국내 유일의 고래잡이 항구가 있던 처용포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선 뒤 삶의 터전을 잃은 장포수 할아버지, 왕고래집 할머니와 지내면서 니은이는 상실에 대처하는 법을 점차 깨닫는다.
“처용포 주민들의 상실감은 제 경험에서 우러나왔어요. 어릴 적 고향인 강원도 강릉에 살 때 바다로 흘러드는 남대천에서 머리를 감고 물놀이를 했는데, 7~8년이 지난 후 그곳에 다시 가보니 거품이 끓고 악취가 나는 하천으로 변해 있더라고요. 그때의 상실감을 잊을 수가 없어요. 10여 년 전 이 모티프로 환경소설을 쓰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얘기하고 싶어서 가슴속에 묵혀뒀고,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취재에 나섰어요. 공업화로 변해버린 항구를 찾다가 울산 장생포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한 할아버지에게 ‘꽃피는 고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뒤 ‘고래’ ‘신화’ ‘상실’을 한데 묶어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고래에 대한 환상을 가진 것도 소설을 쓰는 계기가 됐다.
“고래라는 단어에서 아득한 꿈과 환상이 느껴졌어요. 최인호 작가가 가사를 쓴 ‘고래사냥’이라는 노래를 무척 좋아해 소설에 일부러 넣기도 했죠.”
‘꽃피는 고래’의 ‘꽃피는’은 작살에 급소를 정확하게 맞은 고래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숨을 내쉴 때 함께 뿜어져 나오는 핏빛 물줄기를 의미한다. 이는 죽음, 즉 상실에 대처하는 고래의 마지막 포효인데 이 포효는 강한 생명력과도 교묘하게 맞닿아 있다.
그에게 “집필하는 동안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이었냐”고 물으니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열일곱 살 소녀의 말투를 쓰는 것”이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조금만 방심하면 중년여자의 말투가 툭툭 튀어나왔어요. 그러다가 ‘나는 열일곱 살 때 무엇을 했을까’ 고민했고,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던 때를 기억해냈어요. 처음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때 어른이 됐다는 설렘과 어른이 된다는 불안감이 공존했거든요. 소설을 쓰면서 그 복잡 미묘한 느낌을 계속 상기시켰죠. 생각해보면 열일곱 살 때 저는 꽤 문제아였어요. 엄격한 학교 규율에 대한 반항심이 심했죠. 니은이처럼 무단결석을 할 용기는 없었지만 소풍이 끝나면 선생님 몰래 친구들과 함께 극장에 가 영화를 봤고, 그 때문에 일주일 동안 반성문을 쓰기도 했어요.”
니은이의 멘토(mentor)가 장포수 할아버지와 왕고래집 할머니인 것처럼, 김씨도 외조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한다. 실제 두 인물은 그의 외조부모로부터 따온 것이라고.
“장포수 할아버지는 어부지만 투박하지 않고, 왕고래집 할머니는 귀여운 면이 있어요. 저희 외할아버지가 꼭 선비 같았어요. 젊은 시절 항일운동에 참여한 열혈청년이었다지만 제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책을 읽거나 유유자적하게 낚시하는 모습이죠. 외할머니는 많은 자식을 낳고 길렀지만 억척스럽기보다는 예쁘고 귀여웠어요. 외국에 있는 손자를 만나겠다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 영어공부를 시작하셨는데 누가 나타나면 부끄러워하시며 얼른 영어책을 장롱 밑으로 숨기곤 했죠. 늦은 나이에 학교에 들어가 일기쓰기 숙제를 꼬박꼬박하는 왕고래집 할머니의 열정과 닮아 있어요.”

사춘기 소녀의 상처와 치유과정 담은 소설 펴낸 작가 김형경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기 때문에 외로울 틈 없어
그의 작품 중에는 열두 살 소녀가 여자가 되기까지 받은 상처와 고통을 담은 ‘세월’, 이혼의 상처를 가진 여자와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또 다른 여자의 삶을 그린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폐쇄된 공간에 갇힌 남녀의 심리 변화를 담은 ‘성에’ 등 ‘세상과 관계 맺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는 ‘꽃피는 고래’를 통해 “분노와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고 받아들이면 이전보다 강해진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다”고 했다.
“상실은 소중한 것을 잃는 거예요. 이때의 ‘소중한 것’은 내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죠. 이를테면 부모를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피붙이를 잃는 게 아니라 딸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받는다면 단순히 직업을 잃는 게 아니라 자신을 형성했던 노동자로서의 삶 일부를 잃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것을 상실했을 때 분노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모르더라고요. 잃어버린 것을 잊고, 다시 새로운 것과 관계를 맺으면서 정체성을 찾을 때 비로소 극복했다고,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는 이런 시선 때문에 ‘따뜻한 공감과 위로의 작가’로도 불린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공감과 위로를 가진 건 아니라고 한다. 그는 “목표를 향해 무조건 전력질주를 한 적도 있고 인생의 바닥을 치는 경험도 했으며 극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고 말한다. 심리치료분야의 전문가 수준에 이른 건 자신의 고통을 치유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때 1백회 이상의 정신분석 상담을 받았던 그는 요즘 문학서적은 물론이고 정신분석·심리학, 사주·명리학 서적, 불경까지 읽는다고 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새로운 공간과 만나는 것도 좋아해 집을 팔아 무작정 세계 여행을 떠난 적도 있다고 한다. 하루 평균 2시간 이상 1만보 걷기 운동을 하는 그에게는 다양한 종류의 신발이 있는데, 구두와 운동화는 물론이고 절에 갈 때 신는 하얀 고무신, 등산화, 야외용 러닝화, 실내 러닝머신용 러닝화, 라틴댄스를 배울 때 신는 라틴슈즈도 있다고. 또한 그는 트로트부터 클래식, 블루스, 최신 히트곡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겨듣는다고 한다.
그동안 발표된 소설에서 종종 대담한 성적 묘사를 드러냈지만 정작 그는 아직 독신이다. 경기도 일산에서 수년간 홀로 살아온 그는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새로운 것과 관계 맺기를 하기 때문에 지루하거나 외로울 틈이 없다”고 말한다.
“엄마는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는지 ‘언제 시집갈래?’ 하고 물으세요(웃음). 물론 사랑이라는 새로운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도 좋지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예전에는 결혼을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지금은 물 흐르는 듯이 그냥 내버려둬요. 혼자 산다고 해서 외롭고 가족과 산다고 해서 덜 외로운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는 “글쓰기와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루에 몇 시간씩, 몇 쪽씩 쓰겠다는 계획은 없지만 한번 쓰기 시작하면 몇 개월 동안 꼼짝 않고 글쓰기에만 몰두한다고.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해서 꼭 계획대로 진행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10년 전에 구상한 ‘꽃피는 고래’가 계획대로 써지지 않다가 지난해 불현듯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처럼 말이죠(웃음). 저는 아직도 사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이만큼 살면서 터득한 게 있다면 어떤 실수를 하든 어떤 시행착오를 겪든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게 낫다는 거예요. 앞으로의 삶도 실수와 시행착오의 연속이겠지만 그로 인해 저 자신이 좀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지금까지 정신분석학에 기반한 소설 세 편과 에세이 두 편을 완성한 그는 에세이 한 권을 더 펴내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생각이라고 한다.
“다음 소설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선비가 될 것 같아요. 과거 선비들은 모든 학문을 총체적으로 배우면서 세상을 살아갔는데, 그에 비해 요즘 우리사회는 전문화·분업화만 외치는 것 같아 아쉬워요. 우주와 대지와 인간을 총체적으로 관조하는 사람을 그려보고 싶어요.”

여성동아 2008년 7월 5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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