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스트레스 조절법, 그림치료 등 다양한 치료 방법을 사용해 가정폭력 피해자를 돕고 있는 민호기 소장은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확대를 촉구했다.
SBS‘긴급출동 SOS 24’의 솔루션 위원으로 활동하며 약물 중독과 가정폭력 문제가 방송될 때면 자주 브라운관에 등장해 널리 알려진 한국가정상담센터 민호기 소장(54)이 “사실은 나 역시 두 번이나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라고 털어놓았다.
“첫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였고, 그와 사별한 뒤 만난 두 번째 남편 역시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긴급출동 SOS 24’에 나오는 피해자들처럼 나도 은밀하게 가해지는 가정폭력보다 그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는 게 더 괴로웠다”고 고백한 민 소장은 “한때는 내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마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럽고 두려웠지만, 다른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먼저 내가 지난 삶을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민 소장이 첫 남편을 알게 된 건 지난 77년. 중학교 동창의 소개로 만난 그는 말수가 적고 남자다운 인상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교제한 지 1년여 만에 결혼식을 올렸고, 두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가정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이 늘상 술을 마셨고,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알코올 중독자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술에 취하면 저를 때리고 식구들을 괴롭혔어요. 하지만 친정 부모가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셨기 때문에 그와 헤어질 수 없었죠.”
마음속 분노가 점점 커져가던 어느 날, 그는 둘째 아들을 야단치다가 자신이 어느 순간 아이의 머리를 물이 담겨 있는 욕조 안으로 밀어넣고 있다는 걸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증오하면서 자신 역시 ‘폭력 엄마’가 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88년 한 신학대학원의 상담학 강좌를 듣기 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알코올 중독을 병으로 여기지 않을 때였는데, 그 강의를 들으며 비로소 그게 주위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심각한 질병이라는 걸 알게 됐죠.”
90년 남편은 만취 상태로 귀가하다 집 근처 물웅덩이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두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3학년 때의 일이다.
“남편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알코올 중독과 폭력의 악몽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이제 내 인생에 남은 건 상처로 끝난 결혼생활의 기억과 어린 두 아들뿐이구나’ 하는 허탈감이 동시에 밀려왔어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제가 사회활동을 시작한 건 그런 복잡한 심경 때문이었죠. 그때부터 알코올 중독자 가족 치료모임에 다니며 제 경험을 얘기하고, 신학교와 지도자교육원 등에서 상담학 과정을 공부했어요.”
94년엔 국제로타리클럽의 지원을 받아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청소년약물오남용전화상담소’를 열고 청소년 문제 전문 상담가 활동도 시작했다. 그가 이 분야에 뛰어든 건 “가장 보호받아야 할 약자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특히 자신이 첫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의 폭력으로 인한 분노와 절망을 아이들에게 표출하곤 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또 다른 알코올 중독과 가정폭력의 희생양이 되고 있을 아이들을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고.
오랜 고민 끝에 재혼 선택했지만 또다시 가정폭력의 굴레에 빠져
민호기 소장은 “폭력이 시작되면 절대 참지 말고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의 진심을 다한 상담활동은 큰 성과를 거뒀고, 민 소장은 곧 각종 언론에 청소년 문제 전문가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성공’이 두 번째 악연을 불러왔다. 지난 96년, 신문에 실린 민 소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한 남자가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다.
“저를 보자마자 그 남자는 다짜고짜 ‘당신은 내 아내가 돼야 한다’고 하더군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자가 청혼을 하니 깜짝 놀랐죠. 그래서 ‘아내 노릇을 하는 것보다는 성경공부를 함께하는 게 더 좋겠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계속 ‘아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예요.”
민 소장보다 한 살 어린 그 남자는 특수기관 목회로 안수를 받은 목사였다고 한다. 한 번 이혼하고 초등학교 4학년생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살고 있던 그는 어두운 과거를 가진 사람이었다.
“외부적인 조건은 좋지 않았지만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대를 이어 목회를 하고 있고,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갖고 있는 게 좋아 보였어요. 그 무렵 제가 참 힘들었거든요. 바로 전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심리적으로 힘들었고, 의지할 사람이라곤 연세 드신 어머니밖에 없는데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반항적으로 변해가고 있었어요. 혼자 두 아들을 기르며 상담소 일을 하는 게 힘에 부쳤죠.”
민 소장은 “이 사람이라면 나를 도우며 함께 이 일을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됐다.
마침 상담소 운영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사무실을 정리해 집 안으로 옮기려던 참이었다. 그 남자는 상담소 이사를 열성적으로 돕더니 그길로 ‘사무실 겸 집’이 된 민 소장 집에 눌러앉았다고 한다.
“기대고 싶은 마음과 알 수 없는 불안감 사이에서 한 1년 정도 도망다니다시피 했어요. 그러다가 97년 11월 ‘한국알코올약물상담소’를 새로 연 뒤 한 달 만인 12월30일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죠.”
민 소장은 첫 결혼의 악몽을 잊고 그와 함께 새롭게 출발하려 했다고 한다. 여전히 집이 곧 상담소였기 때문에 부부는 함께 상담활동을 했다. 특히 남편은 민 소장이 상대하기 어려운 덩치 큰 알코올 중독자를 설득해 입원시키는 데 큰 힘이 돼주었다고. 그러나 주위에 한길을 걸어가는 금실 좋은 부부로 조금씩 알려질 무렵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시작은 민 소장의 아이들과 새 아빠 사이의 충돌이었다.
“9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큰아들이 그 무렵 가출해 술집 호객꾼 일을 하고 있었어요. 다 자란 아들을 제가 어찌할 수 없어 남편한테 집에만 좀 데려와 달라고 부탁을 했죠. 그런데 남편이 그곳에서 아이와 다투다 각목으로 머리를 때려 10여 바늘을 꿰매야 하는 상처를 입힌 거예요. 지나치다 싶었지만 ‘새 아빠도 아빠니까, 아빠 노릇 하려다 생긴 일이려니’ 하고 그냥 넘겼죠.”
큰아들과의 사이에 깊은 골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상처를 치료한 큰아들은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 뒤엔 사춘기를 지나며 한창 예민해 있던 고등학생 둘째 아들이 민 소장에게 대들다 남편에게 맞아 다치는 일이 생겼다. 민 소장은 이때도 ‘아빠니까’ 하며 남편 편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친 아이를 위해 약을 사러 나갔다 오니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둘째 역시 그길로 집을 나가 제 형이 먼저 가 있던 할머니 집으로 가버린 것이다. 재혼한 남편이 데려온 아들도 곧 친엄마가 데려가 결국 집에는 민 소장 부부만 남게 됐다고 한다.
“가정폭력에서 벗어나려면 두려움과 부끄러움 이겨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민 소장은 “나 자신과, 다른 상처받은 사람 모두가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게 돕고 싶다”고 말했다.
“가부장제의 전통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갖가지 폭력이 미화되곤 하죠. ‘교육적 체벌’이라고 하지만 실제 폭력 성향을 가진 아버지가 자신의 폭력을 ‘아버지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는 경우도 많고요. 하지만 그때 저는 남편의 폭력이 그런 거라는 걸 까맣게 모르고, 그저 아이들에게 잘하려는 욕심이 과해 생긴 일이라고만 여겼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떠나고 난 뒤 폭력은 슬슬 민 소장에게로 향했다고 한다. 결혼하고 1년이 흐른 뒤, 다른 이유 없이 한 차례 얼굴을 때린 뒤부터 남편은 갖가지 이유를 들어 민 소장의 얼굴, 정강이, 가슴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너무 창피했어요. 상담소를 찾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정작 아무 말 못하며 참고 살고 있는 저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가정폭력 피해자라고 밝힐 수는 없었어요. 상담소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고요. 점점 더 힘들어져서 결국엔 모든 걸 정리하고 외국으로 도망갈까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도피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낸 그는 2005년 진단서를 첨부해 남편을 폭행 혐의로 고소했다고 한다.
“저는 지금도 가정폭력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옛날 생각만 하면 속에서 뭔가 치밀어오르고 떨리죠. 갑자기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릴 때도 있고요. 정말 견디기 힘들 때는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아 상담을 하고 약의 도움을 받습니다. 제 내면을 들여다보면 상처투성이에 자존감은 낮은, 가정폭력 피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보여요.”
마음의 상처는 민 소장의 자식들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 어느새 다 자라 가정을 꾸린 큰아들은 일곱 살배기 아이를 키우며 조금씩 엄마를 용서했지만, 여전히 할머니와 살고 있는 둘째 아들은 ‘그 사건’ 이후 단 한 번도 민 소장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가정폭력의 위험성을 깊이 깨달은 민 소장은 최근 서울 영등포구에 한국가정상담센터(02-842-0004)라는 가정폭력 전문 상담소를 열고,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그의 상담소에는 보통 하루에 열다섯 건 내외의 상담이 접수된다고 한다. 특히 결혼 초기에 남편의 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의 상담이 많다고.
“예전엔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체면 때문에 참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죠. 하지만 그건 결코 좋은 대응책이 아니에요. 저는 요즘 젊은 여성들이 문제가 시작됐을 때 바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는 게 참 반갑습니다.”
특히 최근 가정폭력은 심한 경우 피해자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흉포화되고 있어 “어떤 폭력도 절대 참으면 안 된다”는 게 민 소장의 조언이다.
“가정폭력이 육체적인 폭행에 국한되는 건 아니에요. ‘당신은 집에서 하는 일이 뭐야’ ‘아이나 똑바로 키워’처럼 아내의 인격을 무시하는 말을 수시로 하는 것이나 생활비를 주지 않는 것, 외출을 금지하는 것과 같은 언어적·정서적인 폭력도 아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심각한 가정폭력입니다. 이런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피해자들은 폭행을 당한 경우나 마찬가지로 갖가지 후유증을 겪죠.”
그래서 민 소장은 이처럼 오래 상처받아온 피해자들을 위해 분노와 스트레스 조절법, 가족 간의 의사소통 방법, 그림치료 등 가슴속 응어리를 털어낼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치유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두 번이나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지만 상담자로서는 오히려 득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민 소장은 “나 자신과, 다른 상처받은 사람 모두가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게 돕고 싶다”며 “가정폭력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이며, 한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인 만큼 피해자들을 위한 좀 더 많은 현실적인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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