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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①

누드화를 보는 새로운 눈 ‘올랭피아’

2005. 08. 31

누드화를 보는 새로운 눈 ‘올랭피아’

에두아르 마네(1832~1883), 올랭피아, 1863, 캔버스에 유채, 130.5×190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서양인물화와 동양 인물화의 큰 차이 중 하나는 누드화의 존재 여부입니다. 서양에서는 옛날부터 벌거벗은 모습의 사람을 종종 그렸습니다. 반면 동양에서는 사람을 벌거벗은 모습으로 그리는 것을 극히 꺼렸습니다.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누드화와 도덕이 꼭 서로 충돌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벌거벗은 인간에게서 자연이 선사한 최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러나 모든 누드화가 항상 이런 조건을 만족시킨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늘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시비가 뒤따랐습니다. 어떤 작품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외설적이고 조악하다는 평가를 받았는가 하면, 어떤 작품은 당시에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악평을 받았지만 후세에 뛰어난 작품으로 추앙받은 경우도 있지요.
마네의 ‘올랭피아’는 그림이 그려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뒤늦게 호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림을 봅시다. 벌거벗은 여인이 침대 위에 누워 있고 그 옆에 흑인 하녀와 고양이 한 마리(어두운 배경에 묻혀 잘 보이지 않습니다)가 있습니다. 그림 속 여인의 몸에는 걸친 것이 거의 없지만 목에 두른 띠와 팔찌, 신발 등을 통해 패션에 민감한 당대의 여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큰 문제가 됐습니다.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현실의 여자를 누드로 그릴 수 있느냐고 빗발치는 항의를 해온 것입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9세기만 해도 서양에서 누드화는 현실의 여인이 아니라 신화나 옛이야기 속의 여인을 표현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현실 속 여인의 누드를 있는 그대로 그렸으니,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매우 부도덕하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화가 마네는 사람들의 이러한 사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화 속의 여인이나 옛 여인을 누드로 그릴 수 있다면 당대의 여인도 누드로 그릴 수 있는 것이지 어떻게 둘을 구별할 수 있는가?” 하고 되물었지요. 그럼에도 워낙 비판이 거센 탓에 화가는 죽을 때까지 이 그림을 다시는 내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그림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훌륭한 예술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마네의 생각처럼, 어떤 그림이 외설인가 아닌가 하는 기준은 누드화의 모델이 옛날 사람이냐 오늘날의 사람이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표현 자체가 아름다운지,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는 예술적 이유가 있는지에 그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서양에서는 오래전부터 누드화를 그렸기 때문에 일찍부터 모델 실기가 발달했습니다. 사람의 인체를 정확히 그리기 위해서는 몸의 형태를 자세히 관찰해야 하지요. 물론 모델 실기의 핵심은 누드 모델을 그리는 것입니다. 누드를 잘 그려야 옷 입은 사람의 모습도 잘 그릴 수 있습니다. 보다 정확한 인체 표현을 위해 화가들은 누드 모델 실기에 더해 인체 해부학까지 공부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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