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대국어교육과 원진숙 교수(41)는 10여 년 전 고려대에서 ‘논술교육’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비 초등교사들에게 작문과 화법, 독서교육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차근차근 읽고 쓰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국어 교과는 다른 모든 교과 학습을 수행하도록 하는 도구 학습이에요. 하지만 도구로써의 기초 기능에서 더 나아가 고등사고를 수행하는 기능을 하죠. 우리가 사고를 할 때도 언어를 이용하고, 언어를 통해 표현하니까요.”
원 교수는 많은 부모들이 아이가 수학을 못하면 수리·연산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문제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서 정답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회나 과학 등 다른 교과도 마찬가지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며 읽고 쓰는 능력은 범교과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고 말한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읽기와 쓰기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런데 문제는 실제 국어교육이 행해지고 있는 교실을 들여다보면 글 읽는 교육이 되어야 할 국어시간에 단편적인 지식을 배울 뿐 정작 있어야 할 읽기 경험은 없다는 점이다. 원 교수는 더군다나 논술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논술 학원과 족집게 논술 과외가 성행하고 있는 걸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깝다고 말한다.
“사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논술교육 행태를 보면 아찔해요. 아이들 논술을 채점하면서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이고 개성 없는 글을 쓰는 데 깜짝 놀랐어요.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교육 시장에서 예상문제를 뽑아 전형적인 패턴(모범답안)을 가르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아이들은 어떤 문제가 나오든 자기가 암기한 지식들을 쏟아 붓고 나가는 거예요. 논술을 이런 방식으로 교육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예요. 논술시험에 정답이 있다는 게 참으로 놀라울 뿐이죠.”
그는 논술은 단순히 읽고 쓰는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주제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독창적으로, 명료하게, 창의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관건이라고 설명한다. 정형화된 글보다는 꾸준한 독서를 통해 배우고 익힌 것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글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 2008년 입시안을 놓고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는 서울대 정운찬 총장 역시 통합교과형 논술 도입 취지를 “어릴 때부터 자기만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정리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 적응하기 힘들기 때문에 독창적인 생각을 갖고 그것을 정리하는 습관을 키우기 위해 논술시험을 보려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원 교수는 “가진 것이라곤 인적 자원뿐인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하향 평준화가 아닌 우수한 사고력을 지닌 인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마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통합교과적인 능력을 평가하겠다는 대학의 의지에 손을 들어준다. 다만 원 교수가 우려하는 건 현 공교육 제도가 통합교과형 논술시험과 같은 평가방식을 소화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 현재 일선 학교나 학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교육 방식은 대부분 조각난 지식을 달달 외우고, 여러 보기에서 정답을 골라내는 기술을 가르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더군다나 수시로 바뀌는 교육정책과 달리 공교육 현장은 우리 사회에서 변화가 가장 더딘 곳 중 하나로 손꼽힌다. 반면 사교육 시장은 발빠르게 새 입시안에 대처하고 있으니 공교육 관계자들 입장에선 대학의 새 입시안이 반가울 리 없고, 학부모들로서는 공교육이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서울대가 통합교과형 논술을 입시안으로 내놓으니까 강남에서는 국어 사회 과학 등 각 과목의 실력 있는 강사들이 팀을 구성해 전략적으로 가르치는 논술 학원이 등장했대요. 그러니 일선 교사들은 당연히 반발하죠. 자신들이 어떻게 그들을 당할 수 있겠냐며 강남의 아이들이나 특수목적고 아이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요.”
그런 점에서 원 교수는 서울대 입시안이 사교육을 부추기고, 특정 계층에게 유리하다고 비판하는 정부의 입장을 일면 이해한다. 그럼에도 그는 “서울대 입시안 하나에 우리 교육 전체가 흔들리고,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이 가중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도기적 몸살을 앓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교육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과도기적 몸살 앓더라도 단편 지식 가르치는 교육 방식이 바뀌어야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세계 어디를 가봐도 우리나라 아이들처럼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는 사례는 찾기 힘들 거예요. 몇 년 전 영국 BBC 방송에서 대치동의 한 특목고 대비 학원을 해외토픽으로 내보낸 적이 있어요. 14~15세밖에 안된 아이들이 밤 12시 넘도록 밀폐된 공간에 모여 과외 수업을 듣는다는 게 그들로서는 놀라운 거죠. 그런데 그렇게 많은 공부를 한 아이들이 막상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기업에서는 정작 필요한 공부는 전혀 안됐다면서 비싼 돈을 들여 재교육을 시켜요.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이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이 초중고 시절의 과도한 학습 부담으로 인해서 공부에 넌더리를 친다는 거예요.”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걸 알지 못하고 진저리치게 만드는 우리의 교육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어렸을 때부터 글을 읽고 쓰는 걸 즐길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몇 해 전 미국을 여행하다 보니 한 동네에서 가장 예쁜 건물은 어김없이 도서관이더라고요. 그리고 안에 들어가 보면 할로윈 데이 같은 때 입을 것 같은 재미있는 복장을 한 사서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고요. 다행히 우리 출판시장은 몇 년 사이 굉장히 발달했고, 좋은 책, 예쁜 책이 정말 많아요. 그런데 문제는 도서관 시스템이죠. 공공 도서관엔 아직까지 아이들에게 적당한 책을 골라줄 만한 전문 사서가 없고, 학교 도서관은 문이 잠겨 있기 일쑤에요. 어떤 과제 하나를 수행하더라도 아이가 직접 도서관에 찾아가 사서의 도움을 받아가며 관련 서적을 찾아 읽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우리 도서관에 그럴 여력이 없죠.”
원 교수는 이렇듯 사회적 뒷받침이 전혀 안돼 있는 상태에서 대학들이 평가 방식을 바꾸겠다는 것이 시기상조인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대학들의 교육개혁 의지를 꺾는 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도서관을 세우고, 학교 도서관의 질을 높이고, 교사들을 재교육하는 등 공교육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 그는 “통합교과형 논술이 본고사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이가 읽고 쓰는 걸 즐기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격려해 창의적이고 사고력이 뛰어난 아이로 자라게 하는 방향으로 우리 교육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부모가 책 모서리마다 꿀을 발라준다고 해요. 아이가 학교에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공부가 이렇게 꿀맛 나는 것이구나 하는 걸 느끼게끔 하려는 거죠.”
원 교수는 책장에 꿀을 바른다고 해서 공부가 저절로 재미있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아이에게 좋은 점수를 받는 것보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기쁨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이스라엘 부모의 마음이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원 교수는 아이들이 독서를 스트레스가 아닌 평생의 동반자로 여기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갈수록 더 고령사회가 되잖아요. 글을 읽는 즐거움을 모른다면 직장에서 은퇴하고 난 다음에 무엇으로 낙을 삼겠어요. 평생 독서와 공부를 즐기는 사람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게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목표가 되어야죠.”
그는 아이들이 책을 읽게 하려면 우선 온 가족이 책을 즐겨 읽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모는 관심이 온통 부동산에 쏠려 있으면서 아이들한테만 책을 읽으라고 하면 아이들이 책을 좋아할 리 없다는 것. 그 다음은 부모가 책을 보는 안목을 지녀 아이들이 발달 단계에 맞게 책을 고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한다. 또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 저학년 아이들에겐 부모가 좋은 책을 골라 읽어주는 것이 오히려 책 읽기를 즐기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매일 30분만 온 가족이 하던 일을 멈추고 아주 편안한 자세로 책 읽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 안목도 키워주고요.”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원 교수도 책보다는 TV나 컴퓨터 게임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이 책에 정을 붙이도록 자주 서점에 데리고 나가 책을 고르게 하고, 함께 책 읽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독후감 강요 말고 원하는 글 쓰게 해야, 독자 반응 경험케 하면 쓰기 실력 신장돼
원 교수는 논술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아이에게 토론을 시키거나 독후감을 쓰도록 강요하면 독서를 또 하나의 부담스러운 과제로 여길 수 있다고 충고한다. 그는 “책 읽는 건 아주 자연스럽고 즐거운 것인데 아이들에게 책 읽기가 점점 스트레스이자 강요가 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앞으로 논술시험 본다는데 그렇게 책을 안 읽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말하며 책을 읽으라고 종용하는 건 또 다른 형태의 고문이라는 것.
아이가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든 다음에는 거창한 토론이 아닌 대화를 통해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소감을 나누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는 말하고 쓰는 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 욕구인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그러한 재능을 잃게 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 가보면 대개 벽이 성한 데가 없이 온통 아이들 낙서로 가득 차 있잖아요. 자신의 사진과 글을 올려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싸이월드가 유행하고,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남아 있는 건 인간의 본능적인 표현 욕구를 증명해줘요. 그런데 우리의 교육 형태가 아이들의 그러한 욕구를 점차 거세시키는 것 같아요.”
그는 “아이들의 쓰기 능력이 받아쓰기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많아 받아쓰기 시험을 잘 못 보면 큰일이 난 것처럼 생각하는데 쓰기란 의미를 구성하고 표현하는 활동이지 맞춤법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수준에 맞는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아이의 삶을 가꾸는 교육”이라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원인과 결과에 맞게 써야 한다, 시간적 순서에 맞게 써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들이 쓰기를 부담스러워하게 만들어요. 논리적 글쓰기를 강요하는 것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책을 좋아하고, 글을 통해 표현하는 것을 즐기게끔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죠.”
그는 아이들이 혼자서도 많이 배우지만 혼자서 읽고 쓴 것을 공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며 이웃 아이들과 또래집단을 구성해 자연스럽게 자신이 읽고 쓴 것을 발표하게끔 해볼 것을 권했다. 또한 아이가 인터넷 공간에 글을 올리게 하고, 가족들이 댓글을 달아 반응을 보여주면 아이가 자신의 글에 대한 부모, 친구, 순수한 독자의 반응을 경험하게 돼 자연스럽게 쓰기 실력이 신장된다고 한다.
원교수는 부모가 아이의 성공에 대한 강박증에서 벗어나 책 읽는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경험인가를 깨달을 수 있도록 본보기가 되어줄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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