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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다시 웃어요∼

“우울증으로 한때 자살 생각했다” 고백한 코미디언 김영하

글·김수정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8. 01. 22

70~80년대 ‘따발총’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 김영하. 한동안 방송에서 모습을 볼 수 없던 그가 최근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생각하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놓았다.

“우울증으로 한때 자살 생각했다” 고백한 코미디언 김영하

70~80년대 자지러지는 웃음과 빠른 말솜씨로 ‘따발총’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인기를 누린 김영하(66). 지난 12월 중순, 등산복 차림에 두툼한 장갑을 낀 그를 서울 홍은동 백련산에서 만났을 때 그는 “집에서 산 중턱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왔다”며 숨을 몰아쉬었다.
“바깥공기가 많이 차갑지만 춥다고 집에만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오히려 병이 나요. 나이 들면 잘 쓰지 않는 관절이나 근육을 풀어주는 게 중요하거든요. 말하는 속도는 아직 그대로인데 몸 움직이는 속도는 갈수록 느려지네요.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등산객의 발을 멈추게 한다. 하지만 그가 웃음을 되찾은 지는 불과 얼마 전이라고 한다. 3년 전부터 우울증을 심하게 앓아 한동안 자살을 꿈꾸며 지냈다는 것.
“처음에는 우울증인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가족들이 무슨 말만 하면 눈물이 나고 입맛이 없어 음식을 삼키지 못하겠더라고요. 1주일 만에 4kg이 빠지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어요. 조금만 움직여도 구토가 나 죽을 것 같았죠.”
그는 처음에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긴 줄 알고 집 근처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하지만 담당 의사가 귀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며 정신과에 가볼 것을 권했고 그곳에서 “우울증 중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상담 후 약물치료를 시작했는데 기분이 붕 뜨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약을 끊으면 여전히 기분이 가라앉았어요. 그런 기분이 반복되고 약에 의지하는 때가 많아지면서 진짜 우울증에 걸려 있다는 걸 깨달았죠.”

활동 무대 좁아지고 폐경기 찾아오면서 우울증에 걸려
그가 우울증을 앓은 건 폐경기로 인한 자신감 상실과 더 이상 방송국에서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현실 등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50대가 되면서 일거리가 줄어들자 그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나는 왜 저 무대에 서지 못할까?” 하며 자괴감에 빠졌다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중년 배우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그렇지 않잖아요. ‘개그맨 선·후배들이 함께 코너를 만들어도 재밌을 텐데’ 라고 생각하니까 남들 다 웃을 때도 저 혼자 울고 있더라고요.”
“나는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자 살아갈 이유를 잃은 그는 결국 자살까지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가족 몰래 가장 먼 나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비행기 안에서 약을 먹고 죽을 생각을 한 것.
“실행에 옮기기 위해 유서를 쓰고 주변을 정리하는데 지난 60여 년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부모님을 잃고 전국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린 어린 시절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신인시절, 죽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까지…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지금 왜 죽어야 하지? 나한테는 집도 있고 가족도 있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죽으면 남편과 자식들은 얼마나 죄책감을 느낄까’ 하는 걱정도 들었죠.”

“우울증으로 한때 자살 생각했다” 고백한 코미디언 김영하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등산· 단전호흡·골프 등을 한다는 김영하.


그가 자살을 앞두고 남편과 자식을 떠올린 건 가족에 대한 남다른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2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6·25전쟁으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례로 잃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와 아홉 살 난 여동생마저 갑작스레 세상을 등졌고 오빠마저 “돈을 벌어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집을 나가자 그에게는 여섯 살배기 어린 남동생만이 남게 됐다고 한다. 그의 나이 열두 살 때 일이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피붙이인 동생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일거리를 찾아 헤맸죠. 남의 집 헛간에 짐을 풀고 일 동냥에 나섰는데 전쟁 직후라 열두 살짜리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콩밭을 매고 남의 집 아기를 돌보는 게 전부였어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끼니를 떼우기 힘들었죠.”
그는 결국 동생을 고아원에 보냈다. 끼니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학교 공부도 할 수 있기 때문인데, 고아원 사정이 어려워 그는 동생과 함께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아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동생은 매일 밤 고아원에서 맨발로 도망쳐 그에게 왔고 어르고 달래 데려다놓으면 다음날 또다시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결국 원장님의 배려로 저도 뒤늦게 고아원에 들어가게 됐어요. 하지만 그곳에서도 버려진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끼니조차 해결하기가 힘들어졌죠.”
하루라도 빨리 고아원에서 나오고 싶었던 그는 어느 날 ‘배우 모집’ 포스터를 보게 됐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주위의 말에 무작정 악극단을 찾아갔다고 한다. 극단 입단을 허락받은 그는 동생에게 “누나가 돈 많이 벌어오겠다. 올 때까지 기다려라”는 편지를 남긴 채 야반도주했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유랑극단 생활을 했다.
“허허벌판에 가설무대를 설치해놓고 사람들 불러 모으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배우가 되면 보수가 더 좋아진다는 말에 밤새 노래·춤 연습을 했죠. 때때로 악독한 악극단장을 만나 갖은 고생을 했지만 끝까지 참고 견뎠어요. 머릿속에는 온통 ‘돈 벌어서 동생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거든요.”
그러는 동안 그는 나이를 먹었고 극단에서도 인정받아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집을 나갔다 돌아온 오빠에게 유랑극단 생활을 들킨 그는 “딴따라가 될 거면 내 동생 할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오빠의 냉랭하고 모진 태도 앞에서 삶의 의욕이 꺾인 그는 약을 먹고 죽기로 결심했지만 약을 삼키기 직전 동생이 말려 자살을 포기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저는 씩씩한 겉모습 안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통을 감추고 산 게 아닌가 싶어요. 삶을 포기하고 모진 생을 끊어버리고 싶을 만큼 독했지만 가족이 있어 참을 수 있었던 거고요.”
오빠와 화해를 하고 악극단 무대에 다시 선 그는 스물일곱 되던 해 MBC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로 데뷔했다. 그즈음 여자로서도 행복한 순간을 맞이했다고 한다. 1970년 양쪽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식을 올린 것. 그는 “하객 없는 결혼식에 옹색한 신혼살림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이지만 너무나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가 방송일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었던 것도 남편 덕분이라고 한다. 두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남편이 밥을 먹이고 학교를 보내고 재우는 일까지 도맡아 해줬다는 것. 18년 전 아이들을 호주로 조기유학을 보낼 때도 남편이 동행했다고 한다.
“저는 이곳에서 방송일을 하니까 남편이 호주로 옮겨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사업이 잘 되면서 떨어져 사는 기간이 길어졌죠. 남편과 아이들은 호주로 오라고 하는데 제가 활동에 대한 미련 때문에 못가고 있어요.”
“가족이 그립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말로 해서 뭐하겠냐. 그래서 이번에는 2년 가까이 호주에 머물다가 지난 8월 귀국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요즘 바쁘게 산다고 한다. 우울증에 다시 걸리지 않기 위해 등산·단전호흡·골프 등을 하면서 되도록 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요즘도 가끔씩 눈앞이 캄캄해지거나 TV를 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릴 때가 있어요. 그래도 절대 약을 먹지는 않아요. 대신 간편한 복장에 빵과 음료수만 싸 가지고 밖에 나가 시장 구경, 사람 구경을 하다가 와요(웃음).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면 기쁨도 얻고 위로도 받거든요.”
“예전에는 방송출연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지역문화행사 무대나 사회복지시설에서 웃음 주고받는 걸로 만족한다”는 그는 “웃음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없는 것 같다”며 밝게 웃었다.
“아직도 저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어디를 가도 ‘따발총 김영하’라고 부르는 게 그저 기분 좋고 감사해요. 아주머니들이 저를 끌어안으면서 춤추고 노래하실 때는 흐뭇한 마음이 들고요. 그런 게 삶의 기쁨이고 행복인 것 같아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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