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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김동희 기자의 비디오 줌~업

엘리자베스타운

자살을 기도하던 중 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남자, 그가 삶의 희망을 되찾는 이야기

글·김동희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06.11.17 18:13:00

잘 나가던 디자이너에서 하루아침에 실직자로 전락한 주인공은 자살을 기도하는 순간 아버지의 부음을 듣는다. 아버지의 추도식을 준비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엘리자베스타운

“실패와 참패는 천지 차이다. 실패는 ‘성공하지 않았다’ 정도의 의미지만 참패는 신화적 수준의 재앙이다. 전설처럼 이야기되고 남들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자신들에겐 그런 일이 닥치지 않았으니까.”
트럭째 반품되는 운동화들 위로 망연자실한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세계적인 운동화 제조회사의 수석 디자이너 드루. 그가 8년 동안 휴가도 반납하며 개발한 신제품 운동화는 회사를 휘청거리게 할 정도의 천문학적 손실을 가져온다. 사장은 그를 직접 해고하며 이렇게 이죽거린다.
엘리자베스타운

“손실액이 9억7천2백만 달러야. 그 금액을 어떻게 하면 실감나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그 정도면 세지도 못해. 중소도시 운영 예산과 맞먹지. 덕분에 환경 감시 프로젝트도 중단해야 해. 우린 지구를 구할 수도 있었는데….”
그간 쌓아온 경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두가 선망하던 대상에서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한 주인공은 자살을 결심한다. 막 실행에 옮기려는 찰나 휴대전화가 울린다. 고향 엘리자베스타운에 다니러 갔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 주인공은 슬픔에 젖을 여유도 없이 아버지의 시신을 가족들이 살고 있는 오리건주의 집으로 옮겨오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장례를 마친 뒤 자살하리라 마음먹으며.

최악의 실패를 겪고 새롭게 발견하는 삶의 아름다움
사람들은 때로 도저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을 맞는다. ‘엘리자베스타운’은 그렇게 ‘콱 죽어버리고 싶은’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도 희망은 있다고, 그래도 삶은 이어갈 만하다고 토닥여주는 영화다.
지역 사회의 일원, 친목회나 동호회의 회원 등으로 폭넓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은 그런 관계의 폭이 좁은 사람에 비해 위기상황을 좀 더 쉽고 능동적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한다. 어느 회사의 회사원, 누구의 아내로서만 자신을 자리매김해온 사람들은 그 유일한 관계에 파탄이 왔을 때 충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 주인공은 굴지의 운동화회사 수석 디자이너로 8년간 일해오는 동안 가족을 포함해 회사 외의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무너진 순간 그의 자존감도 함께 무너진다.
위기상황에서 최후의 보루는 가족이지만 명목상의 가족관계만 유지해온 주인공에겐 버팀목이 되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망 후 여동생은‘맏이니까’라고 말하며 오빠에게 전적으로 장례 절차를 떠넘기고 어머니는 조증에 걸린 사람처럼 이런저런 일을 벌인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아버지를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가 그립다”고 징징거리는 여동생과 통화하던 주인공은 문득 묻는다.
“아버지는 재미있는 분이셨어?”
“물론 재미있는 분이셨지. 특히 오빠가 엄청나게 바빴던 지난 몇 년간 더 재밌어지셨어.”

이 영화의 극본과 감독을 맡은 캐머론 크로는 ‘제리 맥과이어’의 감독. 스포츠 에이전트 역의 톰 크루즈와 속물적인 미식축구 선수 역의 쿠바 구딩 주니어가 숨넘어가게 “Show me the money!”를 외쳐대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연출했다. 같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답게 두 영화는 상당히 닮은꼴이다. 실직과 동시에 모든 것을 잃은 일 중독자 주인공이 새롭게 삶의 의미를 발견해간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엘리자베스타운

드루는 밝고 긍정적인 스튜어디스 클레어를 만나 위안을 받는다.(위) 드루의 아버지를 좋아하던 엘리자베스타운 사람들은 드루를 가족처럼 따뜻이 맞아준다.(아래)


하지만 이 영화는 달콤한 로맨스와 성공담으로 짜릿한 대리만족을 선사한 ‘제리 맥과이어’와는 조금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첫 영화를 발표한 즈음 심장마비로 아버지를 잃은 감독의 자전적 체험이 녹아있는 이 영화엔 오뚝이처럼 일어나 악착같이 세상을 향해 덤벼드는 주인공도 없고 막판 뒤집기 같은 사업상의 성공도 없다. 사회적인 실패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무엇을 바라고 열심히 살아왔나 회의에 빠지는, 나약하지만 인간적인 젊은 남자의 모습을 찬찬히 보여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 드루 역을 올랜도 블룸에게 맡긴 건 적절한 선택인 듯하다. 풍부한 감성이 느껴지는 눈, 성마른 인상을 풍기는 얄팍한 입술선, 가늘고 호리호리한 몸매, 호감을 주지만 할리우드 영웅으로선 2% 부족한 타입. ‘반지의 제왕’에서 금발의 엘프 역으로 인기를 모았고, 서사 대작 ‘킹덤 오브 헤븐’의 주인공을 맡기도 했지만 인생의 고비에서 방황하는 젊은 남자 역할이 훨씬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듯 보인다. 감독은 그의 장점을 “감수성, 진정성, 유머 감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는‘연약함’을 가진 것” 이라고 얘기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다시 시작을 준비하는 여행길…
드루는 켄터키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오지랖 넓고 매사에 긍정적인 스튜어디스 클레어를 만나고, 아버지의 고향 엘리자베스타운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간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사랑했던 고향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사람들에게 애정어린 기억을 남긴 아버지의 생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드루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밤샘 통화를 하며 급격히 가까워진 클레어는 따끔한 말로 그를 자기연민의 늪에서 구해낸다.
“그래요. 당신은 진짜 실패했어요. 실패. 실패. 실패. 실패.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요. 정말 대단한 게 뭔지 알아요? 크게 실패하고도 버티는 거예요. 그러고도 어떻게 미소 지을 수 있는지, 주위에서 의아해 하도록. 그게 진짜 위대한 거예요.”
감독이 “순수하고 순진한 사랑의 메신저”라고 표현한 클레어는 성격 좋은 이웃집 처녀 같은 커스틴 던스트가 맡았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소녀 뱀파이어 클로디아 역으로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를 압도했던 어린 연기 천재는 다른 아역 배우들이 빠져들었던 마약이나 무절제한 생활의 유혹을 피해 성인 연기자 대열에 무사히 합류했다. 그의 밝고 건강한 매력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If it wasn’t this, it’d be something else.)”라는 아버지의 인생 표어를 내건 추도식을 마친 드루는 클레어의 충고를 받아들여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시작한다. 클레어가 그를 위해 만든 특별한 여행지도와 편집 음반과 함께.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미국 중서부의 경관이 차창 밖으로 흐르고 블루스와 포크와 록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관객은 주인공이 마음의 빚과 울분을 털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여행에 동참하게 된다.
그는 여행길에서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자로 낙인찍은 기사가 실린 걸 보게 된다. 그걸 보는 게 두려워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지만 이제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클레어의 긍정적인 메시지가 그를 감싸안는다.
“당신은 지금부터 5분간 달콤한 비참함에 빠집니다. 즐기고 받아들이고 버려요.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요.”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쫓기듯 살아온 사람이라면 삶의 잠언을 툭툭 던져놓는 이 영화의 느린 리듬에 한번쯤 몸을 맡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캐머론 크로(49) 감독
엘리자베스타운
고등학교 재학 중 이미 음악잡지 등에 글을 기고했으며, 졸업 후 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 등에서 일했다. 십대들의 삶을 다룬 소설 ‘리치몬드 연애소동’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작품이 영화화되자 시나리오도 맡았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금지된 사랑’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톰 크루즈 주연의 ‘제리 맥과이어’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올랐고 ‘올모스트 페이머스’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다.


여성동아 2006년 11월 5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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