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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영화 같은 삶

영화배우 최은희 드라마틱 인생 고백

기획·송화선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7.12.24 17:18:00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파란만장한 자신의 인생사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신상옥 감독을 만나기 전 실패했던 첫 번째 결혼부터 신 감독과 함께한 두 번의 결혼, 강제 납북과 탈출, 그리고 6·25전쟁 당시 국군에게 당했던 겁탈까지, 여성으로서 떠올리기 싫은 아픈 기억을 고해성사하는 심정으로 밝힌다는 그를 만났다.
영화배우 최은희 드라마틱 인생 고백

“전에는 세월이 유수 같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폭포수 같아요. 요즘 들어 세월이 순간순간 폭포처럼 막 쏟아져 흐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60~70년대 우리 영화계의 최고 스타였던 배우 최은희씨(77).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대종상·청룡영화제·국산영화상·아시아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최고의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의 삶은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강제 납북과 탈출 등으로 뒤덮인 최씨의 삶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파란만장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는 지난해 그 거센 삶의 풍랑 속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운명적 사랑’ 신상옥 감독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신 감독이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 충격에 빠져 아무것도 못했어요. 내게 진실한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 나를 배우로서 존중하고 나의 날개를 소중하게 여긴 사람…. 그가 정말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었죠. 그를 떠올리며 끝없이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돌이켜보게 됐고, 더 늦기 전에 제 삶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제까지 말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털어내고 싶어요.”

매 맞는 아내였던 불행한 첫 번째 결혼과 전쟁 중 겪은 잊을 수 없는 상처
최씨의 이야기는 부부로서, 동료 영화인으로서 평생을 함께한 고 신상옥 감독과 처음 만났던 때로 이어졌다. 당시 그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고, 두 사람의 사랑은 ‘대한민국 간통죄 1호’라는 타이틀로 알려졌다. 최씨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사랑을 시작할 수밖에 없던 그때, 실은 자신이 ‘매 맞는 아내’로 살았던 불행한 첫 번째 결혼을 이미 끝낸 뒤였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전 열세 살에 극단에 들어가 연극을 하다 열일곱 살부터 영화를 찍었어요. 열여덟 살에 결혼한 첫 남편은 현장에서 만난 영화 촬영기사였죠. 저보다 열두 살 연상에 이혼해 아이도 둘 있는 사람이었어요. 영화배우로 막 이름을 얻던 때라 주위 사람 모두가 그 결혼에 반대했지만, 끈질기게 구애하는 그의 사랑을 막을 수가 없었죠.”
결혼할 때 그의 바람은 배우생활 그만두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사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활비를 벌어올 줄 모르는 남편 때문에 다시 연극을 시작했다고. 극단에서 받은 선금으로 방 한 칸, 마루 한 칸짜리 집을 마련해놓고 낮에는 영화 출연과 라디오 성우 일을 한 뒤 집에 돌아오면 살림을 하느라 쉴 새 없이 살아야 했다. 그런 그에게 남편은 오히려 손찌검을 하곤 했다고.
“남편에 대한 실망이 나날이 커졌지만, 연기가 있었기에 그 고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억눌린 감정이 폭발할 것 같을 때도 연기에 몰입하고 나면 평상심을 찾을 수 있었어요. 진득하게 내 일을 하면서 지내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심정으로 살았죠.”
그러나 결혼 뒤 2년 만에 6·25전쟁이 터지면서 그의 삶은 더 끔찍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서울이 사흘 만에 인민군에게 점령당하면서 최씨와 동료 배우들은 인민군의 경비대 협주단에 합류해 공연할 것을 강요받은 것이다. 그해 9월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이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며 ‘이제야 살았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인민군은 예술인들을 강제로 끌고 후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남 순천까지 갔을 때 폭격을 당해 대열이 흩어진 틈을 타 죽을 각오를 하고 도망쳤어요. 죽을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며 무조건 남쪽으로 걷고 또 걷다가 간신히 국군을 만났죠.”

영화배우 최은희 드라마틱 인생 고백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산 배우 최은희씨는 그를 둘러싼 갖가지 소문의 진실을 밝혔다.


국군만 만나면 무사히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그들이 군인을 위한 위문활동을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최씨는 목숨 걸고 도망쳐온 길을 다시 올라가며 부대를 따라 북상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군부대에서는 미국인 고문관을 접대한다는 명목으로 사흘이 멀다 하고 파티를 벌였고, 최씨와 이북 여배우 P씨를 자주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헌병대장이 제가 북한군에 부역한 문제를 조사하겠다며 따로 불러냈어요. ‘부역한 죄인은 이 자리에서 당장 총살시켜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고 협박하더니 저를 겁탈했죠…. 여성으로서 치욕스러운 일이지만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밝힙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요. 하지만 그때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군부대와 함께 다니다 그해 겨울 간신히 부모 곁으로 돌아갔을 때 그를 기다린 건 ‘그동안 고생했다’는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허망한 뜬소문들이었다고 한다. 이미 서울에서는 그가 전쟁통에 인민군 등에게 수도 없이 겁탈을 당했다는 헛소문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잔인한 소문에 침묵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평생 저를 따라다녔어요. 수십 년 뒤 미국으로 망명해 있을 때는 마치 사실인 것처럼 잡지에 실려서 저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죠. 심지어 제가 병든 남편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바람이 나서 도망쳤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하더군요.”
헛소문과 함께 최씨를 괴롭힌 것은 다시 만난 남편이었다. 전선에서 부상을 당한 뒤 폭력성이 한층 심해진 남편은 부산으로 함께 피란 가 있을 때는 목발로 최씨의 얼굴을 때려 눈꺼풀 위에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 상처는 이후 수십년 동안 분장을 할 때마다 그를 애먹였다고. 몇 번이나 그만 살겠다며 보따리를 쌌지만, 몸도 성치 않은 남편이 ‘한 번만 용서해달라’며 매달리는 것에 마음이 약해져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최씨가 처음 신상옥 감독을 만난 건 이런 생활이 반복되던 53년 부산에서였다. 전쟁이 끝나 서울로 돌아오기 전 그곳에서 신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최씨는 아직도 중국집에서 신 감독과 마주 앉아 자장면을 먹었던 첫 만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평생의 희로애락을 함께할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저 ‘의욕 넘치는 젊은 영화감독이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고 한다.
“‘코리아’를 찍은 후부터 신 감독은 제가 하는 공연을 꼭 보러 왔어요. 한번은 대구에서 ‘야화’라는 연극을 하다 가정문제로 심신이 쇠약해진 탓에 공연 도중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는데, 그때 저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 사람이 신 감독이었죠.”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는 점점 가까워졌고, 어느 날 신 감독의 입에서 ‘함께 영화를 해보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자석에 이끌리듯 서로에게 빠져들던 그 무렵, 이미 헤어지고 같이 살지 않던 최씨의 남편이 간통죄로 두 사람을 고소해 언론에 두 사람 사이가 공개됐다고 한다. 최씨는 전쟁 부상자인 남편을 버리고 젊은 남자에게 간 몹쓸 여자가 됐고, 신 감독은 불행한 처지에 있는 영화계 선배의 부인을 빼앗은 파렴치한 인간 취급을 받았다.
“그 일로 검찰의 출두 명령을 받고 검찰청까지 갔죠. 하지만 애초에 성립되지도 않는 사건이라는 사실만 알게 됐어요. 남편이 결혼 뒤 귀찮다며 차일피일 미루던 혼인신고를 그때까지도 하지 않은 상태였던 거예요.”
54년 3월, 마침내 최씨와 신 감독은 벽에 온통 빈대 핏줄기가 얼룩진 허름한 여인숙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날 밤 얼마나 물렸는지 둘 다 성한 곳이 없었지만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환하게 웃을 수 있었어요. 우리는 평생을 두고 그날 일을 웃으면서 추억하곤 했죠.”

그렇게 부부가 된 뒤 두 사람은 하루 24시간을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며 오직 영화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최씨는 아내면서 배우로, 두 가지 역할을 다 잘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그럴 때마다 신 감독은 ‘어떻게 두 가지를 다 잘하느냐. 아내이기에 앞서 배우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 감독은 작품에 욕심이 많았고 저 역시 연기할 때는 몸을 사리지 않는 성격이었어요. 둘이 함께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라는 영화를 찍을 때, 민비가 처녀 적 말 타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제가 직접 떨어져 굴러가면서 다섯 번이나 재촬영했을 정도니까요. 온몸이 시커멓게 멍이 들었지만 연기하는 동안에는 아픈 것도 몰랐어요. 그 작품으로 제가 아시아영화제 주연상을 받았죠.”
신 감독은 최씨와 함께 살면서 한국 영화사에서 처음으로 영화사업의 기업화를 이룬 ‘신 필름’을 설립했고, 두 사람은 5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 한국 영화에 큰 획을 그은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신 감독의 뼈아픈 배신 뒤 이혼했지만, 나를 찾기 위해 북한까지 넘어온 그를 다시 사랑하게 됐죠”
그러나 두 사람의 삶이 늘 평탄했던 건 아니다. 결혼하고도 한참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신 감독은 ‘우리에겐 영화가 자식이나 다름없다’며 병원에 가보자는 최씨를 만류했지만, 그는 전쟁 때 나돌던 소문이 다시 기승을 부리며 ‘최은희가 전쟁터에서 인민군에게 겁탈당해 아이를 못 낳는다더라’는 말까지 떠돌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는 3년 터울의 딸 명임이와 아들 정균이를 입양하고 비로소 모성애와 행복감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고.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젊은 여배우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걸 알게 됐죠. 아이가 없어도 행복하다고 나를 위로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나 하는 배신감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때처럼 뼈아프고 고통스러울 때가 없었죠…. 신 감독은 어떻게든 이혼을 피하려고 했지만 저는 그를 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어요.”
지난 76년, 20여 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하던 날 신 감독은 “우리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 또 만나게 될 거야…”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다신 만난 건 지난 83년 북한에서였다. 78년 최씨가 홍콩에서 북한에 의해 강제납북된 뒤 그 사실을 알게 된 신 감독이 그를 찾기 위해 홍콩에 갔다가 역시 납북됐던 것. 그러나 최씨는 북한 측이 의도적으로 납북한 인물이었던 데 반해 신 감독은 최씨를 탈출시키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모진 고초를 당해야 했다고 한다. 5년여 동안 감옥에 갇혀 갖은 고생을 하다 북한 당국으로부터 “더 이상 탈출할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걸 확인받은 뒤에야 비로소 최씨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그를 다시 만난 날, 그가 저를 찾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썼다는 사실이 고마웠어요. 지옥까지도 나를 따라올 사람…. 그 앞에서 인간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죠. 분노와 원망, 섭섭했던 마음이 모두 다 사라지더군요.”
그들은 북한에서 다시 파트너가 돼 영화를 만들었고, 85년 완성한 작품 ‘소금’으로 최씨는 그해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듬해 베를린영화제 참석을 핑계로 두 사람이 함께 외국에 나간 뒤 미국으로 망명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만 살아온 두 사람은 돈을 모을 줄도 재산을 불릴 줄도 몰랐다고 한다. 최씨는 “한국에서는 한 번도 못 입어본 밍크 코트를 북한에 납치된 뒤 김정일이 선물해서 처음 입어봤다”며 “여기선 일하느라 생일도 잊어버리고 살았었는데 북한에서는 꼬박꼬박 생일상도 차려받았다”고 회상했다. 지난 2006년, 북한에서 감옥살이를 할 때 얻은 C형 간염이 재발해 신 감독이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최씨는 신상옥청년영화제와 기념사업회 등의 활동을 하면서 일생 함께했던 두 사람의 인연을 지금도 잇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최근 파란만장했지만, 아름다웠던 인생 이야기를 담아 ‘최은희의 고백’이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사람들은 제게 영화 같은 삶을 산 여배우라고 하죠. 가끔 ‘나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한데, 어쩌다 영화 같은 삶을 살게 됐을까’ 생각할 때가 있어요. 북한에 납치됐을 때는 밤마다 울면서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제 삶이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배우로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온 제 인생을 이제 후회하지 않습니다.”

여성동아 2007년 12월 5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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