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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내 남자의 女子’ 릴레이 인터뷰 | 빛나는 조연

아버지의 진한 사랑 보여주는 송재호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

글·김명희 기자 / 사진·조세일‘프리랜서’

입력 2007.06.18 11:36:00

브라운관에서 가슴 찡한 아버지의 부정(父情)을 그 누구보다 실감나게 보여주는 송재호. 그가 막내아들을 사고로 잃는 시련을 겪으며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의 진한 사랑 보여주는 송재호

지수(배종옥) 아버지 역을 맡은 탤런트 송재호(69). 그는 딸이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고 이혼을 결심했을 때 “편한 대로 하라”며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묵묵히 딸의 결정을 존중해주는 모습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전작 ‘부모님전상서’의 안 교감이 이혼하려는 딸을 무조건 말리는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아버지였다면, 지수 아버지는 현실적이고 생각이 트인 인물이죠. 안 교감은 헤어지겠다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다시 붙여놓으려고 하는데 지수 아버지는 ‘헤어져서 마음이 편하다면 헤어져라. 그 대신 휘청거리면 지는 거다’라고 말하는데, 글쎄 실제로는 딸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안 교감 쪽에 가까울 것 같아요. 내 사위가 불륜을 저지른다면 붙들어다 놓고 나무라겠죠. 이성과 지성으로 동물적 본능을 참고 견디는 게 인간이니까.”
그는 드라마를 집필한 김수현 작가와 30년 전 ‘안녕’이라는 작품에서 처음 만났고 2004년 ‘부모님전상서’로 재회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작품인데 젊은 시절 추상같던 김 작가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30년 전에는 연기자가 대본의 토씨 하나만 틀리게 읽어도 “왜 틀려요”라며 막 쏘아댔는데 요즘엔 할머니가 손자 손녀들 불러놓고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타이르듯 연기자들을 이끌어요. 그래서인가, 김 선생이 현장에 나와 있으면 전엔 마음이 불편했는데 요즘엔 김 선생이 보여야 마음이 놓여요.”
김 작가가 그보다 다섯 살 아래지만 그는 꼬박꼬박 ‘선생’이라는 말을 붙였다. 작가로서의 능력과 삶에 대한 통찰력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 한다.
“내가 모자라서 그런지, 대본을 보다가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지수가 이혼한다고 할 때 “홍서방의 아내가 너의 전부가 아냐. 아이 엄마고 아버지의 딸이고 형제 중 하나야. 그게 다 소중한 자리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에 와닿더군요. 어떤 대사든 연기자가 수긍하고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만들어요. 반박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어요, 드라마 쓸 때마다 매번 다른 점도 그렇고…. 천재야 천재. 이젠 작품에서 시대를 먼저 산 이로서의 책임감이랄까 그런 것도 느껴지고. 그분 뇌를 한번 해부해봤으면 하는 생각도 했어요(웃음).”
그는 인터뷰 중 드라마에서 손자로 출연하는 박지빈이 다가오자 친손자처럼 안아주었다. 함께 출연하는 후배들이 모두 자식 같다고 한다. ‘자식들’에 대한 평가도 넉넉했다.
“조금 틀려주면 안 되나, 하나같이 야무지게 연기를 잘해 어떨 때는 얄밉기도 하지만 모두들 불꽃을 튀기며 연기하면서도 조화를 잘 이루니 보기가 좋아요.”
극중 화영 역을 맡은 김희애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부모님전상서’에서는 딸로 등장했는데 이번에는 딸의 남편을 빼앗는 역이다.
“그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내 딸이었지만 지금은 내 딸 가슴 아프게 하는 못된 여자라는 생각밖엔 안 드네요(웃음).”

나를 살리고 먼저 간 막내아들, 미안하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는 고마운 아내
희끗한 머리에 선한 눈매, 입가에 머금은 은은한 미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에 만난 그는 늘 그러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푸근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는 지금의 모습은 상상도 못할 만큼 방탕했다고 한다.
59년 성우로 방송과 인연을 맺은 그는 64년 영화배우로 데뷔한 데 이어 68년 KBS 드라마 ‘아로운’에 8백7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남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자의 전성시대’ ‘흑맥’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등의 영화가 잇달아 성공하면서 그는 ‘충무로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매김했다.

아버지의 진한 사랑 보여주는 송재호

“그때는 항상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거죠. 지금은 나이 들어 주글주글해졌지만 그 시절 내 우상은 제임스 딘이었어요(웃음). 하루에 담배를 세 갑씩 피우고, 양주를 두 손에 들고 병나발을 불고, 술 마시고 운전한다고 객기도 부리고…(웃음). 사업에 실패해 빚더미에 올라앉은 적도 있고 그 때문에 세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고 했었어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 때문에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그는 지인의 권유로 신앙을 갖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다고 한다.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던 술·담배도 모두 끊고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차곡차곡 빚도 갚아나갔다. 하지만 지난 2000년 막내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으면서 그는 또 한 번 인생의 고비를 맞았다.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히 강릉으로 달려갔는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 막내가 죽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더라고. 스물여덟, 다 키워놓은 장성한 아들, 다섯 자식 가운데서도 막내라서 유난히 정이 많이 가는 아이였는데….”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오늘은 돌아왔을까’ 하는 마음에 아들이 쓰던 방을 매일 들여다보았다고.
“그래도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다만 ‘고귀한 생명을 거둬가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는데 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죠. 나중에 알고 봤더니 우리 아들이 날 살리고 죽었어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그는 심한 어지럼증으로 병원을 찾아 MRI 촬영을 했다가 뇌에 치명적인 이상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그전에도 가끔 어지러운 증세가 있었지만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고 넘겼어요. 막내가 그렇게 된 뒤 단기 기억상실, 말을 더듬는 증세까지 동반돼 병원을 찾게 됐죠. 뇌세포가 급속히 죽어가는 병이었는데 조금만 늦었어도 치매가 될 뻔했다고 하더군요. 치료를 받기 시작했어요.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지만 내게 주어지는 치료를 묵묵히 받으며 맡겨지는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아마 그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없었을 거요.”
그는 신앙과 함께 어려운 길을 헤쳐나올 수 있었던 힘으로 아내의 내조를 들었다. 58년 결혼해 지금껏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하면서 살아온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가늠할 수 없어 “미안하다”는 말로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모른 척하고 있고 집사람이 알아서 다 해결했어요. 아이들도 모두 사회에서 제 몫을 하게끔 반듯하게 키워주었고. 아내가 세상을 뜨면 나는 울음이 그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먼저 죽어야지’라는 생각을 하죠. 내가 집사람에게 해준 게 없어서, 그 어떤 말로도 고마움을 대신할 수 없어서 미안해요.”

“숨이 붙어 있는 한 연기 계속하고 싶어요”
일흔이 가까운 그는 요즘도 대한수렵관리협회 회장으로, 대한사격연맹 부회장으로, 홀트아동복지회 홍보대사로, 코스타(해외 유학생 선교 모임) 회원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쉬엄쉬엄 편안하게 살 수도 있건만 그는 “그러면 늙을 것 같다”며 고개를 흔든다.
“연기자라는 직업을 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년이 없으니까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잖아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숨이 붙어 있는 한 연기를 하고 싶어요. 특히 악역은 꼭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섭외가 안 들어와요. PD들한테 ‘악역 한 번 줘봐. 끝내주게 할게’ 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 먹혀요(웃음).”
삶의 연륜과 깊이를 느낄 수 있었던 그와의 인터뷰는 캄캄해져서야 끝났다. 헤어지는 게 아쉬운 듯 악수를 청한 그는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며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자식을 배웅하는 고향집 아버지처럼 인자한 얼굴로 오래오래.

여성동아 2007년 6월 5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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