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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예술가의 초상

초정 김상옥 시인 1주기 맞아 유고전 열고 시 전집 펴낸 딸 김훈정

“사랑과 미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를 뒤늦게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됐어요”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홍중식 기자

2005. 12. 07

유명한 시조시인으로 ‘이 시대 마지막 선비’로 불리던 초정 김상옥 선생이 타계한 지 1주기를 맞았다. 고인의 장녀 김훈정씨를 만나 초정 선생의 예술 사랑과 가족 사랑을 들어보았다.

초정 김상옥 시인 1주기 맞아 유고전 열고 시 전집 펴낸 딸 김훈정

가람이 병기의 뒤를 이어 한국 현대시조사의 한 획을 그은 시조시인이면서 그림과 글씨에도 능해 ‘이 시대 마지막 선비’라고 불리던 초정 김상옥 선생이 작고한 지 1년이 지났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초정을 잊지 못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장녀 김훈정씨(59)의 심정은 남다르다. 지난 10월 ‘김상옥 시인 유품·유묵전’을 열고, 초정의 시 전집 ‘김상옥 시 전집’(창비)과 일화집 ‘그 뜨겁고 아픈 경치’(고요아침)도 펴냈다.
“지난해 10월26일 허리 골절로 입원 중이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닷새 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사실상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안 지 딱 하루 만에 돌아가신 거예요. 충격을 받고 쓰러지실까 걱정돼 알리지 않다가 발인 전날에 비로소 말씀을 드렸거든요.”
62년을 함께 살아온 부인 김정자씨의 죽음을 알았을 때 초정은 자식들이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담담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아버지 걱정을 가장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울먹였을 뿐이었다고. 그래서 그와 동생들(초정은 슬하에 훈정, 훈아, 홍우 3남매를 두었다)은 한시름을 덜었는데, 발인하는 날 새벽 잠깐 집에 들러 눈을 붙이던 여동생 훈아씨는 엄청나게 큰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고 한다. 자식들 앞에서는 담담했던 아버지가 어둠 속에서 혼자 목 놓아 울고 있었던 것이다.
“발인 다음 날, 아버지는 여동생(둘째 딸 훈아씨가 마지막 3~4개월 동안 초정 부부와 함께 살았다)과 조카를 재촉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어머니 묘소에 가셨어요. 아버지는 어머니 묘소 앞에서 ‘자네 혼자 쓸쓸하지 않겠느냐. 이제 그만 나를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셨대요. 그러고는 서울 집에 도착해 동생과 조카가 거실 소파에 앉혀드렸는데 아버지의 팔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고 해요.”
2004년 10월31일 부인의 묘소에 다녀온 그날 오후, 향년 85세의 초정은 그렇게 평소의 성격대로 ‘벼락 치듯이’ 먼 길을 떠났다.
“유별난 아버지를 감당하기에 우리 자식들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젊은 우리 셋을 합해도 늙고 병든 어머니 한 분보다 못하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효도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렇게 홀연히 가신 것 같아요.”
초정은 15년 전쯤 넘어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큰 수술을 했고, 불편한 몸으로 활동을 하다가 2000년 다시 낙상을 해 보행보조기 없이는 혼자 일어날 수도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초정을 부인 김씨는 자그맣고 가녀린 몸으로 15년 동안 자신의 허리가 부러져나가는 것도 모른 채 수발을 들었다고.
초정 김상옥 시인 1주기 맞아 유고전 열고 시 전집 펴낸 딸 김훈정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셨어요. 그런데 X레이 촬영 후 의사가 ‘이번에 다친 부분 외에도 이미 네다섯 군데 골절이 있었는데 그것이 굳어서 붙어 있다. 어떻게 이런 허리로 지낼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들더라고요.”
일제 강점기 때 서당과 보통학교를 나온 것이 학력의 전부인 초정은 생계를 위해 14세 때부터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인쇄공을 시작으로 서점과 도장포를 경영하기도 했고, 고향인 통영을 비롯해 부산, 마산, 삼천포 등지에서 20여년간 중·고교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1963년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종로구 인사동에서 표구사와 골동품 가게를 경영하기도 했다. 시는 물론이고 글씨와 그림, 전각과 도예, 그리고 고미술 수집(초정은 수집도 예술의 한 분야라고 생각했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예술에 두루 능했던 그의 재능은 이처럼 젊은 시절 ‘먹고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린 시절, 가족보다 예술이 먼저였던 아버지에게 섭섭함 느끼기도
초정 김상옥 시인 1주기 맞아 유고전 열고 시 전집 펴낸 딸 김훈정

고 초정 김상옥 시인 유고전에 전시됐던 고인이 사용하던 서화 도구들.


그는 19세 때인 1939년에 가람 이병기에 의해 문예지 ‘문장’에 시조 ‘봉선화’가 추천되고, 시조 ‘낙엽’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해 가람의 뒤를 잇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사람들이 자주 ‘훌륭한 아버지를 둬서 얼마나 좋겠냐’고 해요.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햇빛이 강하면 어둠이 짙다고 하잖아요. 우리 가족은 사실 그런 아버지를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아버지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가족에게도 평범함이 허락되지 않았죠. 그걸 받아들이는 데 참 오래 걸렸어요.”
어릴 적 김씨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어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아버지와 다르게 살려고 했고, 반항도 많이 했었다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갈등과 반항은 자신이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에 생긴 것 같다고 했다.
한때 그는 아버지인 초정의 예술에 대한 사랑이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앞선다는 생각이 들어 항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초정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머물 뿐이었다고.
“아버지의 시 중에 ‘무연(無緣)’이란 시가 있어요. ‘뜨락에/ 매화 등걸/ 팔꿈치 담장에 얹고// 길 가던/ 행인들도/ 눈여겨보게 한다// 한솥에/ 살아온 너희는/ 언제 만나 보것노.’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이 시를 보고 배반감마저 느꼈어요. 남들은 가던 길도 멈추고 아버지의 빼어난 솜씨를 찬탄하는데 부부로, 부녀로 연을 맺은 우리는 정신적으론 아예 만나본 적도 없는 타인이라는 뜻이잖아요. 특히 헌신적인 어머니에 대해서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누구보다 식구들과 어서 빨리 진정으로 소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보인다고 한다. “소통이 안 되는 당신의 식구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언제 만나보겠냐고 탄식하셨을까. 아버지가 안쓰럽기까지 하다”며 그 마음을 더 일찍 알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 했다.
초정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진리나 선함보다도 앞서는 절대적인 가치였다고 한다. “아름다움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귀한 돈을 주고 사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고. 그래서 초정은 전셋집에 살면서도 그 전셋돈의 두 배나 되는 돈을 주고 골동품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이 그토록 강했던 초정이지만, 딸의 결혼을 위해서는 목숨만큼 소중하게 아끼던 도자기를 처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를 쓰는 일이 복되지만, 돈이나 생활이 되지는 못한다”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기 위해 손이 붓고 팔을 다칠 만큼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가족보다 예술을 사랑하셨지만 가장으로서 가족에 대한 책임도 소홀하지 않으셨던 아버지께 정말 감사드려요. 그리고 아버지가 짊어지고 계셨던 그 짐의 무게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나요.”

힘있는 사람들에게 한번도 고개 숙이지 않았던 아버지 역시 외로운 한 인간이었던 것을 깨달아
그는 “아버지는 냉혹할 정도로 완벽주의자에다가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고 중간이란 없었던 사람”이라며 “그런 엄격함이 섭섭하고 참기 어렵기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고고한 삶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힘 있는 사람들과 늘 맞섰어요. 아버지가 그들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저는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남들이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좌익이라고 내칠 때도 아버지는 눈치 보지 않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경찰을 피해 생사를 같이했던 친구를 당당히 옹호하셨고, 그분이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외국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도 남들이 꺼리는 추도위원장을 맡아 마지막 길을 위로하셨죠.”
하지만 그는 “그토록 크고 대단하게만 여겨지던 아버지 역시 ‘외로운 인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초정 김상옥 시인 1주기 맞아 유고전 열고 시 전집 펴낸 딸 김훈정

“2000년 아버지는 두 번째 낙상을 하고 병원에 입원해 계시면서 병상일지처럼 두 권의 서첩을 쓰셨어요. 지난해 봄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그 서첩을 제게 주셨죠. 거기엔 아버지 시들을 비롯해서 다른 시인들의 시들도 적혀 있었고, 새로 쓰신 몇 편의 미발표 시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시들 말미에는 더러 간단한 소회를 적은 글들이 있는 거예요.”
그중에는 자작시 ‘안개 낀 항구’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 낙서처럼 이렇게 써놓았다고 한다.
‘(초정이 태어난 집이 있던 통영의) 선창골에 밤이 되면 선고(先考)께서는 나를 업고 안개 낀 항구를 돌며 떡국과 곶감을 사주시기도 하였다. 마령(馬齡) 80에 나는 나의 선고가 그립다.’
김씨는 이 글을 읽으며 “거인으로만 다가왔던 아버지 역시 당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아들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한다.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겠네.’(초정의 시 ‘어느 날’ 전문)
그가 대학생이었을 때 초정이 쓴 시라고 한다. 그의 구두를 맞출 때면 초정은 함께 명동에 있던 칠성화점에 가서 직접 스케치를 하고 그대로 만들어줄 것을 당부하곤 했는데, ‘어느 날’은 바로 그렇게 맞춘 구두를 같이 찾으러 갔던 날이라고.
“그날 아버지는 모처럼 저를 데리고 명동에 외출을 간 김에 다방에라도 들러 향이 좋은 커피를 함께하면서 새 구두의 뒤풀이를 하실 요량이셨던 것 같아요. 당신 디자인을 자랑하면서 제 찬사를 들어야 하는 건데, 제가 무슨 약속이 있었던지 새 구두를 신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린 거예요. 홀로 남겨진 아버지가 그런 제 뒷모습을 보고 이 시를 쓰셨대요.”
그때의 아버지 나이를 훨씬 넘겨 그때의 자신보다 나이 많은 자식을 갖게 된 지금, 그는 ‘휑하니’ 가버린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때 아버지의 ‘휑한’ 마음을 헤아리고도 남는다며 “그래서 더욱더 가슴이 저려온다”고 한다.
“워낙 특별한 성품을 가진 특별한 분이셨기에 생전에는 늘 사랑과 미움의 마음이 엇갈렸어요. 그리고 어리석게도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버지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됐어요. 날이 갈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가네요.”
일 년 전 ‘휑하니’ 가버린 아버지를 생각하면 오래오래 울 것 같다는 김훈정씨. 아버지 초정에 대한 그의 그리움이 짙게 물들어가듯 그의 마당 은행나무가 짙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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