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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영광의 주인공

2천만원 고료 제39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자 김비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7. 05. 08

39년 역사의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서 ‘특별한’ 당선자가 탄생했다. 사상 최초의 ‘법적 남성’ 작가인 트랜스젠더 김비씨가 그 주인공. “이 상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고 수상 소감을 밝혀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한 감동의 시상식 현장을 지상중계한다.

2천만원 고료 제39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자 김비

김비씨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내빈들. 심사위원 한수산·하응백씨, 당선자 김비씨, 박완서 작가, 동아일보 김학준 사장(왼쪽부터).


“이번에 여성동아에서 주시는 상은 제게 커다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저를 작가로 만들어주었고, 동시에 ‘여류 작가’로 인정해주었습니다. 지금껏 저는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이 상이 제게 ‘여자’라는 이름을 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저희 가족이 이 상 덕분에 오늘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23년 만에 우리 가족이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4월4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 9층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시상식장. 제39회 당선자 김비씨(36)는 수상 소감을 말하다 끝내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기 위해 시상식장을 찾은 동아일보 김학준 사장과 심사위원 한수산·하응백씨, 여성동아 공모를 통해 등단한 작가 박완서·우애령·송은일씨 등 내빈들도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2001년 여성동아를 통해 등단한 작가 최순희씨(51)는 “참으려 했는데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며 “트랜스젠더로 살아오면서 여러 아픔을 겪었을 텐데 이에 굴하지 않고 작가로 성장한 김씨와 그런 자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제주도에서 올라온 부모님의 모습이 매우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 2000년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 이제는 정신도 육체도 여성이지만,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여전히 1로 시작된다. ‘여성’ 작가를 배출하기 위해 제정된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역사상 첫 ‘법적 남성’ 당선자인 셈이다. 그는 한 트랜스젠더가 평범한 남자와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자전적 소설 ‘플라스틱 여인’으로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여자로서, 작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2천만원 고료 제39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자 김비

제주도에서 올라온 어머니와 당선의 기쁨을 나누는 김비씨.(좌)


김씨는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 분이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처음 제 원고를 받아준 여성동아 담당 기자에게 감사한다”고 말한 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되는 프로필을 보고 ‘자격 미달’로 탈락시켰다면 오늘의 영광이 없었을 텐데, 그분이 원고를 받아준 덕분에 이 자리에 섰다.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밥을 사고 싶다”며 미소 짓기도 했다.
그는 “처음 당선 소식을 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삶에서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라며 “며칠간 꿈만 같았고, 자다 일어나면 꿈이 아닐까 걱정돼 계속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살아오는 동안 늘 넓은 광장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외로움을 느꼈는데 이 상을 통해 세상의 이해를 얻었다는 게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멀리 제주도에서 엄마가 오셨다. 둘이 나눠야 할 이야기가 참 많지만 오늘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순간만을 즐기고 싶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엄마와 내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펴낼 수 있을 것”이라며 흐느끼기도 했다. 그의 감동적인 수상 소감이 이어지는 동안 참석자들 또한 김씨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당선을 축하했다.
작가 한수산씨는 이날 심사 소감을 통해 “모두 37편의 작품이 접수됐지만 심사위원 모두 ‘플라스틱 여인’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데 동의해 당선자를 고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여성에게 주는 상을 법적으로는 남성인 사람에게 줄 수 있는가의 문제를 놓고 고민했는데, 여성동아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김씨가 공모에 당선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플라스틱 여인’의 주인공은 트랜스젠더 ‘연’. 미용실 보조로 일하는 그는 성전환 수술을 받았고, 남아 있는 남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호르몬 치료도 계속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한 남자를 만나지만, 남자 가족의 거센 반대에 부딪힌다. 그 높은 벽 앞에서 연은 자신이 백 년을 기다리고, 천 년을 빌고 또 빌어도 사람이 될 수 없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은빛 여우같다고 생각한다. ‘플라스틱 여인’ 안에는 연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김씨는 수상 소감에서 “이 책에는 나 자신의 이야기가 많이 투영돼 있어 쓰는 내내 부끄럽고 힘이 들었다. 책이 나온 지금도 이 이야기가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학평론가 하응백씨(46)는 “이 소설에는 체험적 진실의 절실함이 곳곳에서 묻어난다”며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되 그 운명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주인공의 삶에서 또 다른 형태의 아름다운 인생을 보게 된다”고 격려했다.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자로 이날 시상식에 참석한 작가 박완서씨(76)도 “그동안 알게 모르게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이 있었지만 오늘 김씨를 만나면서 모두 깨져나갔다”며 “김씨의 남다른 삶과 경험은 그가 작가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수상자인 ‘17세’의 작가 이근미씨(49) 역시 “요즘 젊은 작가의 소설에서는 진정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은데, 누구보다도 아픈 삶을 살아온 김씨는 그 힘을 바탕으로 좀 더 깊이 있는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반갑다”고 밝혔다.
김씨는 “지난 10년 동안 습작을 계속했지만, 아직 문학이 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 더 열심히 진실되게 글을 써나갈 것을 약속한다”며 작가로 새롭게 출발하는 각오를 밝혔다. ‘플라스틱 여인’은 동아일보 출판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한편 ‘여성동아’에서는 올 10월31일까지 역량 있는 여성작가 발굴을 위해 ‘제40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를 한다. 여성이면 누구나 응모가 가능하며 분량은 2백자 원고지 1천2백 장 내외. 발표되지 않은 창작소설이어야 한다. 예심과 본심을 거친 당선작은 여성동아 2008년 2월호에 발표할 예정이다.(문의 02-361-0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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