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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찾은 사랑

글·김남희‘여행가’ / 사진제공·REX

입력 2007.03.28 18:13:00

길 위에서 찾은 사랑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안정된 직장에 출근하고, 반지하였지만 나만의 방이 있고, 조금씩 쌓여가던 적금통장을 지녔던 시절. 그때 내 삶은 욕구불만 상태였다. 일은 지루하기만 했고, 볕이 잘 드는 지상의 집 한 칸은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같은 일을 하고,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고, 노후를 위해 현재를 유보하며 사는 삶은 숨이 막혔다. 그렇다고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날 창조적인 상상력이나 전문적인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꿈은 오직 하나, 세계일주였다. 외국계 회사에 근무한 덕에 여름휴가가 한 달이었고, 그때마다 배낭을 메고 남의 땅을 돌아다니는 일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내 가슴을 뛰게 하고, 그 일을 할 때 행복한 일, 그게 여행이었다. 하지만 소심한 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사표를 던지는 일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애초의 계획보다 3년이 늦어진 2003년 1월, 마침내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안정된 삶에 대한 욕구를 힘겹게 쓰러뜨렸다. 배낭 하나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아 중국으로 건너간 이후 걷고 또 걷는 생활이 4년째 이어졌다. 힘든 시간이 없었다고,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고 말한다면 거짓이리라. 두고 온 것들이 눈에 밟혀 자꾸 뒤를 돌아보던 시간도 있었다. 돌아와 꾸려갈 일상이, 무일푼에 나이만 먹은 비전문직 여성으로 지내야 할 일이 겁나기도 했다. 행복하자고 떠난 여행길이었지만 첫 6개월은 몸도 마음도 힘겹기만 했다. 몸이 현지 적응을 하느라 배앓이며 감기몸살을 번갈아 겪어대는 동안 살던 곳의 방식을 버리지 못한 마음은 늘 비교하고 판단하느라 바빴다. 귀곡산장 같은 숙소에 짐을 풀 때면 한숨이 났고, 사람이 다 차야 출발하는 트럭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삶의 많은 부분이 선택이 아닌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일로 밀려오는 일상인데도, 그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좁은 트럭에서 엉덩이를 이어붙이며 나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주고, 집으로 데려가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웠다. 고단한 살림이었지만 아이들은 밝았고, 어른들은 여유가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백 달러를 넘지 않는 가난한 나라 라오스와 미얀마,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있었다. 테러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이미지로 가득한 이슬람 국가의 사람들은 ‘손님은 알라가 보낸 선물’이라고 믿었다. 처음 보는 나에게 ‘친구’라고 말하며 손 내미는 그들 앞에서 내 마음의 장벽이 조금씩 무너졌다. 사람 만나는 데 까다롭고 의심 많던 내가, 낯선 사람을 덜커덕 믿기 시작했다.

내 뜻대로 되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내 얄팍한 인내와 위선적인 관용을 다 드러냈던 인도. 인도가 가르친 것은 감사하는 법이었다. 허기진 배를 안고 들어간 더러운 식당의 뜨거운 수프 한 그릇이 제왕의 만찬보다 눈물겨웠다. 어쩌다 싸고 깨끗하기까지 한 숙소를 구하면 몸둘 바를 몰랐고, 뜨거운 물까지 펑펑 나오면 그야말로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 작고 사소한 것들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삶 자체를 감사하게 되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못난 나를 끌어안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조금씩 느슨해져갔다. 서울로 돌아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어딘지 모르게 순하고 부드러워졌다고 칭찬을 받곤 했다.

길 위에서 찾은 사랑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 후에야 다른 사람의 삶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남의 아픔과 상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만 아픈 줄 알고 살았는데, 내 상처가 가장 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은 없었다. 내 상처와 아픔은 어느 정도 내가 선택한 것들의 결과였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조건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티베트에서 망명한 사람들,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 있는 친구들이 그랬다. 가난한 나라의 더없이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수많은 아이들은 또 어떤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다. 큰 정신적 외상없이 자라온 환경과 건강한 가족들의 존재가 얼마나 큰 재산인지도 깨달았다. 아무것도 내려놓고 버릴 것이 없는 사람들,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사람들 앞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내 욕망조차 욕심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지나가는 나를 보살펴주고, 내 손을 잡아주고, 내게 밥 한 그릇을 대접하는 이들은 죄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따져봐도 나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가파른 삶을 견디게 하는 게 사람들끼리의 연대와 포옹임을 깨달았다. 그제야 내가 가진 것에 대해 안도하는 삶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삶에 대한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다 서울로 돌아오면 나는 다시 흔들린다. 정말이지 서울의 내공은 너무나 강력해 내가 한 ‘도(道)공부’를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아무나 보고 웃던 내 얼굴이 다시 굳어지고, 급한 일도 없는데 종종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지하철이나 버스가 조금만 늦게 와도 초조해진다. 길 위에서는 잔잔한 강물로 흐르던 내 마음이 서울에서는 곧잘 역류하는 진흙탕이 돼버린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여전히 날카롭게 비어져나오는 내 성질머리를 본 동생이 어느 날 부르짖었다. “길 위에 7년이 아니라 70년은 서 있어야 사람꼴이 되겠다!”고.



그래, 여기까지가 내 한계다. 아직 내 내공은 턱없이 부족하다. 내 마음의 평화는 외부의 사소한 자극에도 흔들리고, 내 신념은 잔바람에도 기우뚱거린다. 인정한다. 그 인정은 체념에서 비롯된 마지못한 인정이 아니다. 느리지만 나만의 속도로 진화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에 기댄 긍정이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게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할 뿐이다. 어제의 나에 비해 오늘의 나는 조금 더 사랑스러워졌다.
겨울이 지났다. 봄엔 다시 내공을 쌓으러 밖으로 나설 것이다. 돌아올 때의 내가 조금 더 순해지고, 맑아진 얼굴이 될 것을 믿는다.

김남희 나이 서른을 훌쩍 넘겨 세계일주에 나선 이래 5년째 그 길에 서 있다. 지인의 말을 빌자면 ‘풍경과 사람에 무심해지지 못해서’라고. 온라인 신문 ‘오마이뉴스’에 ‘까탈이의 세계여행’을 연재중이며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1, 2, 3권을 펴냈다.

여성동아 2007년 4월 5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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