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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또 다른 도전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 집행위원장 맡은 배우 장미희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 ■ 장소협찬·이탈리안 레스토랑 몬탈치노(02-794-5875)

2006. 08. 24

영화배우 장미희가 국내 최대 규모의 어린이 영화제인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변신했다. ‘전직 어린이’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다는 배우 장미희의 꿈과 포부.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 집행위원장 맡은 배우 장미희

배우 장미희(49)에게는 늘 공주 같은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가녀린 목소리, 수줍은 듯한 미소, 교양 있는 말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그런데 지난 7월 중순 서울 이촌동 한 레스토랑에서 마주한 장미희는 많이 달라 보였다. 수트를 입고 서류 파일을 꺼내든 그는, 공주라기보다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신입사원 같았다.
장미희는 오는 9월14일부터 19일까지 경기도 고양시에서 열리는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이하 어린이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올해부터 4년 동안, 예산 면에서 세계 10위 안에 드는 이 대규모 영화제를 총괄하게 된다.
“아이를 키워본 적도 없는 사람이 어린이영화제를 잘 이끌 수 있을까 싶어서 처음엔 많이 망설였어요. 두 번이나 사양했죠. 그런데 여섯 남매를 돌보는 홀어머니 역할을 맡았던 드라마 ‘육남매’나 고아들을 키우는 수녀로 나왔던 영화 ‘보리울의 여름’ 때문인지, 자꾸 제가 적임자라고 권하시는 거예요(웃음). 왠지 더 이상은 거절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맡게 됐죠. 책임이 생기고 난 뒤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진 걸 보면,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이었나봐요.”
장미희는 영화제가 끝날 때까지는 배우로서의 삶을 잠시 미뤄두겠다고 말했다. 막상 업무를 시작하고 보니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모자란다고. 특히 그는 이번 영화제를 장애 어린이, 소년소녀 가장, 저소득층 자녀 등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아이들과 일반 어린이들이 한데 어울리는 ‘축제’로 만들고 싶다며 들뜬 꿈을 내비쳤다.
“눈이 보이지 않는 어린이들은 소리와 빛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들은 자막으로 영화를 보고 느낄 수 있게끔 특별한 공간을 만들 거예요. 이름을 ‘오감극장’이라고 붙였는데, 휠체어를 탄 아이들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내부 복도와 좌석을 널찍하게 했죠. 그 안에서는 세상 모든 아이들이 영화를 ‘체험’할 수 있을 거예요.”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 집행위원장 맡은 배우 장미희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배우 장미희.


그는 어린이영화제 기획회의 때면 스태프 모두가 피터팬으로 돌아가 다양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쏟아낸다며 즐거워했다. 1976년 영화 ‘성춘향전’으로 데뷔한 지 올해로 꼭 30년째. 짧지 않은 세월을 영화와 함께 살아온 그에게 영화는 직업이면서 동시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꿈이라고 한다.
“연기를 쉰 적은 있어도 영화와 떨어져 있어본 적은 없어요. 지금도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인정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모든 예술영화를 보고, 각종 영화제 심사위원도 하죠. 학교(명지전문대 연극영상과)에서 제자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영화는 저를 지치게 하지 않아요. 언제나 설레게 만들죠. 일하다 힘들고 지칠 때는 또 영화를 보니까요(웃음). 아이들에게 그 아름다운 세상을, 뭐든지 이룰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그는 각종 회의에 참석하느라 ‘보따리 장사’처럼 잔뜩 서류를 들고 뛰어다니고, 기업체 후원을 받기 위해 때로는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해도 “이 일을 맡기 잘했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미희는 영화제를 소개하며 끊임없이 ‘세상 모든 어린이’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어린이’는 누구인지, 장미희는 누구의 눈으로 어린이영화제를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사실 저는 아이가 없고, 조카들도 이미 다 대학생이 돼서…” 하며 말을 아끼던 장미희는, 어쩌면 이 영화제를 만들며 늘 생각하는 건 ‘전직 어린이’였던 자기 자신인지도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 장미희는 또래에 비해 키가 훌쩍 크고 운동을 좋아하는 ‘선머스마’였다고 한다. 늘 머리를 짧게 자르고 집 밖에서 뛰놀아 사람들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도 못할 정도였다고. 남자 아이들도 거뜬히 제압하는 운동 실력에 카리스마를 갖춰 또래들은 모두 다 그의 친구였다고 한다.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 장미희는 이처럼 자유롭고 거침없던 그의 어린 시절이, 철이 채 들기도 전 영화배우로 데뷔하고 이후 정신없이 살아온 자신을 늘 든든하게 지켜준 버팀목이었다고 회고했다.
“아무리 힘들 때라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런 행복이 없잖아요. 어른이 됐을 때 돌아볼 어린 시절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어른으로서 제가 미안했어요. 어쩌면 환경운동을 하는 것도 어린 시절 뛰놀던 자연을 그 상태 그대로 보존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일 거예요(장미희는 환경운동단체 ‘환경재단 136 포럼’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어린이영화제 일을 맡고 나서부터 프로그램을 짜고 회의를 할 때면 전 다시 어린 시절 장미희로 돌아가죠. 그래서 내가 이 영화를 봤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친구들과 함께 영화제가 열리는 호수공원을 뛰어다녔다면 얼마나 신났을까 생각해요.”
장미희는 이 영화제를 통해 아이들에게도 아름다운 추억, 마음껏 뛰논 축제의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린이영화제 포스터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모하고,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 어린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영상캠프’를 열어 이들이 직접 촬영한 작품을 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줄 계획이라고 한다.
영화제 이야기에 한껏 들떠있는 장미희에게 그동안 너무나 많이 들어왔을 질문을 또 한번 던져보았다. 그렇게 어린이들을 사랑하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밀 생각은 없는지였다. 질문이 시작되자 그는 벌써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웃기만 했다.
“사랑에 빠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사랑이 찾아올 때 느껴지는 설렘이 그리울 때도 있죠. 제가 단단하게 저만의 성을 쌓고 사는 건 아닌가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사랑이 오는 걸 피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기회가 오지 않는 것뿐이에요.”

“사랑할 기회가 온다면 피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연기 욕심이 더 커요”
그러면서도 장미희는 지금은 사랑에 대한 꿈보다는 배우로서의 욕심이 더 크다고 말을 이었다. 이번 영화제가 끝나면 다시 멋진 연기자로 돌아오고 싶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배우는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배역을 맡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 엄마’ ‘누구 할머니’가 아닌, 제 캐릭터가 살아있는 역할을 연기하며 평생 배우로 살고 싶어요. 배우는 제 천직이니까요.”
장미희는 여전히 꿈이 많다. 그는 오늘날 중년 여배우들이 흔히 맡는 전형적인 역할뿐 아니라 ‘매트릭스’의 여전사 트리니티같은 카리스마 있는 검객이나 ‘베를린 천사의 시’에 등장하는 천사처럼 성별과 나이가 모호한 존재를 연기해보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청춘이 지난 후에도 계속되는 삶과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중년의 페르소나가 되고 싶다는 꿈도 밝혔다.
디자이너 정구호에게 ‘완벽한 55 사이즈 마네킹 몸매’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여전히 건강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장미희는 어떤 역할이든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되기 위해 평소 채식을 하고, 매일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한다고 한다. 집에서 키우는 삽살개 ‘양배추’를 꼭 끌어안고 건강한 심장 소리를 느낄 때, 앵무새 ‘이사벨’에게 입으로 모이를 물어줄 때 충만한 행복감을 느낀다는 장미희. 많은 것을 이룬 스타면서도 여전히 꿈 많은 소녀 같은 그가 오래도록 멋진 배우로 우리 곁에 머무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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