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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55cm의 키 차이를 뛰어넘은 동갑내기 부부 윤선아·변희철

“사랑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장 애가 될 수 없어요”

기획·강지남 기자 / 글·김정은‘자유기고가’ / 사진·박해윤 기자, 좋은생각 제공

2005. 08. 31

지난 2월 히말라야에서 올린 ‘산상 결혼식’으로 화제를 모은 부부가 있다. KBS 라디오에서 ‘윤선아의 노래선물’을 진행 중인 장애인 방송인 윤선아씨와 남편 변희철씨가 그 주인공. 최근 자신들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낸 동갑내기 부부가 들려준 러브스토리.

55cm의 키 차이를 뛰어넘은 동갑내기 부부 윤선아·변희철

KBS3라디오에서 매일 낮 12시부터 1시간 동안 방송되는 ‘윤선아의 노래선물’을 진행하는 윤선아씨(26)의 별명은 ‘엄지공주’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뼈가 달걀껍질처럼 쉽게 부러지는 선천성 골형성부전증을 앓아 키가 120c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목발을 짚고 걸어야 하는 그는 “하이힐을 신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는 여자들이 부럽다”고 하지만 사랑 만큼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듯하다. 그의 일이라면 두 손 두 발 다 벗고 나서는 든든한 동갑내기 남편 변희철씨가 있기 때문이다. 훤칠한 키에 항상 웃는 눈을 가진 변씨는 윤씨와 티격태격하면서도 늘 먼저 져주는 착한 남편. 아내가 비 맞을까 자신의 키를 낮춰 우산을 드는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다.
“항상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게 제일 좋아요. 밖에 나가도 안심이 되고요. 예전에는 외출할 때마다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요. 무엇보다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어요. 요즘엔 남편과 함께 다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덕분에 외출할 때마다 자신감이 생겼어요.”
윤선아씨 부부의 사랑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2월. 부부는 ‘윤선아의 노래 선물’ 제작진이 기획한 ‘KBS 희망원정대’ 프로젝트를 통해 다른 9쌍의 장애인·비장애인과 함께 히말라야를 등반해 그곳에서 산상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왔다. 두 사람은 만년설이 뒤덮인 해발 2750m의 고라파니 마을에서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식을 치르지 못한 채 3년째 함께 살고 있는 윤씨 부부를 위해 제작진이 특별히 마련한 이벤트였다.

만난 지 6개월 만에 옥탑방에서 몰래 동거 시작
두 사람의 인연은 인터넷을 통해 시작됐다. 2001년 윤선아씨는 낮에는 은행원으로, 밤에는 인터넷 음악방송을 진행하는 CJ(사이버 자키)로 활동하며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연을 소개하며 신청곡을 틀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던 그의 방송은 하루 2000여명이 접속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남편 변씨 역시 청취자 중 한 명이었다.
55cm의 키 차이를 뛰어넘은 동갑내기 부부 윤선아·변희철

“청취자들 대부분이 ‘써나 님’ ‘써나 누나’ 하며 좋은 말만 해주는데 이 사람은 달랐어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 ‘왜 내 신청곡 안 틀어줘요’ 하는 식으로 시비를 걸더라고요. 처음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제 방송에 접속한다는 걸 알게 됐죠. 그렇다고 반갑지는 않았어요. 제가 올려놓은 사진을 보고 ‘본인이 맞느냐’는 둥 짓궂은 질문을 했거든요(웃음).”
남편 변씨는 “당시 선아를 흠모하는 남성 팬들이 많아 나름의 전략을 구사한 것”이라고 말하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윤씨는 어느새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됐고, 인터넷 채팅과 전화 통화를 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그리고 1년 6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 변씨의 끈질긴 요구로 직접 만나게 되었다. 변씨는 처음 윤선아씨를 보았을 때 조금 놀랐다고 한다.
“장애인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키가 작은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작은 키는 금세 잊게 됐어요. 함께 저녁 먹고 산책을 하다 선아가 노점에서 분홍색 모자를 써보더니 예쁘냐고 물었는데 정말 예뻤어요. 이런 게 첫눈에 반하는 거구나 싶었죠.”
윤씨 역시 친절하고 자상한 변희철씨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남자친구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하지만 김칫국부터 마셨다가 나중에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스런 마음이 앞섰다고 한다.

55cm의 키 차이를 뛰어넘은 동갑내기 부부 윤선아·변희철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이 사람 미소가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당시 남편은 강릉에 살고 있었는데, 주말에 저를 만나러 다시 대전으로 오겠다는 거예요. 내가 좋다는 건지, 그냥 친구하자는 뜻인지…. 그렇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갔죠.”
그리고 돌아온 주말,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날 저녁 변씨가 윤씨에게 정식으로 교제를 제안했다. 이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데이트를 즐기다 변씨는 그만 강릉행 막차를 놓쳐버렸다. 어찌할지 몰라 고민하던 두 사람은 결국 윤씨가 살던 옥탑방에서 함께 밤을 보냈고, 3개월 후 변씨는 윤씨에게 청혼했다.
스스로 “참을성이 없다”고 말하는 이 커플은 프러포즈를 계기로 함께 살기 시작했다. 당시 윤선아씨의 집은 4층짜리 건물로 다른 층은 세를 주고 가족들은 4층에 살았는데 막내딸인 윤씨만 부모님을 졸라 혼자 5층 옥탑방을 썼다고 한다. “하루라도 빨리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변씨는 강릉에서 대전으로 옮겨왔고, 3개월간의 옥탑방 밀회가 시작됐다.
“언제 부모님이 올라와 문을 여실지 몰라 보조키를 달아놓고 행여 말소리가 아래층에 들릴까 소곤소곤 이야기했어요. 다투다가도 서로 속삭이는 모습이 우스워 웃음이 났죠. 엄마가 전기세며 수도세가 두 배로 나오는 걸 이상하게 여기셔서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몰라요. 그래도 함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어요.”
석 달 뒤 정식으로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윤선아씨의 부모에게 인사를 드린 변희철씨는 예상치 못한 반대에 부딪혔다. 장애인인 어린 딸이 서둘러 결혼했다가 행여 상처를 받을까 걱정한 윤씨 부모가 “나중에 생각해보자”며 반대한 것.

엄마 닮아 예쁘고 아빠 닮아 건강한 딸 낳는 것이 소원
“승낙 안 하시는 부모님도 미웠지만 남편이 더 미웠어요. ‘선아랑 결혼 못하면 못 갑니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알겠다’고 하는 거예요. 게다가 때마침 시집에 일이 생겨 강릉으로 돌아가버렸고요. 일주일 뒤에야 전화가 왔어요. 방을 구해놓을 테니 강릉으로 오겠냐고요. 직장도, 인터넷 방송도 그만둬야 하지만 두말 않고 짐을 꾸렸어요. 부모님께는 친구들과 여행 간다고 하고는 집을 나왔어요. 그때 한 거짓말이 지금도 죄송하고 맘 아프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을 놓칠 것 같았어요. ‘장애인인 내게 이런 사랑이 또 올까’ 하는 간절한 마음뿐이었어요.”
주문진 바닷가에 방 한 칸짜리 집을 마련해 소박하게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려운 점도 많았다. 허름한 집안에는 쥐가 돌아다녔고, 화장실은 집 밖에 있는 재래식이었다. 비가 오는 날엔 넘어져 뼈가 부러질까 무서워 남편 등에 업혀 화장실에 가야 했다. 변변찮은 가스레인지도 없어 밥 지어 먹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둘이 함께 있어 행복하고 재미있었다”는 이들은 곧 시집에 인사를 드렸고, 6개월 만에 친정 부모님의 승낙을 얻고 강릉 시내로 이사했다.
강릉에서 신혼생활을 만끽하던 지난해 1월, 부부는 한 차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윤씨가 설거지를 하다 바닥에 미끄러져 어깨 골절상을 입은 것. 한번 골절이 되면 한 달가량 꼼짝 못하는 윤씨를 위해 남편은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윤씨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매일 손발과 얼굴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윤선아씨는 바쁘게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하루 종일 누워 있을 자기를 위해 읽을거리와 TV 리모컨, 마실 물, 소변통을 머리맡에 챙겨 놓는 남편 모습에 변치 않을 사랑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으로 한 달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윤씨는 우연히 ‘KBS 장애인 방송인 대회’ 인터넷 공고를 보았고 남편의 적극적인 응원에 힘입어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국 윤씨는 똑 부러지는 말솜씨와 다양한 성대모사로 당당히 대상을 수상, 라디오 DJ의 꿈을 이뤘다. 윤씨는 지난해 4월부터 자신의 이름을 건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윤선아씨의 방송 데뷔를 계기로 부부는 서울 여의도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처음 경험하는 서울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변희철씨는 상경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강릉에서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 게다가 서울의 비싼 방값이 큰 부담이 됐다. 그러나 “직장이야 다시 구하면 되지만 선아에게는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라는 생각에 서울행을 결정했다는 남편. 지금은 번듯한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서울에 올라온 직후에는 한동안 취업이 되지 않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낮에는 아내를 방송국까지 데려다주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틈틈이 아내의 라디오 진행에 도움될 만한 유머를 노트에 적어 가져다주었다고.

55cm의 키 차이를 뛰어넘은 동갑내기 부부 윤선아·변희철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책을 함께 읽고 있는 윤선아·변희철 부부(위)와 단란한 데이트 모습(아래 왼쪽). 산상 결혼식을 올린 히말라야.





“주변에서 저를 착한 남편이라고 칭찬해주시는데 부담스러워요. 선아는 장애인이기 이전에 한 여자고 제 아내예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요. 사실 제가 선아에게서 받은 게 더 많아요. 강원도 촌놈이 서울생활도 하게 됐잖아요. 패션 감각이 뛰어난 선아 덕분에 많이 세련돼졌고요. 건강도 훨씬 좋아졌어요. 예전엔 술이랑 담배를 많이 했는데, 선아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담배도 끊고 술도 줄였어요. 주변에서는 성격도 밝아졌다고, 신기하다고들 해요(웃음).”
한동안 변희철씨는 아내를 ‘마누라’를 줄인 ‘마눌’이라고 불렀고, 윤씨는 “마늘의 짝은 양파”라며 남편을 ‘양파’로 불렀다고 한다. 요즘은 ‘여봉~’에서 끝말을 딴 ‘봉봉’이 부부 사이의 애칭이다. 이처럼 장난기 어린 애칭으로 서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동갑내기 부부는 매일 누가 청소를 할 것인가, 누가 빨래를 널 것인가 하는 사소한 문제로 티격태격하기는 하지만 정작 언성을 높여가며 싸운 일은 없다고 한다. 윤선아씨는 “다투고 나면, 남편이 먼저 사과를 해 고맙다”며 “신랑의 마음이 1백만 평쯤 되는 것 같다”고 남편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최근 자신들의 사랑이야기를 써낸 책 ‘나에게는 55cm의 사랑이 있다’에도 윤씨의 남편 자랑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이 부부의 사랑이야기는 내년쯤 영화로도 만들어질 계획이라고.
이들 부부의 소원은 아내를 닮아 귀엽고 예쁜, 남편을 닮아 튼튼한 딸을 갖는 것. 윤씨는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뻤지만 당분간은 방송에 전념하고 싶어 가족계획을 미뤘다고 한다.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넘고 55cm의 차이를 넘은 두 사람의 사랑이 결혼식을 올린 히말라야의 만년설처럼 영원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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