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아직 종교가 없다. 어머니가 불교 신자여서 돌아가신 후 절에 모셨고 그 깊고 오묘한 부처님 뜻을 따르고 싶지만, 내가 늘 불경을 외거나 절에 자주 가지 않으니 불교 신자라고 말할 수 없다. 기독교계 고등학교에 다녀 성경 시험도 봤고 초등학교 때 짝사랑하던 동창이 동네 교회에 나가는 걸 보고 잠시 교회에 나간 적도 있지만 크리스찬도 아니다.
테레사, 베로니카 등 세례명이 아름다운데다가 장례식을 치를 때 교인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어서 가톨릭에 귀의하고 싶은 생각도 간절하지만 아직은 성당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때론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기 위해 민족 종교를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성이 게으르고 주의산만해서 아직도 올바른 신앙인의 길을 걷지 못하고 있다.
최근 몇 달 동안 내 생애 최악의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4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각종 사건사고를 다 겪었지만 이번에는 천둥 번개 비바람 폭풍 폭설과 우박까지 동반해서 내렸다. 오해, 음모, 시비, 관재구설 등등이 쓰나미처럼 몰아닥쳤고 주위사람들까지 불행한 사건을 많이 겪었다. 남들을 원망하다가, 내 자신을 비난하다가, 억울해서 울다가, 어이없어 웃다가 하면서 한숨만 쉬며 지냈다.
나처럼 약하고 졸렬한 인간이 해결할 일이 아니기에 거룩한 신의 도움을 받기는 해야겠는데 종교가 없으니 도대체 어느 분께 기도를 드려야 할지도 혼란스러웠다. 철없을 때는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 아니 나의 조상신님 등등 마구 불러가며 기도를 드린 적도 있지만 이젠 그렇게 하면 더 벌을 받을 것 같았다. 나의 수호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엄마’에게도 송구스러워 기도를 드릴 수 없었다. 걸핏하면 “엄마, 나 좀 도와줘요”라고 징징거리는 모습을 보인 게 미안해서였다. 생전에도 딸 때문에 속 끓이셨을 텐데 하늘나라에서까지 수시로 SOS를 치는 딸 때문에 편하게 계시지 못할 것 같아서다.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고통 앞에서 신에게 부탁하기
예수님이건 부처님이건 훤하게 내 속을 꿰뚫고 계신 분들께 어떤 태도로, 어떤 방법으로 기도를 드려야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평소엔 기도도 안 드리고 교회에 나가 십일조를 바친 적도 없으며 석가탄신일에 연등도 안 달았는데 무슨 염치로 해결사 역할을 부탁드리는가 말이다.
또 무조건 해결해달라고 해야 할지, 혹은 어떤 어려운 일도 담담히 이겨낼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조건 해결해달라면 뻔뻔할 것 같고, 이겨낼 힘을 달라고 하면 교만한 것 같고, 몽땅 맡길 테니 처분만 바란다고 하자니 어떤 처분이 내릴지 은근히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냥 버티기엔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 터졌다. 그래서 신앙심 깊은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저 너무 힘들어요. 제발 제가 받고 있는 오해들이 풀리고, 어려운 일들이 잘 해결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착하고 지혜로운 분들은 내 뻔뻔한 청탁을 들어주셨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 놀랍게도 나를 옥죄고 있던 고통의 사슬들이 하나 둘, 풀리기 시작했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꼭 맞을 만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벼랑에 서서 떨어지는 공포에 떨다가 바람이 불어 꽃밭에 떨어졌다고나 할까.
‘기도’를 열심히 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리고 싶다. 그중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야 해요. 체면이나 미사여구도 필요 없고, 그저 원하는 것을 진심으로 전달하면 된다고요. 난 매일 수시로 하나님께 고자질을 해서 스트레스가 전혀 없어요. 내가 얼마나 든든한 ‘빽’이 있는지 아시겠죠?”
하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만큼 절제된 생활을 하고 남들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하시니까 ‘고자질’을 하고 ‘청탁’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나처럼 종교가 없는 이들은 기도할 자격이 없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설마 위대한 신께서 그런 옹졸한 마음을 품으실까. 최근에 읽은 책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는 이혼과 실연의 고통에 시달리는 주인공에게 친구가 해주는 조언이 나온다. 우주에 있는 신과 24시간 핫라인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이 친구는 주인공 리즈에게 신에게 청원서를 보내라고, 우주를 향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라고 말한다.
“넌 이 우주의 일부야. 한 성분이라고. 따라서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에 참여하고 나아가 네 감정을 알릴 자격이 충분해. 그러니까 네 의견을 한번 털어놔봐. 자기 진술을 해보란 말이야. 적어도 고려의 대상은 될테니까.”
주인공 리즈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치 관청에 탄원서를 내듯 적고 친구는 세계의 유명한 이들이 협조 사인을 했다며 힘을 실어준다.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 등을 여행하며 음식과 종교체험을 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는 연인과 같아서 절반은 내 책임이다. 변화를 원하는데 정확히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소리 내어 말하는 것조차 귀찮다면 어떻게 기도가 이뤄지나. 기도가 주는 혜택의 절반은 요구하는 자체에, 분명하면서도 충분히 고려된 의도를 전달하는 데 있다. 그런 의도가 없다면 모든 간청과 바람은 뼈대가 없고 느슨하며 둔해진다. 차가운 안개처럼 우리의 발 근처를 맴돌 뿐 결코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
기도란 상황을 정확히 알려 올바른 진찰과 진료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자술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우주 어딘가에 나를 지켜봐주고 나를 도와줄 어떤 절대자, 쉽게 말하면 나의 수호신이고 혹은 나의 영적 파트너가 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마음이 평화롭고 든든해진다. 내 소망이나 바람이 현실로 이뤄지지 않는다 해도, 아무런 편견 없이 꾸지람이나 비난 없이 묵묵히 내 고자질과 넋두리와 진심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응어리가 반쯤은 풀리는 것 같다. 때론 해결사나 명의, 혹은 족집게 점쟁이보다도 더욱 절실한 것은 그저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고, 내 어깨를 다독거려주는 존재가 아닌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유치원생처럼 단순하게 나의 ‘수호신’에게 청원서를 써보았다.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도 솔직하지 못하고 체면을 차리며 우아를 떨고 기도하던 ‘교만’을 버리고, 단순 무식하지만 겸허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무엇을 진심으로 바라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적으면서 결국은 내 스스로 답을 찾았다. 내가 오해 받을 행동과 실수를 했고, 알게 모르게 잘난 척했으며, 남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음도 반성했다.
기도란 무조건 병을 낫게 해달라는 ‘협박장’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얼마나 아프고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 알려 올바른 진찰과 진료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자술서’인 것 같다. 더욱 착한 상태(?)가 되면 다른 이들도 치료받을 수 있도록 축복의 기도를 할 수 있으리라.
테레사, 베로니카 등 세례명이 아름다운데다가 장례식을 치를 때 교인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어서 가톨릭에 귀의하고 싶은 생각도 간절하지만 아직은 성당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때론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기 위해 민족 종교를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성이 게으르고 주의산만해서 아직도 올바른 신앙인의 길을 걷지 못하고 있다.
최근 몇 달 동안 내 생애 최악의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4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각종 사건사고를 다 겪었지만 이번에는 천둥 번개 비바람 폭풍 폭설과 우박까지 동반해서 내렸다. 오해, 음모, 시비, 관재구설 등등이 쓰나미처럼 몰아닥쳤고 주위사람들까지 불행한 사건을 많이 겪었다. 남들을 원망하다가, 내 자신을 비난하다가, 억울해서 울다가, 어이없어 웃다가 하면서 한숨만 쉬며 지냈다.
나처럼 약하고 졸렬한 인간이 해결할 일이 아니기에 거룩한 신의 도움을 받기는 해야겠는데 종교가 없으니 도대체 어느 분께 기도를 드려야 할지도 혼란스러웠다. 철없을 때는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 아니 나의 조상신님 등등 마구 불러가며 기도를 드린 적도 있지만 이젠 그렇게 하면 더 벌을 받을 것 같았다. 나의 수호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엄마’에게도 송구스러워 기도를 드릴 수 없었다. 걸핏하면 “엄마, 나 좀 도와줘요”라고 징징거리는 모습을 보인 게 미안해서였다. 생전에도 딸 때문에 속 끓이셨을 텐데 하늘나라에서까지 수시로 SOS를 치는 딸 때문에 편하게 계시지 못할 것 같아서다.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고통 앞에서 신에게 부탁하기
예수님이건 부처님이건 훤하게 내 속을 꿰뚫고 계신 분들께 어떤 태도로, 어떤 방법으로 기도를 드려야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평소엔 기도도 안 드리고 교회에 나가 십일조를 바친 적도 없으며 석가탄신일에 연등도 안 달았는데 무슨 염치로 해결사 역할을 부탁드리는가 말이다.
또 무조건 해결해달라고 해야 할지, 혹은 어떤 어려운 일도 담담히 이겨낼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조건 해결해달라면 뻔뻔할 것 같고, 이겨낼 힘을 달라고 하면 교만한 것 같고, 몽땅 맡길 테니 처분만 바란다고 하자니 어떤 처분이 내릴지 은근히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냥 버티기엔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 터졌다. 그래서 신앙심 깊은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저 너무 힘들어요. 제발 제가 받고 있는 오해들이 풀리고, 어려운 일들이 잘 해결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착하고 지혜로운 분들은 내 뻔뻔한 청탁을 들어주셨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 놀랍게도 나를 옥죄고 있던 고통의 사슬들이 하나 둘, 풀리기 시작했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꼭 맞을 만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벼랑에 서서 떨어지는 공포에 떨다가 바람이 불어 꽃밭에 떨어졌다고나 할까.
‘기도’를 열심히 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리고 싶다. 그중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야 해요. 체면이나 미사여구도 필요 없고, 그저 원하는 것을 진심으로 전달하면 된다고요. 난 매일 수시로 하나님께 고자질을 해서 스트레스가 전혀 없어요. 내가 얼마나 든든한 ‘빽’이 있는지 아시겠죠?”
하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만큼 절제된 생활을 하고 남들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하시니까 ‘고자질’을 하고 ‘청탁’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나처럼 종교가 없는 이들은 기도할 자격이 없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설마 위대한 신께서 그런 옹졸한 마음을 품으실까. 최근에 읽은 책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는 이혼과 실연의 고통에 시달리는 주인공에게 친구가 해주는 조언이 나온다. 우주에 있는 신과 24시간 핫라인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이 친구는 주인공 리즈에게 신에게 청원서를 보내라고, 우주를 향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라고 말한다.
“넌 이 우주의 일부야. 한 성분이라고. 따라서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에 참여하고 나아가 네 감정을 알릴 자격이 충분해. 그러니까 네 의견을 한번 털어놔봐. 자기 진술을 해보란 말이야. 적어도 고려의 대상은 될테니까.”
주인공 리즈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치 관청에 탄원서를 내듯 적고 친구는 세계의 유명한 이들이 협조 사인을 했다며 힘을 실어준다.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 등을 여행하며 음식과 종교체험을 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는 연인과 같아서 절반은 내 책임이다. 변화를 원하는데 정확히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소리 내어 말하는 것조차 귀찮다면 어떻게 기도가 이뤄지나. 기도가 주는 혜택의 절반은 요구하는 자체에, 분명하면서도 충분히 고려된 의도를 전달하는 데 있다. 그런 의도가 없다면 모든 간청과 바람은 뼈대가 없고 느슨하며 둔해진다. 차가운 안개처럼 우리의 발 근처를 맴돌 뿐 결코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
기도란 상황을 정확히 알려 올바른 진찰과 진료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자술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우주 어딘가에 나를 지켜봐주고 나를 도와줄 어떤 절대자, 쉽게 말하면 나의 수호신이고 혹은 나의 영적 파트너가 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마음이 평화롭고 든든해진다. 내 소망이나 바람이 현실로 이뤄지지 않는다 해도, 아무런 편견 없이 꾸지람이나 비난 없이 묵묵히 내 고자질과 넋두리와 진심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응어리가 반쯤은 풀리는 것 같다. 때론 해결사나 명의, 혹은 족집게 점쟁이보다도 더욱 절실한 것은 그저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고, 내 어깨를 다독거려주는 존재가 아닌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유치원생처럼 단순하게 나의 ‘수호신’에게 청원서를 써보았다.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도 솔직하지 못하고 체면을 차리며 우아를 떨고 기도하던 ‘교만’을 버리고, 단순 무식하지만 겸허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무엇을 진심으로 바라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적으면서 결국은 내 스스로 답을 찾았다. 내가 오해 받을 행동과 실수를 했고, 알게 모르게 잘난 척했으며, 남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음도 반성했다.
기도란 무조건 병을 낫게 해달라는 ‘협박장’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얼마나 아프고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 알려 올바른 진찰과 진료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자술서’인 것 같다. 더욱 착한 상태(?)가 되면 다른 이들도 치료받을 수 있도록 축복의 기도를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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