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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남다른 인연

30여 년간 선의의 경쟁 벌여온 성우 최고의 맞수 배한성·양지운

“같은 길 함께 걸어온 평생 동지가 있어 든든합니다”

글·송화선 기자 /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 2006.09.21 15:35:00

매력적인 목소리와 재치있는 입담으로 30여 년간 정상을 지키고 있는 성우 배한성·양지운. ‘스타스키와 허치’ ‘아마데우스’ 등 각종 외화에서 콤비로 열연했던 두 사람이 이번에는 애니메이션 ‘가필드2’로 다시 만났다. 늘 자신을 자극하는 최고의 맞수가 있어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두 사람의 남다른 인연.
30여 년간 선의의 경쟁 벌여온 성우 최고의 맞수 배한성·양지운

‘6백만불의 사나이’ ‘스타스키와 허치’ ‘맥가이버’ ‘야망의 계절’….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작 외화 시리즈를 떠올릴 때면 늘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감미롭고 중후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우리를 울고 웃기던 숨은 주인공, 자막 영화에서는 미처 느낄 수 없는 2%의 감동을 선사하던 성우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맥가이버’ 배한성(60)과 ‘6백만불의 사나이’ 양지운(58)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성우계의 양대 산맥이다.
‘스타스키와 허치’의 괴짜 형사 콤비,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등으로 열연했던 두 사람이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 ‘가필드2’에서 다시 짝을 이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장난스럽고 통통 튀는 목소리로 유명한 배한성은 재치 만점 고양이 ‘가필드’를 맡아 개성 넘치는 캐릭터의 매력을 생생히 살려냈고, ‘숀 코너리’ ‘해리슨 포드’ 등 선 굵은 배우들의 더빙을 전문으로 해온 양지운은 타고난 ‘귀족적 음색’으로 왕자 고양이 ‘프린스’를 표현했다.
변함없는 목소리 덕분에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이들은 사실 성우 경력이 40년에 이르는 베테랑들. 배한성은 66년 TBC 성우 2기로 데뷔했고, 양지운은 같은 회사 3년 후배다. 라디오 드라마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 성우계에 입문한 두 사람은 ‘층층시하’ 선배들 사이에서 우연히 주어진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덕분에 ‘스타’로 성장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30여 년간 선의의 경쟁 벌여온 성우 최고의 맞수 배한성·양지운

‘가필드2’를 녹음하고 있는 배한성, 양지운(왼쪽부터).


“정상 유지 비결은 끝없는 노력, 한 번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지금껏 지켜왔어요”
성우가 되고 싶어 서라벌예술대학 방송연예과에 진학한 배한성은 대학 1학년 때인 66년 꿈에 그리던 TBC 성우가 됐다고 한다. 당시 입사시험에서 “TBC 사장과 TBC 성우 가운데 뭐가 더 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고 “당연히 성우”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우’ 외의 직업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고. 하지만 갓 스무 살 된 그에게는 자신의 끼와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환갑이 다 된 지금도 ‘동안’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는 얼마나 어려 보였겠어요. 다들 어린아이 취급하고 잘 끼어주지도 않았죠. 어떤 선배들은 저를 사환으로 오해하기도 했어요(웃음). 성우시험에만 합격하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낙담했죠. 그래도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연습을 계속했어요. 저희 학교에 성우 교육으로 유명한 교수님이 계셔서 늘 따라다니며 방학 때도 ‘특별 교습’을 받았죠.”
입사 2년 만에 기회가 왔다. TBC가 라디오 대하 드라마 ‘삼국지’를 시작하며 어린 황제 역에 한 선배를 캐스팅했는데 그가 녹음 당일 펑크를 낸 것이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제작진은 무작정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1시간이 넘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나봐요. PD가 어린 역할이니까 제 생각을 하고는 ‘얼마 전에 들어온 그 어린아이 한 번 데려와봐라’ 했다더군요. 녹음이 없어서 혼자 도서관에 가 있던 저에게 그 역이 주어진 거죠.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게 일생일대의 기회거나 아니면 영영 다시는 주역을 맡을 수 없는 위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한성은 주어진 대본을 평소 연습한대로 읽어내려갔다고 한다. 대사가 꽤 많은 역할이었는데 첫 녹음이 끝나자 선배들이 “잘했다”며 박수를 쳐줬다고. 특히 성우계의 전설이던 구민은 “너는 기본기가 충실하니까 앞으로도 지금만큼만 하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3회 분량의 녹음이 끝나자 담당 PD는 아예 “이 역은 배한성이 맡는 게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양지운이 스타가 된 계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배한성이 너무 어리다는 점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면 양지운은 경남 통영 출신이라는 게 약점이었다.
“거제 출신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경제’ 발음을 못해 IMF를 맞았다는 우스개가 있었잖아요. 바로 이웃 통영 출신이니 저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성우가 된 뒤에도 부정확한 발음 때문에 배역을 맡는 게 쉽지 않았죠. 사투리를 고치려고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어요.”
입사 후 몇 년 동안 단역만 전전하던 그에게도 ‘선배의 펑크’가 기회가 됐다. 그의 출세작 ‘6백만불의 사나이’는 사실 다른 선배가 캐스팅된 작품이었다고.
“‘6백만불의 사나이’ 시리즈를 시작할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 파일럿 편성을 한 때였어요. ‘주말의 명화’로 한번 나가게 됐는데, 주인공 역을 맡은 선배가 지각을 한 거예요. PD가 옆에 있던 저에게 ‘네가 대본 좀 체크해봐’ 하더라고요. 영화를 틀어 놓고 대본 분량과 영화 장면이 맞나, 잘못된 부분은 없나 말 그대로 ‘체크’를 했죠. 그런데 그걸 다 마친 뒤까지도 선배가 안 오더라고요. 결국엔 PD가 화가 나서 ‘아까 대본 봤던 네가 해보라’며 녹음에 들어갔죠.”

30여 년간 선의의 경쟁 벌여온 성우 최고의 맞수 배한성·양지운

30여 년간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성우’의 대명사 배한성, 양지운.


양지운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녹음은 방송 다음 날 영화부장이 직접 불러 “대단했다”고 칭찬할 만큼 화제를 모았고, 양지운은 77년 ‘6백만불의 사나이’가 정규 편성될 때 주인공을 맡았다. 매주 한 번씩 3회쯤 방송이 나가고 나자 그는 ‘6백만불의 사나이’ 실제 주인공 리 메이저스의 인기를 능가하는 스타가 됐다고.
“당시엔 그 시리즈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거든요. 아이들이 주인공을 흉내내며 높은 데서 뛰어내리다 사고가 났다는 기사가 연일 신문에 실리곤 했죠. 나중엔 주인공이 뛰어내리는 장면을 편집해서 아예 방송에 안 내보냈을 정도였어요(웃음).”
각자 스타가 된 두 사람에게는 그때부터 온갖 배역이 몰려들었고, ‘시간이 없어서 일을 못할 정도로’ 바빠졌다고 한다. 배한성은 “돌아보면 당시가 목소리 연기의 전환기였던 것 같다. 선배들은 상대방을 ‘경아~’ 하고 ‘폼 나게’ 부르며 과장된 연기를 했는데, 우리들은 ‘경아야’ 같이 현실적인 목소리를 냈고, 그런 새로움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드럽고 개성 강한 배한성, 선 굵은 남성미를 보여주는 양지운
서로 경쟁관계가 될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이 멋진 콤비가 된 건 서로의 개성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라고. 배한성이 달콤하고 감각적인 목소리의 대명사였다면, 선 굵은 남성적 연기는 양지운의 몫이었다. 양지운은 ‘두 얼굴의 사나이’의 데이비드 배너 박사, ‘에어울프’의 호크 등으로 인기를 모았고, 숀 코너리, 마이클 더글러스, 로버트 드니로 등을 도맡아 연기했다. ‘캐빈은 열두 살’의 캐빈, ‘가제트 형사’의 가제트, ‘외계인 알프’의 알프 등은 모두 배한성의 목소리. 더스틴 호프먼이나 로빈 윌리엄스, 젊은 시절의 성룡 등도 그가 맡았다. 남성 콤비가 필요할 때는 두 명이 함께 마이크를 잡았다.
명콤비의 탄생을 알린 건 80년대 초반 KBS에서 방송된 ‘두 얼굴의 사나이’. 촉망받는 물리학자와 초록색 괴물 헐크 사이를 오가는 비운의 주인공 데이비드 배너 박사는 양지운, 그의 비밀을 추적하는 신문기자 잭 맥기는 배한성이었는데, 이들의 찰떡 호흡은 이후 ‘스타스키와 허치’ ‘후커와 로마노’ ‘아마데우스’ 등으로 이어졌다.
“같이 참 많은 작품을 했는데도 에피소드가 별로 없어요. 실수를 해야 NG도 나고 재미있는 일도 생기는데 둘 다 실수를 거의 하지 않았거든요. ‘스타스키와 허치’처럼 두 사람이 거의 극 전부를 끌고 가는 작품을 할 때는 PD들이 ‘생방송 같다’고 할 정도였어요. 다른 배우들은 1시간짜리 영화를 녹음하면 1시간 30분에서 2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우리는 1시간 5분 정도면 딱 끝냈기 때문이죠. 워낙 집에서 연습을 많이 해오는데다 서로 감각이 맞아서, 누가 애드리브를 치면 바로 맞대응하며 척척 진행해갈 수가 있었어요.”
지금도 녹음실에 들어가면 ‘눈빛만 봐도 상대가 어떻게 치고 나올지 알 수 있다’는 양지운의 말에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는 배한성의 모습을 보니 ‘명콤비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함께 작품을 해오며 상대가 밉거나 질투가 났던 적은 없을까.
“처음에는 어떤 역이든 자유자재로 연기하는 배한성 선배가 부러웠어요. 어떻게 하면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싶어 코를 막고 흉내내본 적도 있죠. 하지만 생각해보니 굵고 중후한 목소리가 저의 개성이더라고요. 그 뒤부터는 상대적으로 고상한 제 목소리에 만족하기로 했죠(웃음).”
“‘양 스타’(배한성은 후배라도 ‘스타’는 대접해줘야 한다면서 그를 이렇게 불렀다)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아요. 신인 시절에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고상했죠’(웃음). 사실 방송계 3년 후배면 ‘야, 임마!’ 하고 한 번 불러봤을 법도 한데 그런 기억이 없어요. 제게는 늘 ‘양 스타’고, 그래서 참 고맙고 자랑스러워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칭찬하며 너털웃음 짓는 두 사람의 바람은 더 늦기 전에 자신들을 능가하는 후배가 나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배한성은 서울예대에서, 양지운은 서울종합예술전문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 양지운은 일반인을 위한 목소리 지침서 ‘당신의 감춰진 매력, 목소리로 업그레이드하자’도 펴냈다.
훌륭한 성우가 되려면 멋진 목소리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정성과 깊이까지 겸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두 사람은 “언제든 후배들에게 이 자리를 물려줄 준비가 돼있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아직은 배한성과 양지운이 그들의 자리에 머무르면서 고상하고 개성 넘치는 ‘정상의 목소리’를 좀 더 오래 들려주었으면 하는 것이 많은 이들의 바람 아닐까.

여성동아 2006년 9월 5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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