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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의미있는 도전

서재필 소재 역사소설 펴낸 기자 고승철

기획·김명희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8.06.23 11:09:00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두려워하기 마련. 하지만 지천명의 나이에 기자에서 작가로 변신한 이가 있어 눈길을 끈다.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를 만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야기를 들었다.
서재필 소재 역사소설 펴낸 기자 고승철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죠. 쉰 살이 넘어서야 천명을 알았습니다.”
지난 2006년 한국전자출판협회가 공모한 제1회 디지털 작가상 역사·팩션 소설 부문에 당선되면서 작가란 직함을 하나 더 얻은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54). 지난 5월 초 당선작 ‘푸른 꿈을 꾸다’를 일부 개작, 장편소설 ‘서재필 광야에 서다’를 펴낸 그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1층 ‘서재필룸’에서 만났다. 이곳은 광복 이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곳으로,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공간이다.
고유(高惟)라는 필명의 작가로 변신을 꾀한 이유를 묻자 그는 “주니어 기자 시절부터 신문에 짧은 기사를 쓰는 게 답답했다. 심층보도나 탐사보도 같이 호흡이 긴 글을 쓰는 게 취향에 맞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89년 조순 경제부총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학자와 부총리’를 시작으로 올 초 한국의 저널리스트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고승철-밥과 글’까지 몇 권의 책을 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모두 기자활동의 연장선상이었기에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소설을 쓰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딱딱한 경제기사를 부드럽게 쓰는 법을 익히기 위해 소설을 즐겨 읽기만 하던” 그가 소설 집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지난 200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 관한 자료를 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고려대 대학원에서 한국 언론사를 공부하다 서재필 선생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알게 됐어요. 서재필 하면 대부분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독립신문’을 창간한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그분의 삶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언론인이자 의사, 혁명가, 군인, 연설가, 스포츠맨, 기업인, 독립투사이기도 했어요. 쿠바섬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이 전쟁을 벌일 때 쿠바에 가 종군 의무관으로 활약하기도 했죠. 짧은 일생에서 한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싶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 남긴 족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점이 아쉬웠고요. 그래서 그분의 생애를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안 쓰면 영영 묻혀버릴 것 같은, 어떤 사명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웃음).”
그런데 막상 펜을 잡자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25년 넘게 기사를 써왔지만, 소설은 기사를 쓰는 것과는 또 달랐다. 소설 작법에 관한 책을 구해 독파하면서 플롯 등과 같은 소설 기법을 익혔다. 아울러 집필실을 마련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소설을 썼다고 한다. 기사를 쓰던 이가 갑자기 소설을 쓴다고 하면 생뚱맞게 여길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는 것.
“일과를 마친 뒤 심야와 새벽 시간, 주말 동안 집필에 몰입해 거의 3개월 만에 소설을 탈고했어요. 한번 시작하니까 마치 신이라도 들린 듯 술술 풀리더라고요. 저 스스로도 놀랐어요. 디지털 작가상에 응모를 하고 보니 다른 지원자들은 대부분 기성작가들이더군요. 그에 비해 전 소설을 처음 쓴데다, 그것도 단기간에 써서 수상은 기대도 못했는데 운이 좋았죠(웃음).”
지난해 12월 당선자 발표가 나자 그는 가족들과 몇몇 지인들에게만 수상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모두 깜짝 놀랐지만 단 한 사람, 그의 아내만은 수상 소식을 별로 반기지 않았다고. 남편이 기자직에만 전념하기를 바라는 아내는 지금도 여전히 그가 소설을 쓰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엉터리 기사 보고 기자 되기로 결심, 상상력으로 기록의 빈틈 메우는 게 소설의 매력
지난 81년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기자로서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아랍에미리트·요르단·이집트를 돌며 중동사태를 취재했고, 그해 10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에 있었다. 91년 걸프전이 발발하자 이스라엘에서 전황을 취재했고, 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는 수행 취재를 했다. 기자가 된 동기에 대해 묻자, 그는 엉뚱하게도 “복싱 때문”이라며 웃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인 70년대 초엔 복싱이 최고 인기 스포츠였죠. 그래서 대학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와서는 문화체육관이나 장충체육관 등으로 복싱 경기를 자주 보러 다녔어요. 그때마다 ‘기자석’이라 써놓은 링사이드의 좋은 자리는 거의 텅 비어 있었어요. 그런데도 신기하게 신문을 보면 복싱 기사가 보도되더라고요.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기사에 오류가 많았어요. 대전 결과만 보고 적당히 쓴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더군요. 참다 못해 경기장에 수첩을 들고 가 메모를 하고, 그것을 글로 써서 독자 투고 형식으로 신문과 잡지에 보냈어요. 제 얼굴 사진과 함께 글이 실리기 시작했고, 원고지에 쓴 글이 활자화될 때마다 짜릿한 쾌감을 느꼈죠.”

서재필 소재 역사소설 펴낸 기자 고승철

서재필을 주인공으로 첫 소설을 펴낸 고승철 작가는 사실에 기반을 둔 작품을 쓰고 싶다고 한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유학과 대학원 진학, 취업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보자’는 생각에 기자를 택했다고 한다. 아마추어 기고가 체험에서 느낀 문제의식을 복싱 이외의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당시는 부정확한 정보, 비뚤어진 시각을 제공하는 일부 기존 언론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는 혈기로 가득 차 있었죠. 지금 돌아보면 기자생활을 하면서 ‘불의를 좌시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 필봉을 휘두른다’는 춘추필법을 제대로 실천하진 못한 것 같아요. 굳이 변명하자면, 그런 상황에 부딪힐 기회가 흔하지 않았죠. 하지만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해괴한 유혹에 빠지지 않겠다’는 처음의 다짐은 거의 실천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다양한 인물들과 접촉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관찰력을 다듬을 수 있었던 점, 특파원 근무를 포함해 여러 차례 해외 취재로 바깥세상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었던 점은 기자로서 얻은 행운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을 쓰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작가의 매력이 무엇이냐 묻자 그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한다.
“저널리스트는 항상 취재원이 중심이 돼야 하잖아요. 취재원이 항성이면 기자는 행성이고, 취재원이 발전기라면 저희는 송전기라고 할 수 있어요. 취재원이 말한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것,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 기자들의 사명이자 동시에 한계죠. 그런데 작가는 새로운 걸 창조할 수 있잖아요. 소설을 쓰는 동안은 제가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이 되는 거죠. 소설 속에선 제가 인물을 창조하고 질서를 창조하고,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또 하나, 기자는 정년이 있는 데 반해 작가는 정년이 없다는 것도 매력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가능한 한 “오래도록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고전 많이 읽고 생각을 글로 쉽게 표현하는 능력 키우는 게 좋은 글쓰기의 비결”
서재필 소재 역사소설 펴낸 기자 고승철

“아직 우리 아이들은 제 소설을 읽지 않은 것 같아요. 읽지 않는 게 오히려 속 편하죠.”
그는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작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이 쑥스러운 듯 약간 얼굴을 붉혔다. 그는 슬하에 남매를 두고 있는데 아들은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고, 딸은 호주 멜버른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다.
“언젠가 집사람이 벤처기업인으로서 한 대학에 특강을 갔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누군가가 아이들이 어느 학교 다니는지 묻더랍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느 학교에, 딸은 어느 학교에 다닌다고 했더니 수강생들이 기업 경영보다는 자녀교육 비결을 가르쳐달라고 하는 바람에 민망했다고 합니다(웃음).”
그는 종종 사람들이 자녀교육법에 대해 물어보면 난감하다고 한다.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나마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주말마다 온 가족이 모여 독서하는 시간을 가진 것 정도라고.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끝이 없어요. 저는 특히 고전을 읽으라고 하죠. 해외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파리에서 3년 반 정도, 인디애나대학에서 연수를 받느라 미국에서 1년여 지낸 적이 있어요. 그때 느낀 건데, 선진국의 힘은 고전 읽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더라고요. 미국에서 명문대 지망생들은 고전 원전을 적어도 수십 권은 읽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입학지원서에서 얕은 사고력이 금세 들통나니까요. 프랑스에서도 겉핥기식 독서만 한 학생은 대학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얻기 어렵죠. 그래서 루소의 ‘사회계약론’ 같은 고전을 탐독하는 고교생이 흔해요.”
요즘 우리나라 대학입시가 사고력과 글쓰기 능력을 요하는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는데 그는 이것이야말로 좋은 징조라고 말한다. 그런 능력은 족집게 과외로 하루아침에 익힐 수 없으며 꾸준한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꾸준히 읽고 깊이 생각하고, 또한 거기에서 그치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해요.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글쓰기의 기본은 ‘정확한 소통’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쉽게 표현하는 능력도 키워야 하고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기자 출신 작가 이병주와 헤밍웨이를 모델로 삼아 사실에 기반을 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여성동아 2008년 6월 5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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