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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내는 황홀한 맛의 예술

기획·김동희 기자 / 글·민지일‘문화에세이스트’|| ■ 자료제공·REX, 서울프라자호텔 레스토랑 토파즈

입력 2006.11.17 18:51:00

시민 혁명에 가담했다가 가족을 잃고 노르웨이 시골로 피신한 프랑스인 요리사 바베트. 그는 어느 날 혼신의 힘을 다해 특별한 만찬을 준비한다. 그가 만든 최고급 프랑스 요리는 행복을 일깨우고 반목하던 사람들에게 서로 용서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바베트의 만찬

아마 ‘무라카미 류’였을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작가라는 걸 뽐내듯 호사스럽고 진귀한 음식을 세계 최고 호텔, 최고 레스토랑에 가서 먹은 경험을 소설로 썼다. 지구를 안방처럼 다닌 그의 방자한(?) 음식사치에 놀랐다. 그는 스스로의 행동이 낭비라고 인정하면서도 “수렵민은 낭비밖에 모르며, 어떤 측면에서 낭비는 미덕”이라고 변명했다. 어디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골라 먹는 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라는 얘기였다.

그가 소설 첫머리에 쓴 에피소드가 음식과 소리에 관한 것이다. 지중해 리비에라의 고급호텔 다이닝룸. 선남선녀들이 모여 누벨 퀴진(새로운 유형의 프랑스 음식.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 가깝도록 가볍게 조리하는 퓨전 요리)을 먹는다. 얼마나 맛이 좋은지 사람들이 흡족해 속삭이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부드러운 덩어리가 돼 방 안에 흐른다. 거기에 포크, 나이프의 살강거리는 소리. 이따금 접시에 칼이 챙강 챙강 부딪치는 소리. 거기에 다소 덜 익은 고기를 씹으며 육즙을 목구멍으로 흘려보내는 소리까지 엉키면 절로 침이 괴고 입맛이 돈다는 것이다.

맛이야 누군들 모르겠는가. 그 먼 나라 최고급 호텔까지 직접 가서 먹을 능력이 없어 그렇지. 그러나 우울할 필요는 없다. 무라카미 류보다 훨씬 더 멋지면서도 값싸게 음식과 소리, 감각의 향연으로 안내하는 소설이 있으니까.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이 쓴 ‘바베트의 만찬’은 한겨울 찬바람이 몰아치는 북해 바닷가 허름한 집에서 최고급 프랑스 요리에 와인을 곁들여 먹는 운치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냥 식사만 하는 게 아니다. 기구한 사랑 얘기와 예술, 철학, 종교가 구수하게 어울리고 음식에 녹아든 우리네 삶의 정수가 펼쳐진다.

노르웨이의 겨울 해변, 외딴 시골마을에서 맛보는 최고급 프랑스 정찬
노르웨이 피오르드 지역 외딴 마을. 청교도 목사인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은 순결하고 금욕적인 늙은 두 자매가 살고 있다. 1871년 어느 폭풍우 치는 밤, 도망자 행색의 프랑스 여인이 찾아와 자매에게 보호를 요청한다. 바베트란 이름의 여인은 그날부터 자매는 물론 목사가 살아있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던 시골 노인들의 기도모임까지 뒷바라지하는 무급 하녀로 정착한다. 말린 대구국이나 검은 빵 부스러기에 맥주를 섞어 끓인 수프로 식사를 해결하던 자매는 바베트가 온 후 같은 재료라도 훨씬 더 맛이 나는 식사를 하게 됐다.

바베트가 마을에 온 지 12년이 지났다. 목사가 태어난지 1백주년이 되는 해. 꾸준히 프랑스 복권에 응모했던 바베트가 그해 1등에 당첨돼 1만 프랑을 타게 됐다. 마을 사람들에겐 생전 처음 보는 큰 돈이다. 돈을 들고 프랑스로 돌아갈 거라고 믿는 자매에게 바베트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1백주년 기념만찬을 자기가 ‘쏘게’ 해달라는 것. 차분한 분위기로 진행되던 소설은 이때부터 갑자기 활기를 띤다. 산 거북과 메추리가 부엌에 들여지고 술병이 그득 그득 쟁여진다. 청교도 자매들은 바베트가 혹시 마녀 음식을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 식사란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고 살기 위한 것으로, 최대한 간소해야 한다는 믿음이 깨질까 두려운 것이다.



드디어 만찬 날. 목사관 식탁에 촛불이 켜졌다. 12명 손님 중 외지인은 단 1명. 젊은 시절 자매 중 언니를 사랑했으나 끝내 못 이루고 떠나 지금은 화려한 왕실근위대에 소속된 로렌스 장군이다. 만찬 식전주로 ‘아몽티야드’가 나왔다. 무심코 한 모금 마신 장군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어 와인은 1846년산 ‘클로 부조’(프랑스 부르고뉴 부조 지방산 포도주). 장군은 자지러진다. “말이 안 돼. 이런 시골 목사관 저녁에….”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나. 주위를 둘러보니 노르웨이 촌로들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이건 정말로 최고급 클로 부조입니다!” 장군이 얘기해보지만 시골 노인들은 벌써 취한 듯 실실 헤픈 웃음만 흘린다.

바베트의 만찬

수프가 나왔다. 한 숟갈 뜬 장군. 기가 막힌다. “세상에 거북이 수프잖아….” 이어 나온 블러디 드미로프(원래 러시아 요리. 흰 빵에 캐비어와 사워크림을 얹어 낸다). 입에서 사르르 녹는다. “꿈인가?” 장군은 또 술잔을 든다. “이건 파리에서도 찾기 힘든 1860년산 샴페인 뵈브 클리코(17세기 초 파리의 클리코 부인이 만들었다는 최고급 샴페인)네.” 최고급 프랑스 요리가 뭔지도 모르는 시골 노인들이지만 혀가 살살 녹는 맛에 취하긴 마찬가지. 마녀 음식이 나올지 모르니 일절 음식 평을 하지 말자던 묵계는 이미 깨졌다. 방 안엔 행복에 겨워 웅얼거리는 소리, 음식을 맛있게 씹어 목구멍으로 삼키는 소리, 와인 마시는 소리, 그리고 살강대는 포크와 나이프 소리까지 덩어리가 돼 식탁의 또 다른 메뉴로 자리 잡았다. 목사가 죽은 후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고 싸웠던 사람들은 화해의 음식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치고 서로를 용서했다.

음식에 홀린 사람들의 얼굴에 가득 넘쳐나는 빛…
그리고 마침내, ‘카유 엉 사르코파주’(메추라기를 페스트리로 싸서 여섯 가지 이상 소스를 끼얹어 먹는 요리)가 나왔다. 여섯 가지 소스가 내는 절묘한 향기가 방 안 가득히 퍼져나갔다. 파리에서도 십수 년 전 ‘카페 엥글레’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명품이 지금 노르웨이 한적한 시골에 등장한 것이다. 장군은 더 이상 참지 못한다. “여러분, 이건 프랑스에서도 최고 요리, 특이하게도 여성 요리사가 개발했다는 바로 그 카유 엉 사르코파주입니다.” 19세기 피오르드 지방, 어두운 마을에 빛이 흘렀다. 카페 엥글레의 수석 요리사로 파리 코뮌(1870년 프로이센과의 굴욕적 강화조약에 반대하고 노동자 정부를 세우려고 한 프랑스 시민 항쟁. 프로이센과 결탁한 정부군에 의해 3만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에 가담했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도망쳐온 바베트. 그가 혼신의 힘을 쏟아 만든 음식에 홀린 손님들의 얼굴에서 빛이 넘쳐 바닷가 겨울 공기를 부드럽게 싸고돌았다.

최고의 만찬을 접대한 바베트는 꿈꾸듯 말한다. “그래요. 나는 카페 엥글레의 수석 요리사였어요. 오늘 음식에 내가 가진 1만 프랑을 다 썼지만 나는 가난하지 않아요. 나는 위대한 예술가니까요.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건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내버려달라는 외침뿐이랍니다.”

청교도의 소찬과 프랑스식 정찬, 금욕과 사치, 종교와 정치(혁명), 삶과 예술이 바베트의 손끝에서 독자들의 목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왔다.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무라카미 류가 맛보았다는 음식이 어디 디네센이 차려낸 한겨울 해변 마을의 정찬에 비교나 될 것인가. 20세기 최후의 민담 소설가라는 디네센의 만찬은 음식이 곧 삶이라는 걸 어떤 군소리 없이 한달음에 보여준다. 문학동네 펴냄, 추미옥 옮김.
글쓴이 이자크 디네센
글쓴이 이자크 디네센(1885~1962)은 덴마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카렌. 필명인 이자크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 이삭(‘웃음’이라는 뜻)에서 따왔다. 28세에 브로르 폰 블릭센 남작과 결혼해 남작부인이 됐으며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했다. 그곳에서 영국인 사냥꾼 데니스 핀치 해튼을 만나 사랑했으나 연인과 농장을 모두 잃은 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두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소설 ‘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 ‘겨울 이야기’ ‘바베트의 만찬’ ‘카니발’ ‘천사 복수자’, 회고록 ‘아웃 오브 아프리카’, 산문집 ‘결혼에 대하여’ 등을 남겼다. ‘바베트의 만찬’은 가브리엘 악셀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으며, 그의 회고록 ‘아웃 오브 아프리카’도 시드니 폴락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여성동아 2006년 11월 5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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