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관고등학교 이돈희 교장(70)은 자타가 공인하는 교육전문가다. 그는 지난 74년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로 임용된 뒤 2003년 2월 정년퇴임할 때까지 30년간 서울대 강단에 섰고, 그해 8월부터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고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민족사관고 교장으로 재임 중이다.
교육자로 일하면서 줄곧 우수한 학생들을 가르쳐온 그가 생각하는 ‘영재성’의 조건은 뭘까. 그는 “영재와 일반 학생을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창의성”이라고 말한다. 영재는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자율적·창의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이 교장은 “영재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 후천적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재는 잠재력은 있지만 현재 우수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잠재적인 영재’, 잠재력이 있으면서 우수한 능력도 발휘하고 있는 ‘잘 계발된 영재’, 잠재력은 보잘것없지만 우수한 성과를 내는 ‘만들어진 영재’ 등으로 구별할 수 있어요. 이 가운데 ‘만들어진 영재’는 지금은 우수해 보일지 몰라도 성장력이 부족해 곧 진짜 영재들에게 추월당하고 마는 ‘가짜 영재’입니다. 그런데 상당수 부모는 ‘만들어진 영재’와 진짜 영재를 혼동하죠.”
그는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많은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영재로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한다는 것. 특히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영재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며 암기식 공부를 강요하기 때문에 진짜 영재조차 잠재력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런 부모의 특징은 세상 모든 아이를 영재와 영재가 아닌 존재로 나누고, 열심히 노력하면 자기 아이는 영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저는 세상 모든 아이는 자신만의 잠재적인 영재성을 갖고 있으며, 그걸 어떻게 찾아내고 계발하느냐에 따라 진짜 영재와 평범한 사람으로 구별된다고 보죠.”
이 교장은 “수영의 박태환이나 스케이트의 김연아처럼 특별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영재성을 발휘하고 있는 ‘진짜 영재’가 얼마나 많으냐”며 “부모가 할 일은 자녀를 특정 분야의 영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이미 갖고 있는 잠재성을 찾아내 계발시켜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는 늘 부모는 자녀를 어떤 사람으로 키울 것인지 고민할 게 아니라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관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의사니까 아이도 의사로 만들어야지’ 혹은 ‘세상에서 가장 인정받는 직업이 교수니까 우리 아이는 교수로 키워야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이가 불행해져요. 그보다는 자녀가 어릴 때부터 다양한 학습의 기회를 주면서 어떤 면을 스스로 갖고 있는지를 보는 게 좋죠. 책을 읽히고, 그림 그리게 하고, 공놀이를 하고, 블록 쌓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 다양한 경험 속에서 아이가 보이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녀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죠.”
이 교장은 이처럼 아이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개성을 발견하려 할 때 조심할 것은 아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축구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가 정작 좋아하는 것은 그림 그리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부모가 할 일은 “아이가 잘하는 것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부모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자녀의 숨은 영재성을 찾아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민족사관고 이돈희 교장.
“아이가 잘하는 건 본래 타고난 것이고, 좋아하는 것은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이 크거든요. 인간의 발달을 결정짓는 것이 유전인가 환경인가 하는 부분은 교육학에서 꽤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돼왔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전과 환경 모두가 사람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어요. 저 역시 사람에겐 분명히 타고나는 부분이 있고, 그것이 성장환경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장이 “잘하는 것을 좋아하게 만들라”고 하는 건 바로 아이의 주위 환경을 바꿔 타고난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뜻이다. 아이가 축구를 잘하는데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건 환경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그럴 때는 아이에게 ‘네가 잘하는 것이 알고 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게 좋죠. 시간이 날 때 함께 나가 재미있게 공놀이를 하거나, 담임교사에게 아이의 재능을 알려줘 학교에서 그 분야의 성취를 이루며 스스로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게 좋아요.”
“아이가 잘하는 것을 좋아하게 만드는 게 영재성 계발의 핵심”
이처럼 자녀가 갖고 있는 영재성을 찾은 뒤 부모가 할 일은 아이가 그 분야에 빠져들어 스스로 재능을 계발하도록 최대한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이가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해도 부모가 성급하게 다루다보면 재능을 채 펼치기도 전에 지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제가 처음 민족사관고에 부임했을 때 가장 놀란 건 아이들이 마치 기계처럼 공부하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오전 6시30분부터 7시까지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을 하고, 8시까지 아침을 먹고, 8시30분까지 조회를 한 뒤 바로 수업을 듣죠. 오후 5시 20분에 모든 수업이 끝나면 저녁 먹고 바로 제1자습을 하고, 30분 휴식 뒤 또 바로 제2자습을 하더군요. 밤 12시30분 취침까지 모든 시간표가 이렇게 완벽하게 짜여 있었어요.”
그런 현실을 보고 이 교장은 공부를 이렇게 ‘기계 돌리듯’ 하는 건 “노벨상 수상자를 길러내겠다”고 선언한 영재교육기관에 적합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는 자율성이 보장돼야만 아이들의 창의성이 자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듬해부터 저는 일주일에 8시간을 정규 수업시간에서 빼내 개인연구(IR·Individual Research) 시간으로 정하고 학생들이 어떻게 쓰든 내버려두게 했어요. 클럽 활동을 하든, 책을 읽든, 교사와 면담을 하든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한 거죠. 처음엔 ‘학생이 방치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는 학부모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준 뒤 오히려 학교 분위기와 학업 성과가 다 좋아졌습니다. 영재들에게 자율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결과죠.”
이 교장은 “민족사관고에서 정말 우수한 성과를 내는 아이들은 일찍부터 입시학원에 다니며 입학을 준비한 가짜 영재들이 아니라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즐겁게 이뤄나가는 진짜 영재들”이라며 “부모는 아이의 영재성을 찾아준 뒤부터는 목표 설정, 계획 수립과 실천 전 과정에서 아이를 돕는 역할에 만족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과거 우리 사회는 학문적인 성취를 이룬 사람만 대접하는 분위기였던 게 사실이죠. 하지만 요즘엔 공부 잘 하는 사람이나 스포츠, 예술,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부모의 할 일은 다양한 분야로 뻗어 있는 아이의 잠재력을 제대로 찾고 계발해주는 겁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