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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우체통’ 찾아 떠나는 여행

시간과 추억을 보관해주는 곳∼

기획·송화선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성종윤‘프리랜서’

입력 2008.03.11 16:19:00

경북 봉화군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편지 타임캡슐 ‘노란우체통’은 소중한 시간과 추억을 보관했다가 먼 훗날 꺼내 보여주는 곳이다. 편지를 진공 보관했다가 언제든 원하는 날짜에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는‘노란우체통’에 주부 오진영씨가 열한 살 아들과 함께 다녀왔다.
‘노란우체통’ 찾아 떠나는 여행

현대식 건물 앞에 서 있는 편지 타임캡슐 ‘노란우체통’에는 언젠가 주인에게 전달될 소중한 편지들이 보관돼 있다.


‘노란우체통’ 찾아 떠나는 여행

준성이의 손을 잡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한낮을 훨씬 넘겨 도착한 곳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노란우체통’. 방문객의 편지를 장기간 보관했다가 5년 후든 10년 후든 원하는 날짜에 보내주는 곳이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들어서면서 속도를 늦추기 시작한 차는 구불구불한 산길로 들어서며 더욱 느려졌다. ‘노란우체통’ 표지판을 발견한 뒤에도 언덕을 넘고 모퉁이 하나를 돌고 나서야 비로소 샛노란 우체통을 앞에 둔 현대식 디자인의 건물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인 전우명씨(45)는 먼 길을 물어물어 찾아오느라 수고한 것 다 안다는 듯 여러 말 묻지 않고 따뜻한 김이 오르는 커피부터 건넸다. 방 가운데 놓인 새까만 난로와 수북이 쌓인 장작으로 마음을 데우는 동안, 난로 위에선 큼직한 알밤 한 줌이 속살을 조금씩 드러내며 익어갔다.
탁자가 세 개뿐이라 여유롭게 느껴지는 스무 평 남짓한 공간에서는 마침 먼저 도착한 젊은 부부 한 쌍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 다섯 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 딸을 데려온 이들은 각각 테이블을 하나씩 잡고 떨어져 앉아 열심히 무엇인가를 적어내려가는 듯 보였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보여주지 않고 꽁꽁 숨겨뒀다가 먼 훗날 전하려고 하는 편지 내용은 무엇일까. 벽 한 면을 큼직하게 채운 창 너머로 두 눈 가득 들어오는 겨울산의 풍경과 평화롭게 실내를 채우는 오후 햇살을 즐기며, 아마 저들이 남기는 글은 오늘 이 시간과 더불어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곱고 예쁜 마음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노란우체통’이 있는 곳은 큰맘 먹지 않고는 찾기 힘들 만한 산골 오지. 그래서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181번지’로 편지를 보낸 뒤 인터넷 홈페이지(http://yellowpost.co.kr)에 접수하면 편지를 보관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날의 젊은 부부처럼 숲 속의 작은 집까지 직접 찾아와 청정한 자연에 둘러싸인 채 편지를 쓰고 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노란우체통’ 한쪽 벽면에는 그동안 이곳을 찾은 이들이 짤막한 소감을 적어놓은 색색의 메모지가 가득 붙어 있었다.
대구에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전씨 부부가 ‘노란우체통’을 연 것은 지난 2006년. 평생 긴 호흡을 갖고 아름다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여러 해 동안 구상한 끝에 시작한 일이라고 한다. ‘먼 길을 힘들게 찾아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소중하게 보관됐다가 오는 편지’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인적 드문 장소를 찾는 데만 1년이 걸렸고, 마침내 발견한 이곳에 전씨가 직접 디자인한 건물을 세우는 데 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곳에서 편지를 맡아주는 시간은 최장 20년. 보관료는 처음 1년에 1만원이며, 해를 넘기면 한 해당 2천원씩 추가된다. ‘노란우체통’에 찾아든 날부터 ‘언젠가’를 기다리며 진공 보관되는 편지는 예정된 시간이 되면 작은 종이 상자에 포장돼 받는 이에게 등기우편으로 보내진다고 한다. 아직은 이 공간을 아는 이가 많지 않아 건물 앞에 지어놓은 노란색 타임캡슐 창고에는 편지를 기다리는 공간이 넉넉히 남아 있다.

‘노란우체통’ 찾아 떠나는 여행

청정한 자연에 둘러싸인 ‘노란우체통’ 실내 공간에서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오진영씨 모자. ‘노란우체통’에는 먼저 다녀간 이들이 짤막한 소감을 적어 남겨둔 색색의 메모지가 가득 붙어 있다.


‘노란우체통’ 찾아 떠나는 여행

오늘 쓴 편지를 원하는 날 원하는 곳으로 배달해주는 ‘마법우체통’
전씨는 ‘노란우체통’의 미래에 대해 “나무가 커가는 걸 기다리는 마음”이라고 답했다. 그는 ‘노란우체통’을 열면서 건물 앞 밭 2천 평에 일부러 1년차 묘목만 골라 라일락·국화·매화·벚꽃을 심었다고 한다. 나무가 자라는 시간을 사람의 힘으로 단축시킬 수 없듯, 노란우체통도 성장에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거쳐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일이다.
따뜻한 커피와 따뜻한 말들로 마음을 녹인 뒤 통유리창 너머로 따뜻하게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에 아들과 마주 앉았다. 서로에게 어느 먼 훗날 펼쳐볼 편지를 쓰려는 것이다. 아이는 처음 보는 펜과 잉크병이 신기하다며 열심히 편지지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저만한 나이였을 때 학교 앞 문구점에서 잉크를 사다 펜글씨를 쓰며 재미있어했지’ 하는, 뇌세포 어딘가에 묻혀 있던 오래전 기억이 부스럭 고개를 들었다.
오늘 쓰는 편지는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갈 해의 생일인 2016년 3월19일에 보내달라고 예약했다. 앞으로 8년 후, 우리가 엄마와 아들 사이가 돼 함께 산 지난 3년의 곱절이 넘는 시간이다.
한 번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재혼을 결심했을 때 딱 한 가지 원했던 조건은 자식 없는 남자였다. 내게 아이가 없으니 그리 과한 욕심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자식이 없는 남자가 내게까지 올 리 없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어린 남자아이의 엄마가 돼 세 끼 밥해 먹이고 책가방 챙겨 학교에 보내는 일상이 흘러가던 어느 날, 문득 알게 됐다. 내 손길이 닿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를 보살피는 지루하고 때로 싫증나는 이 시간들이 내 안에 있으면서도 미처 몰랐던 사랑과 인내를 끌어내 키워주고 있다는 것을.
“아들아, 네가 내게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은 자기 안의 사랑을 믿게 된 사람은 절대 불행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해준 것이란다”라고 편지에 적고 8년 후 개봉될 봉투에 넣어 풀로 봉했다.
“앞으로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잔인한 성장통을 앓다 보면 자신을 미워하는 날도 올 거야. 엄마도 그랬고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 엄마처럼 남보다 먼 길을 돌아도 괜찮으니 반드시 네 안의 사랑을 찾는 날이 있기를. 나무가 커가는 걸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라볼게.”
오늘 이 기도를 담아 봉화 산골짝에 고이 놓아둔 편지를 아들이 받아보는 그날에는, 젓가락같이 가는 어린 나무들만 서 있는 허허벌판인 저 창밖 노란우체통 마당도 아들처럼 키 크고 건강한 나무들로 우거져 무성할 것이다.
운영시간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방문 전 전화로 확인하는 게 좋다. 문의 054-673-8077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면으로 가다 신갈 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 원주·강릉 방향으로 직진.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 안동·대구 방향으로 진행하다 영주IC에서 36번 국도 봉화 방향으로 진입한다. 태백·울진 방향으로 가다 춘양·영월 방면으로 좌회전한 뒤 서벽·영월 표지판을 따라 15~20분쯤 더 가면 왼쪽으로 서벽송어양식장 표지판이 보인다. 그 앞에서 좌회전해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우회전한 뒤 서벽교회를 지나 300m 앞에서 좌회전하면 ‘노란우체통’이 나온다.

여성동아 2008년 3월 5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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