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경험을 씨앗 삼아 내 딸, 그리고 세상의 많은 딸들에게 여성, 그리고 어머니로서 살아가는 게 무엇인가, 남자가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절반의 실패’ ‘혼자 눈뜨는 아침’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문제를 다뤄온 페미니스트 작가 이경자(59)가 최근 편지 형식 산문집 ‘딸아, 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 마라’를 펴냈다. 서울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만난 그에게서는 예전의 투사 같은 분위기가 아닌, 훨씬 마음을 많이 연마한 이에게서 풍겨나오는 여유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책을 쓰는 동안 이혼 후 처음으로 제 삶을 제대로 돌이켜봤어요. 이제야 온전히 제 이혼을 돌아다볼 수 있는 마음이 된 것이겠죠.”
그는 지난 2003년 8월 이혼했다. 당시 ‘그 매듭은 누가 풀까’란 소설을 탈고한 직후, 마치 그 소설의 내용처럼 남편으로부터 “함께 살기 지긋지긋하다”며 이혼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헤어진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작가인 아내와 사는, 혹은 살았던 남자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글감이 되는 일은 큰 스트레스잖아요.”
우리 사회에서는 사랑으로 맺어져 결혼한 남녀라도 이혼과정을 거치면서 원수가 된다. 전남편에 대해 이혼 후까지 예의를 지키는 그를 보며 혹시 전남편이 그립다거나 아쉬움이 남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전혀요(웃음). 제가 그와의 28년 생활을 이혼과정을 통해 훼손하지 않은 것은 제가 살아온 28년이란 시간을 부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 시간은 버릴 수도 없고 버려지지도 않는 내 인생이니까.”
이혼 후 느끼는 가장 큰 슬픔
그는 이혼의 전 과정을 정말 빨리도 끝냈다. 남편에게서 이혼요구를 받은 후 사흘 만에 도장 찍고, 법원을 오가며 정신없이 각종 절차를 마치고 돌아섰다고 한다. 하지만 부부가 아무리 이혼을 해도 둘 사이에는 영원한 미결 과제가 있다. 바로 그들 사이의 자녀다. 다행히도, 이혼을 요구받고 당황해하는 엄마 앞에서 그의 두 딸은 오히려 “아빠와 불행한 노년을 사느니 차라리 이혼하라”고 의연하게 충고했다고 한다. 현재 서른 살인 큰딸은 미국 유학 중이고 스물여섯 살인 둘째딸은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을 다니고 있다.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듣고 망설일 때 충고해주는 딸들이 엄마처럼 느껴졌어요. 결혼처럼 이혼도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고 중요한 선택인데, 그 선택을 지지하고 지금 제게 새로운 인생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것이 딸들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다른 이혼한 여성들처럼 ‘아이들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두려움이 가슴속 어딘가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혼 당시 큰딸은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미국 유학을 가기 직전이었고, 둘째딸은 대학생이어서 아이들이 살 곳을 선택했죠. 가끔 함께 살고 있는 둘째딸에게 ‘아빠 안 만나니? 전화도 해보고 그래’ 하면서도 막상 딸아이가 아빠를 만났다고 하면 가슴 한쪽이 뚫린 듯 허전해요. 한번은 꿈에서 초등학생의 모습을 한 둘째딸을 이혼한 남편이 억지로 데려가는 꿈을 꾼 적도 있어요.”
물론 그 역시도 이렇게 애착을 갖고 있는 분신 같은 딸들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좋은 부모라면 자식을 떠나보낼 줄 알아야 해요. 노년에 필요한 것은 자식이 아니라 친구 같은 배우자죠. 펄펄 끓는 청춘에 만나 지지고 볶고 싸우다 아이 낳고, 그 아이가 떠난 뒤엔 친구 같은 남편, 아내와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인생 아닌가요. 성욕은 소진됐어도 손만 잡고도 교감을 느낄 수 있는 남편이나 아내가 있는 이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늙고 병들어 있을 때 물 떠다줄 사람이 내 남편이고, 내 아내고, 내 아이들의 아빠 엄마라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 이혼 후 가장 슬픈 건 내 삶이 그런 단계로 성숙되지 못했다는 서러움이었어요.”
한국에서 이혼한 여자로 산다는 것
갑작스런 이혼 후,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이혼을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혼 후 닥친 건 냉엄한 현실이었어요. 전 남편이 수십억원을 가진 부자도 아니고, 받아봐야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 법정에서 지난 결혼생활을 쓰레기통 뒤지듯 들춰내며 나의 ‘어제’를 모욕하고 싶지 않아 돈 문제에 연연하지 않은 결과였죠. 그래서 이혼을 하려는 다른 여성들에게는 나처럼 이혼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외에도 그가 겪고 느끼게 된 변화는 많았다.
“어느 날 아파트 현관바닥을 보는데 남자 신발이 보이지 않더군요.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어요. 남자 옷이 존재하지 않고, 남자 냄새가 나지 않는 집안이 두려웠어요. 결혼하기 전 28년, 결혼 후 28년 모두 56년 동안 할아버지, 아버지, 남동생, 남편이란 남자의 존재가 있었거든요. 이혼 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때로는 굴레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호자였던 남자가 없어진 거예요.”
세상의 편견도 무서웠다. 그는 사회에서 이혼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도 이혼한 사람을 ‘실패자’라고 보는 시선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최근 산문집 ‘딸아, 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 마라’를 펴낸 이경자는 “아버지의 딸로 28년, 한 남자의 아내로 28년을 살았으니 이제는 온전히 작가로만 28년을 살아보겠다”고 한다.
“미국에 계시는 제 친정어머니는 지금도 이혼한 딸이 부끄럽다고 한국에 오지 않으세요.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인데 제 딸들은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할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군요. 부모나 형제 중 이혼한 사람이 있는 것은 결격사유라고…. 이혼율이 높아지고 이혼가정의 아이들도 늘어나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혼에 대한 편견이 사방에 지뢰처럼 깔려 있더군요.”
그래서 그는 이혼 후 오랫동안 아팠다. 갑자기 들이닥친 낯선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느끼는 화증, 부부가 함께 늙어가지 못하고 중도에 끝낸 삶에 대한 슬픔, 사회의 편견에 대한 분노로 3년 반을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그렇게 이혼한 뒤에도 “계속 ‘이혼 중’이었다”는 그는 최근에야 이혼과정을 끝낸 기분이라고 했다.
“그 화와 슬픔을 혼자 삭였습니다. 삭이고 삭이다 보니 이제 제 인생의 거름이 된 것 같아요. 그 거름으로 새 인생의 싹을 틔워, 앞으로 20년 이상은 살아보려고요(웃음).”
세상의 딸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현재 서울 성북구 길음동에서 둘째딸과 단출하게 살며 “분노와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생이 주는 편안함,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는 이씨는 이제야 결혼도 제대로 보인다고 한다. 이혼하고 나니 전남편의 심정이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고.
“부부관계에는 남들에게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아요. 저도 종갓집 장남인 그와 결혼해 많이 힘들었지만 그 역시 작가 아내인 제게 못 견뎌하는 부분이 많았겠죠. 또 가만 생각해보면 아들이 없어 많이 쓸쓸해했던 것 같아요. 제게는 두 딸이 자라면서 친구가 돼주었지만, 남편에게는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줄 같은 ‘남자’인 아들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부부 사이에 대화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이 그래요. 남편의 비서나 친구, 단골 술집마담이 오히려 남편에 대해 더 잘 아는 경우가 많죠. 반대로 남편 역시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살아가고요. 부부란 게 서로 허물없는 사이 같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의 일부만 보고, 보여주며 사는 관계거든요. 부부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때로는 애인처럼, 때로는 직장동료처럼 모든 부분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는 남녀가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남자들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비단 기혼여성뿐 아니라 미혼여성도 마찬가지다.
“딸들에게 남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하면 다들 기겁해요. 우리 사회에서 ‘남자를 잘 안다’는 이야기는 곧바로 ‘성경험이 많다’는 걸로 받아들여지니까요. 그런 편견이 참 안타까워요.”
그가 자신의 딸, 그리고 세상의 딸들에게 일러주는 ‘좋은 남자’는 “가부장적 남성성에 갇히지 않는 남자, 여자에 대한 우월감이 없는 남자, 평등한 관계에서 진정한 사랑이 우러난다고 믿는 남자, 그런 관계에서 가지는 성적 소통이 양성의 생명력을 얼마나 싱싱하게 키워주는지 아는 남자…”다.
그는 “아버지 속에 어머니가 있고 여자 속에 남자가 들어 있다”면서 “(생물학적) 성 차를 제외하면 인간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남자들 가운데 여자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남자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들이 여성성을 드러내면 ‘고추 떨어진다’는 말로 위협하고 ‘남성’으로 크도록 강요해요. 남자에게 ‘기집애 같은 놈’이란 말은 심한 욕이 되고 여자에게도 ‘머스마 같다’는 소리는 여성을 한쪽 굴레에 가둬 자라도록 만듭니다. 우리 가정, 그리고 사회 모두 아이들을 남자, 여자가 아닌 ‘사람’으로 키워야 해요.”
긴 ‘이혼 종료기간’을 가졌던 그는 이제 ‘품 넓은 어미’ 같은 심정이 돼 “인생은 남자 여자가 있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인터뷰 말미, 이경자는 “아버지의 딸로 28년, 한 남자의 아내로 28년을 살았으니 이제는 온전히 작가로만 28년을 살아보겠다”고 했다. 한국 여성의 평균수명이 82세인 점을 감안할 때 충분히 가능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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