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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마다 시 배달하는‘접시꽃 당신’ 시인 도종환

기획·김명희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 2006.08.18 17:16:00

‘접시꽃 당신’으로 수많은 이들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도종환 시인이 지난 5월부터 ‘문학 집배원’이 됐다. 건강악화로 교단을 떠나 3년 전 속리산으로 들어간 그를 만나, 산중 생활과 월요일 아침마다 이메일을 통해 시를 배달하는 사연을 들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시 배달하는‘접시꽃 당신’ 시인 도종환

오래오래 느긋하게 살고 싶다는 뜻에서 집 이름을 거북 구(龜)자를 둘이나 넣어 ‘구구산방’이라고 지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한적한 강마을로 돌아가/ 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 맑고 때 묻지 않은 청년으로 돌아가고 싶다.’(‘그리운 강’에서)
도종환 시인(52)은 그의 바람을 이룬 것 같다. 비록 ‘한적한 강마을’은 아니지만 ‘한적한 산마을’에 위치한 황토집에서 4년째 ‘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장마 중간 햇볕이 유난히 뜨겁던 날, 도종환 시인을 만나기 위해 충북 보은 속리산 자락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마을과 연결된 비포장도로 끝까지 가서 차를 세워놓고, 또다시 산속 오솔길을 500m쯤 더 걸어가니 황토집이 눈에 들어왔다. 집 둘레는 잔디가 초록색 이불처럼 깔려있고, 마당 한쪽에는 검은색 자연석이 병풍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옆에는 어느 날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작은 연못도 있고, 그 연못 위로 난 비탈길을 올라가면 그가 가꾼 작은 텃밭도 있다.
“전교조 활동을 함께했던 후배가 암 선고를 받은 동생을 위해서 지은 집이에요. 그 후배의 동생이 3년 살다 저 세상으로 간 후 제가 들어와 살게 됐지요.”
“집과 주변 경관이 멋지다”고 연신 감탄을 하자, 그는 “봄·여름·가을에는 더없이 좋지만 겨울에는 그렇지만도 않다”고 귀띔했다.
“겨울에는 밤 10시부터 새벽까지 심야전기만 들어오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장작을 패서 벽난로에 불을 지펴야 해요. 더구나 한파가 몰아치면 수도가 꽁꽁 얼기 일쑤예요. 길이 얼어버리면 수리하는 사람도 들어오질 못하니 꼼짝없이 며칠씩 물도 없이 지내야 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땐 눈을 퍼다가 녹여서 달걀을 삶아 먹으면서 끼니를 때우곤 하죠(웃음).”

자연 속에서 느리게 살면서 건강 회복해
그는 지난 2003년 ‘자율신경 실조증’이란 진단을 받고, 정들었던 교단과 가족을 떠나 홀로 이곳 속리산 외딴집으로 들어왔다. 이름조차 낯선 그의 병은 몸의 균형이 깨지고 심신이 허약해져 쉽게 피로가 찾아오고 잔병이 들면 잘 낫지도 않는 병이라고 한다. 일 중독자에게 찾아오기 쉬운 병인데, 당시 그는 학교 일에 전교조와 민예총 등 시민운동, 시 쓰기, 방송일까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예전엔 혼자서 1인 4역, 5역을 하면서 바쁘게 살았어요. 그것도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면서요. 하지만 이곳에 들어와서는 마음을 비우고 여유롭게 지내고 있죠. 그러니까 건강이 좋아지더라고요. 무엇보다 자연 속에 병을 치유하는 힘이 내재돼 있는 것 같아요.”
충북 청주 무심천 변에서 태어난 그는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제 인생에서 평화롭던 날들은 열 몇 살 전후해서 끝났어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고향을 뜨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죠. 저는 외가에 맡겨졌고, 앞 못 보는 할아버지는 고모네 집에 고단한 육신을 의탁해야 했고, 부모님은 강원도로 떠났어요. 그래서 전 어려서부터 혼자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독히 가난했던 그는 ‘돈이 가장 적게 든다’는 이유로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월세 2천원짜리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사는 형편에 사치스럽게 무슨 대학을 다닌단 말인가’라는 생각에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대인기피증을 앓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 무렵, 그는 시를 만나 위로를 받았다.

월요일 아침마다 시 배달하는‘접시꽃 당신’ 시인 도종환

그는 사범대를 졸업한 뒤 교단에 섰고 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등단, 시인이 됐다. 더 이상 고통이 없을 줄 알았지만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혼 2년여 만에 그는 아내와 사별했고, 89년에는 전교조 활동으로 학교에서 해직됐다. 게다가 엄마도 없는 어린 아들과 딸을 남겨두고 2개월간 구속까지 됐다. 98년 9년 만에 다시 복직돼 충북 진천 덕산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지만 그의 평온은 역시 얼마 가지 못했다. 2003년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더니, 의사는 그에게 “몸과 마음을 너무 혹사해서 병이 생겼다”며 “모든 걸 버리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TV도 없는 산속 외딴집,
텃밭에서 채소 가꿔 산짐승과 나눠 먹으며 살아

“그해 두 번 휴직계를 냈어요. 어렵게 복직된 만큼 어떻게든 견뎌보려 했지만 몸이 더 나빠져 버티는 게 불가능했죠. 요즘은 산속에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몸이 먼저 정지신호를 보내지 않았다면 이런 귀한 시간들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또 몸의 균형이 깨진 상태로 계속 무언가를 한다고 휩쓸려 다녔다면 더 많은 일을 그르쳤을 것이고요.”
인터뷰 도중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그가 등단시켰다는 시인이 수박을 한 통 사들고 부인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우편 배달부도 다녀갔다.
“오늘은 손님이 많이 온다”며 밝게 웃는 그에게, “TV도 없고, 인터넷도 안되고, 신문도 안 들어오는 산속 외딴집에서 오랫동안 홀로 지내면 외롭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아들 한길이와 딸 한결이도 종종 내려오고, 청주에서 직장 다니는 아내도 자주 다녀간다”고 말했다. 그는 해직 당시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은 민경자씨(52)와 91년 재혼했다.
“사람이 없으면 자연을 벗 삼으면 되니 외로울 일은 없어요. 텃밭에 상추와 쑥갓을 함께 심었는데, 어느 날 일어나보니 쑥갓이 없어진 거예요. 상추는 그대로 있고요. 알고보니 씁쓸한 것을 좋아하는 고라니가 밤새 먹고 간 거예요. 그래, 니들도 먹고 살아야지 싶었죠. 그래서 상추는 제가 먹고 쑥갓은 고라니가 먹고, 그렇게 함께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어요(웃음).”
자연도 벗이 돼 그를 어루만져 주었지만, 무엇보다 시가 그의 외로움, 그리움, 슬픔을 어루만져 주었다고 한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그는 다른 사람들도 시를 통해 외로움과 그리움과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길 바랐다. 그리고 생활에 쫓기는 사람들의 일상에 잔잔한 감동을 던지고 싶었다고 한다. 요즘 그는 매주 월요일마다 이메일을 통해 시 한 편씩을 배달하고 있는데 지난 5월부터 ‘문학 집배원 도종환의 시 배달’을 시작한 것.
‘…시 배달’은 시집이나 문예지에 발표된 시 중에서 매주 한 편씩 골라 그림, 사진, 애니메이션 등을 활용해 움직이는 이미지 플래시로 제작, 거기에 그의 육성이나 성우 등의 낭송을 덧입혀 전국 각지의 회원들에게 월요일마다 배달하는 서비스다. 2개월 만에 수신자가 무려 7만 명을 넘어섰고 지금도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홈페이지(www.for-munhak.or.kr)를 통해 계속해서 개인이나 단체별로 수신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이 없는 그는 자신이 고른 시를 가지고 회의를 하고 또 녹음을 하기 위해 한 달에 두어 번 서울에 올라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수고로움이 귀찮기는커녕 마냥 즐겁다고.
“월요일 아침에 좋은 시 한 편을 읽으며 한 주를 아름다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드리는 시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위안이 되고 힘이 된다면 기쁠 거예요. 앞으로는 짬뽕, 자장 하나씩이요 하듯, 시도 원하는 대로 배달해주고 싶어요. 생일 축하시 하나요, 시련당했을 때 위로해줄 수 있는 시 하나요, 이런 식으로 말이죠(웃음).”
그는 또 지난 4월에는 ‘해인으로 가는 길’이란 시집을 내기도 했다. ‘해인’은 풍랑이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를 말하는 불교 용어라고. 말하자면 번뇌의 물결, 탐욕의 물결이 가라앉은 상태에 대한 시적 비유인 셈이다. 이 시집은 지난해 2월부터 올 1월까지 ‘아름다운 가게’ 홈페이지에 소개한 시 중에서 60여 편을 묶어 만든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시집의 인세를 아름다운가게에 모두 기증하기로 했다. 그 수익금은 충북 민예총을 통해 ‘베트남 평화학교 짓기’ 사업에 쓰일 예정이라고.
“이 시집을 내면서 ‘시로 인해 생긴 이윤이 내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어요. 직장도 없는데 그나마 시집 인세도 챙기지 않으면 어떻게 생활하려 하느냐고, 그거 만용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먹고살기도 힘든 백수 주제에 잘난 체한 거죠(웃음). 앞으로 시집 낼 때마다 계속 이러진 못하죠. 저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단지, 이번 시집에 실린 것들은 어차피 아름다운가게에 소개된 것이기에 제 것이 아니라 생각했던 거예요.”
그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고 시를 만날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그 은혜를 어떻게든 갚는 게 도리인데,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재산이 바로 시이기에 그는 그걸 드리는 것뿐이라며 겸손하게 웃는다.

여성동아 2006년 8월 5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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