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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긍정의 힘

흐르는 강물처럼

글·이원규‘시인’

2008. 06. 12

아주 오래전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할리우드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보다는 아름다운 강물 위로 플라이 낚시를 던지는 포스터가 아름다워 바쁜 길을 가다 말고 극장으로 들어갔지요.
아버지와 아들 형제 사이의 사랑이 잘 그려진 이 영화의 내용은 그리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포스터의 선명한 이미지만은 가슴 한구석에 짠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 또한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나라의 5대 강인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 그리고 우리 집 앞 섬진강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내 몸 또한 강물이 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맑으면 맑은 대로, 탁하면 탁한 대로 강물과 한몸이 돼 흘러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은 흐르는 강물처럼 어제의 내일이자 내일의 어제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며, 전생과 현생과 내생의 삼세이지요. 살아 있음의 징표인 들숨 날숨의 한순간에 다시 강물이 흐르고, 한 하늘이 열리고, 꽃망울이 터집니다.
그리하여 옛 어른들은 덕담을 하더라도 언제나 현재완료형으로 했다지요. 내일의 일을 미리 짐작해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에게는 “아이구, 득남득녀를 축하하네”라 하거나, 혼기가 된 미혼의 선남선녀들에게는 “그래, 결혼을 축하하네”라고 미리 기정사실화했습니다. 말하자면 시간 초월의 덕담과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유장하게 새 날을 맞이하는 것이지요. 삶은 이렇게 단절이 아니라 강물처럼 유장하게 흐르는 것이며, 문득 아름다운 미래를 내다보는 주문 같은 덕담 한마디에 우리의 생은 어느새 매실주 한 잔을 마신 듯 입속에 자꾸 침이 고이게 되는 것이 아닌지요?
그리하여 우리 몸의 7할 이상을 차지하는 물의 이름은 물입니다.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물, 물, 물- 소리 내어 말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느새 우리 입은 물고기의 입을 닮아버리니까요. 입술이 조금 삐죽이 나오면서도 둥글게 오므려지는 것이 꼭 물을 마시는 물고기, 섬진강 참붕어나 언제나 키스하는 열대어 키싱구라미의 입과 모양이 같아집니다.
그리하여 물, 물, 물, 하고 나지막이 소리를 내보는 사람은 누구나 착한 물고기가 되지요.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이렇게 물을 주문처럼 외면 한결 마음이 착 가라앉습니다. 맑고도 깊은 강물 속처럼 말이지요.

시간과 장소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이야기를 품고 시원으로 돌아가는 ‘물’의 힘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 ‘피아산방’은 온통 물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당 바로 앞으로 흐르는 아주 작은 계곡물은 밤낮 없이 흥얼거리며 섬진강으로 갑니다. 또 마당가 떡바위 위에 만들어놓은 아주 작은 폭포는 절구통으로 떨어지며 장단을 맞춥니다.
제가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을 때, 잠을 자거나 외출했을 때도 서로 어깨를 걸고 노래를 부르며 하염없이 흘러갑니다. 행여 비라도 오면 빗소리와 함께 삼중창의 화음을 이루지요. 처음엔 빗소리와 폭포 소리, 계곡물 소리를 구분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오래 만나다 보면 쌍둥이 친구의 얼굴을 구분해내듯이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 집 앞에서 흐르는 계곡물과 함께 물의 여행을 시작해볼까요. 지리산의 한 봉우리인 왕시루봉 아래서 출발한 물의 기나긴 여행은 이미 신갈나무와 원추리꽃을 스쳐지나 우리 집 뒷산의 소나무와 밤나무 등 온갖 식물과 바위들을 스쳐 마당 앞에 도착합니다. 한 줌 떠서 마셔보면 수많은 꽃과 약초 뿌리의 향기가 나지요. 이 계곡물은 내가 일용할 양식의 몸을 조금 나눠주고 다시 흘러갑니다. 물끼리 어울려 다정히 흐르다가 바위를 만나면 어깨를 비켜 바위 모양의 물길을 만들며 돌아서 흘러가지요. 그때 물은 잠시 바위와의 인연을 노래합니다. 무뚝뚝한 바위의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이별의 노래를 부르지요. “청태 자욱한 바위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이라고 말입니다.
귀 기울여 들어보면 마침내 온몸으로 흘러가는 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버들치와 쉬리, 그리고 다슬기를 만나면 마치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주듯이 자신의 몸을 먹을 만큼 내어주고 다시 흘러갑니다. 피아골 연곡사에서 달려온 친구들과 어울려 얼싸안고 한바탕 춤을 추다가 그곳에서 등산객을 만나면 그들의 몸을 어루만져 식혀주고, 행여 그들이 오물을 버리면 그것까지 온몸으로 껴안아 금방 깨끗하게 정화시키며 흘러갑니다.

착한 농부들의 발길을 따라가 벼이삭을 피워주고, 논에서 나오는 길에 잠시 마주친 개구리의 커다란 두 눈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기도 하지요. 그때 개구리의 눈에 비친 물은 하늘의 구름이기도 하고 잘 익은 벼이삭이거나 푸른 산의 모습입니다.
투명한 물의 모습은 이처럼 변화무쌍합니다. 자신의 몸을 내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흐르다가 만나는 모든 것을 거울처럼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이따금 강물을 들여다보면 물이 보이는 게 아니라 푸른 산이나 미루나무가 보이고, 강 건너 마을의 불빛과 달님 별님이 보이는 것이지요.
물론 조심 조심 더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보면 물은 어느새 우리들의 얼굴이 됩니다. 내가 웃으면 물도 웃고, 내가 울면 물도 따라 웁니다. 그것이 바로 물의 마음이자 물의 사랑법이지요. 그렇게 흘러간 계곡물은 시냇물의 시절을 지나 강물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아름다운 섬진강 말입니다. 화개장터를 지나며 뱃사공의 몸을 물 위로 밀어올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은어, 눈치, 황어, 쏘가리들과 어울리며 얼마 전 타계하신 작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무딤이들 옆을 지나 하동리로 흘러갑니다.
사람들이 차를 몰고 한국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라는 19번 국도 혹은 861번 지방도인 섬진강 1백리 길을 순식간에 달리는 동안 강물은 아주 느리게, 그러나 만나는 강변의 모든 풍경을 온몸에 담으며 흘러갑니다.
이따금 백사장에서 낮잠을 자다가 섬진강의 명물 재첩에게 젖을 물리기도 하지요. 그렇게 남해에 다다른 강물은 어느새 바닷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새 이름은 새 세상을 만났다는 의미이지만 온몸에 소금물이 들어도 맨 처음 계곡물이었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만난 풀이며 나무며 바위며 버들치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는 곳을 달리하고 사는 방법이 달라져도 고향을 잊지 못하는 것과 같지요.
그리하여 물의 여행은 바다에서 완성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의 입구입니다. 첫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모든 사랑이 끝난 뒤에 다시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물도 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구름이 됩니다. 바람에 몸을 실어 맨 처음 흐르던 곳으로 날아가 마침내 수직하강을 합니다. 바닷물과 구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마침내 비의 이름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 먼 길을 떠나는 계곡물 소리를 듣습니다. 물의 사랑가를 들으며, 제가 만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저도 이제 물입니다.
더불어 물이 되어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 포스터의 주인공이 되어, 인생이라는 유장한 강물로 흘러갑니다. 그곳에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그대가 있고, 또한 내가 간절하게 기다리는 그대가 있습니다.
날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밥 먹었니?”도 아니요, “안녕하세요?”도 아니요, “하이!”도 아니요, “나마스떼!”도 아니요, 마침내 이렇게 “흐르는 강물처럼!”.

이원규씨는… 196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잡지사 기자로 일하다 한순간 모든 것을 버리고 지리산에 내려가 시인 겸 생태운동가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옛 애인의 집’‘돌아보면 그가 있다’, 산문집 ‘지리산 편지’ 등을 펴냈고 신동엽창작상, 평화인권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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