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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따지고 보면 좋은 사람-나의 웬수, 나의 배우자여!

입력 2007.12.18 13:39:00

인터넷 채팅으로 사랑에 빠진 남녀가 오프라인에서 만나보니 남편과 아내 사이로 밝혀져 이혼에 이른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해외 토픽으로 보도됐다.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남편과 아내라는 애증의 굴레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우리 배우자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들인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같은 애정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어긋난 기대로 인한 미움과 원망은 줄이고 살아보면 어떨까. 어느덧 한 해도 저물어가고 미운 정도 정이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좋은 사람-나의 웬수, 나의 배우자여!

엄옥경, 향기속으로, 72.7×60.6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5


“인터넷 채팅으로 뜨거운 사랑에 빠진 남녀가 오프라인에서 만나보니 남편과 아내 사이로 밝혀진 어처구니없는 일이 최근 옛 유고 연방의 보스니아에서 벌어졌다. 지난달 17일 스페인 일간 ‘데 갈리시아’의 보도에 따르면 보스니아의 제니츠시에 사는 이 ‘불운의 남녀’는 가정문제로 불화를 겪던 중 고민을 들어줄 상대를 찾다 인터넷 채팅에 빠졌다는 것.
채팅을 통해 남에게 감춰왔던 고민과 속내를 털어놓던 두 사람은 어느새 한시도 얘길 나누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가상 세계의 연인이 됐다. 채팅을 하는 동안 남자는 여자를 ‘My Honey(내 사랑)’, 여자는 남자를 ‘Prince(왕자님)’라고 부를 정도였다. 얼마 뒤 가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키로 한 이들은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참담한 결과를 맞고 말았다.
인터넷상에서 그토록 다정하던 두 사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을 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던 남편과 아내로 확인된 것이다. 사건이 있은 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이 외도를 했다는 이유로 이혼소송을 제기했고 결국은 남남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외신으로 보도된 기사다.

가상 공간에서 미지의 남녀가 돼 사랑에 빠진 부부
실제 생활에서는 매일 다투고 뒤통수만 봐도 부아가 치밀어오를 만큼 원수가 돼버린 아내와 남편. 그들도 처음엔 열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했겠지만 어느 날부터 열정은 식어 권태스럽고, 대화만 하면 서로 말꼬리 잡아서 다툼이 되는 사랑이 증오로 변해가는 과정을 겪었으리라. 그러다가 인터넷이란 가상의 공간에서 아내와 남편이 아니라 미지의 남과 여가 되어서 자신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털어놓고 서로를 위로해주다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채팅의 주인공인 남자가 혐오하고 역겨워하는 대상이 자신인 것도 모르고 아내는 그 남자를 다독거리고 그 여자를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남자 역시 아내의 말은 지겨운 잔소리로 여기면서 인터넷 상대방인 여자가 고시랑고시랑 털어놓는 이야기는 지치지도 않고 연민을 가득 담아 이해해주고 애틋한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그 여자를 괴롭히는 나쁜 남자를 더불어 미워하면서….
어디 이런 커플이 머나먼 보스니아에만 존재할까. 나부터 그렇다. 얼마 전 생일을 맞아 살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에게서 장미 꽃바구니를 선물받았다. 아침 방송 때문에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혼자 대충 먹고 나오는데 여느 때처럼 새벽에 돌아온 남편은 엄청난 데시벨의 코고는 소리만 들려주었을 따름이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안방에 있는 꽃바구니, 아주머니가 선물해준 거야”라고 했더니 “저런, 내가 아주머니에게 선수를 빼앗겼군. 당신이 꽃인데 또 꽃을 사줄 필요는 없잖아?” 하고 농담을 했다. 물론 언제나처럼 선물은 없었다. 참 일관성 있는 성격이다.
결혼기념일에 남편이 준보석 목걸이를 사줬다고 자랑하는 친구에게 내 남편의 만행(?)을 전했더니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 네 남편은 유머 감각이 있구나. 우리 남편은 고지식하고 답답해. 난 솔직히 기념일 꼬박꼬박 챙기지 않아도 좋으니 평소에 나를 좀 웃게 해주면 좋겠어.”

따지고 보면 좋은 사람-나의 웬수, 나의 배우자여!

엄옥경, 향기속으로, 260.5×162.2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5


나는 “남편이 재미있게 해줘서 웃는 게 아니라 어이없어 헛웃음만 나온단다. 너도 내 남편이랑 일주일만 살면 실컷 웃다가 억장이 무너져 울게 될걸”이라고 말했지만 내 남편이 ‘웃기는 사람’이란 것엔 동의했다.
내 딸의 아버지는 만약 내 남편이 아니라 오촌당숙이거나 사촌오빠거나 옆집 아저씨라면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다. 그는 남의 흉을 거의 보지 않는 선량한 심성을 갖고 있고, 적어도 내 앞에서는 상스러운 욕이나 저질스런 단어를 쓰지 않는 품격도 있다. 반찬 투정도 하지 않고 집안이 더럽거나 어질러져 있어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신문을 꼼꼼하게 읽어 시사상식이 풍부하며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도 웃는 표정이다. 그리고 아내를 비롯한 남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 시시콜콜 간섭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들에게 상냥하고 착해 보이는 그 남자가 하필 내 남편이란 것이 나의 불행이다. 그 착한 남자가 내 남편이어서 생활비를 꼬박꼬박 주지 않는 등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책임을 등한시하는 행동을 할 때 울화가 치민다. 무던한 그 남자가 내 남편이어서 내가 아프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위로의 말은커녕 들은 척도 하지 않을 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다른 남자가 아니라 내 남편이기에 생일이나 기념일 등의 선물을 기대했다가 항상 실망한다. 그 남자가 게으르고 무심한 남편이어서 가사 분담은커녕 라면 끓이기조차 하지 않아 속이 뒤집힌다. 또 합법적으로 성관계를 허용받은(?) 부부이기에 애정표현이 너무 없는 것에 대해 ‘누가 비정상인지’ 고뇌하게 된다.
나는 아직도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실력이라 채팅은 못하지만 만약 인터넷 채팅으로 남편을(다른 남성으로 생각하고) 만났다면 죽이 맞아 그의 아내(나) 흉을 봤을지도 모른다.
“어머, 님의 부인이 그렇게 요리 솜씨가 없다고요? 주말엔 항상 외식만 요구한다고요? 어쩜, 아무리 직장생활을 해도 아내의 기본 도리는 해야 할 텐데….” “저런. 오늘도 님의 부인은 늦나보군요. 다음 주엔 해외 출장을 간다고요? 가정생활보다는 사회생활을 중시하는 사람 같네요.”

미운 정도 정이고 애증도 사랑…
하긴 나 역시 아내가 아니라 사촌여동생이거나 동창이라면 괜찮은 여자일 듯하다. 연예계 뒷담화를 비롯한 각종 정보에 밝은데다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밥도 잘 사고 어지간히 힘들거나 어려운 일도 절대 징징거리지 않고 씩씩하게 웃어넘기며, 타인에겐 무척이나 관대해서 “어쩜 그럴 수 있니?”라고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내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남과 여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아닌가. 하염없이 기대를 했다가 수없이 실망을 하고, 남들이라면 웃어넘길 말도 바르르 떨게 되고 장점보다는 단점이 부각돼 서로를 무시하는 눈빛이 역력한 아주 오래된 부부 사이다.
이제 와서 처음 만난 사이처럼 신선한 애정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원망과 분노만은 없애야겠다. 미운 정도 정이고, 애증도 사랑이며 그래도 내 어깨가 아플 때면 딸아이보다 남편이 파스를 잘 붙여주니 말이다. 한 해가 속절없이 저물고 또 한 살을 더 먹는다. 이젠 남편에 대한 미움도 늙어가는지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마저 든다. 대체 싸워본 게 언제였더라….
유인경씨는…
따지고 보면 좋은 사람-나의 웬수, 나의 배우자여!
경향신문사 여성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최근 군가산점 문제, 성희롱 사건 등 여성 관련 민감한 사안이 많아 다양한 사람을 취재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www.sooda sooda.com)에 가면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읽어볼 수 있다.


여성동아 2007년 12월 5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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