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분임(44,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
“엄마! 얼굴 이리 대봐. 빨랑.”“왜?”
“아이, 빨리, 뭐 해줄 거 있어.”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일곱 살 난 딸아이가 내 허리께를 붙잡고 깨금발을 했다. 그러더니 고개 숙인 내 얼굴에 제 입술을 대고 여기저기 쪽쪽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엄마, 고맙습니다. 저를 낳아주셔서”했다. ‘아하, 내일모레가 어버이날이라 유치원에서 선생님들이 시켰나보구나’ 생각하는데 딸아이는 어느새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더니 주름종이로 만든 카네이션 두 송이가 들어 있는 상자 하나와 종이로 만든 효도 쿠폰 4장을 내밀었다. 빨강색과 분홍색 한 송이씩의 카네이션에는 금가루까지 뿌려져 있고 상자에는 하트 모양의 구슬까지 장식돼 있었다. 효도쿠폰은 흰머리 쿠폰, 뽀뽀 쿠폰, 심부름 쿠폰, 방청소 쿠폰 4가지였다.
이런 걸 일곱 살짜리 딸아이가 만들었을 리는 없고 선생님들의 애쓴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어버이날 선물이었다. 내가 딸아이에게서 받은 두 번째 어버이날 선물이었다. 지난해에도 종이 카네이션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그 카네이션을 들여다보자니 내 유년의 아픈 기억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날(그때는 어머니날이었다)이었다. 학교에서는 한 달 전부터 어머니날을 대비해서 합창이며 여러 가지 행사 준비를 했고 그날은 다들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는 늘 일에 치여 살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엄마는 벌써 산으로 들로 일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엄마가 해놓은 밥을 언니들이 차려주면 그 밥을 먹고 학교로 가는 게 일상이었다. 언니들도 엄마를 모시고 학교에 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만든 종이 카네이션을 내밀며 전날 밤 나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내일 어머니날 아이가. 그카이까네 선생님이 엄마 델꼬 오래. 이 꽃 달고.”
“어머니날? 낼 넘의 일 가야 하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인디 뭔 어머니날.”
엄마는 종이 카네이션에 잠시 눈을 주고 난 후 하루치의 고된 노동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엄마의 말을 듣고 있는데 맥이 빠졌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쪼매만 늦게 가면 안 되나? 다 델꼬 오라 캤는데.”
내 기운 없는 목소리에도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가겠다는 말도 안 가겠다는 말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말했다.
“낼 이 꽃 꼭 달고 와야 된다카이.”
내 다짐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따라 남의 집 일에 유독 지쳐 보이던 엄마였다. 늘 어릴 때부터 봐온 집안 사정이며 엄마의 모습에 더 떼를 쓸 수도 없었다. 엄마가 지치도록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의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던 때였다.
이튿날 학교 운동장엔 누런 포장이 쳐지고 그 안에 의자들이 놓였다. 한복을 곱게 입고 가슴에 카네이션을 단 어머니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6학년 언니와 오빠들이 분주히 손님들을 모시고 각 반 담임선생님들은 각자 자기반의 어머니들에게 인사를 하기 바빴다.
그리고 우리 반 친구들 대부분은 자신의 어머니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손을 흔들어댔다. 거의 모든 어머니들이 온 것 같았다. 시골 초등학교라 학생 수가 많은 것도 아니어서 모든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자리에 엄마는 없었다.
교장선생님의 축사와 인사, 그리고 저학년들의 행사가 이어졌고 드디어 우리 반 차례가 왔다. 우리는 전체 합창을 하기 위해 줄지어 전교생들 앞으로 나가 어머니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어머니 은혜’를 불렀다. 그때였다. 몸뻬 차림의 한 초라한 여인이 포장이 쳐진 학부형들 자리로 막 들어섰다. 엄마였다. 얼굴은 일 년 내내 햇빛에 그을려 아프리카 토인을 연상시키고, 비녀로 쪽진 머리는 방금 머릿수건을 벗겨냈는지 봉두난발에 머리카락들이 하늘로 치솟고, 허름한 윗도리와 몸뻬 차림의 이곳저곳에는 흙이 묻어 얼룩져 있고, 손에는 호미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물론 모든 어머니들이 가슴에 단 카네이션을 엄마는 달지 않았다. 나는 순간 고개를 돌렸고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를 단 한 마디도 따라 하지 못했다.
일을 하다 몸뻬바지 입은 채 운동회에 온 어머니가 부끄러웠던 나
그리고 다시 줄지어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키가 작아 맨 앞에 서 있던 나는 눈을 한 번도 똑바로 뜨지 않았고 발끝으로 애꿎은 흙만 검정 고무신으로 툭툭 차던 기억이 선명하다.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고 부끄러웠다. 누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러면서 속으로 ‘몸뻬 바지가 뭐꼬. 그카고 내가 꽃을 꼭 달고 오라 캤는데. 오늘 하루만 쉬면 어때서 그캐샀노’ 하는 원망을 늘어놓았다.
그런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어느 순간 눈을 들어 학부형석을 보는데 엄마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당황했고 뒤쪽으로 고개를 빼고 교문을 쳐다봤으나 엄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거기까지다. 그날의 내 기억은. 그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하얗게 지워졌다. 그리고 나도 엄마도 그날 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엄마가 학교에 온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치른 졸업식이 4번이었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나 역시 한 번도 졸업식이라거나 생활관에 들어가서 예절을 배우니까 엄마가 학교에 와야 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5년 전이었다. 엄마가 많이 아파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대구로 내려갔다. 사는 게 뭔지 핑계거리가 많았다. 그렇게 내려간 병원에서 맞닥뜨린 엄마는 낯설었다. 칠십 평생 병원에 있는 모습도 처음이었지만 늘 너덜너덜한 몸뻬 바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엄마였기에 환자복이 주는 이질감은 컸다. 늘 굳세고 씩씩했던 엄마가 환자복을 입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는 모습에서 말을 잃었다.
“엄마, 와 카노? 이게 뭐꼬.”
퉁퉁 부은 얼굴 속에 파묻힌 눈하며, 목이며 몸 전체를 가눌 수 없어 슬슬 기는 엄마를 바라보자 내 입에서 생각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 왔나? 이제 갈 날이 멀지 않았구마. 어디 성한 데가 없구마.”
엄마는 겨우겨우 침대를 세운 등받이에 베개며 이불을 잔뜩 쌓아놓고 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어디가 아픈지 다 말라버렸을 것 같은 엄마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나는 엄마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엄마의 몸에 눈물이 있었다는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그랬다. 엄마는 우리 형제들에게 당신 스스로 우물이었고 자식들은 두껍고 눈 먼 두레박일 뿐이었다. 우리 형제 일곱이 엄마 우물에서 퍼낸 건 엄마의 피와 땀이었고 엄마의 젊음이었다. 그리고 그 우물에 이끼가 낀 세월이며 물줄기가 마르고 가늘어졌어도 눈 먼 두레박들은 그걸 몰랐다. 아니 모른 체했다는 게 옳다. 엄마의 그 우물에서 퍼낸 물을 마시고 키를 키우고 세상으로 나가는 힘을 얻었어도 그건 원래 우리들 것인 줄 알았다.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인 줄 알았던 엄마가 이젠 가는 물줄기 하나 남기지 않고 말라 마침내 바닥의 마른 모래까지 드러낸 모습으로 텅텅, 빈 소리로 울고 있었다. 텅 비고 마른 우물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는? 아는 우야고 왔노? 김 서방 밥은 우야고?”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목소리가 두꺼운 두레박 같은 내 가슴에 또 다른 우물 하나를 만들었다. 나는 우물물 깊숙이 머리를 박은 먹먹한 기분으로 엄마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는, 밥 못 먹을까봐 그카나. 그라고 산 아는 다 살게 돼 있데이.”
그런데 그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우리 엄마 손톱과 손이, 태어나서 지금껏 늘 보아온 손톱 밑이 새카맣던, 손가락이며 손등이 가뭄에 등 터진 논바닥 같던 손이 뽀얗게 달라진 게 아닌가. 그제야 다시 바라본 엄마 얼굴, 겨우 한 달 만에 엄마는 애기 피부처럼 뽀얗게 변해 있었다. 내가 우물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목소리로 놀라서 물었다.
“엄마, 엄마 얼굴색이 하얗네. 엄마 얼굴색이 아이네. 핏기가 없어서 그카나?”
그러자 마른 우물의 엄마가 바닥에 남은 마지막 물기를 끌어모아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땐 살색도 희고 이뻤데이.”
그 말에 피식 웃고 말았지만 내가 40년 넘게 보아온 엄마의 손과 손톱, 얼굴은 아니었다. 눈 먼 두레박들은 그저 물만 퍼올리고 마셨지 그 우물 바닥을 한 번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엄마를 부끄러워만 할 줄 알았지 진심으로 엄마를 이해하고 껴안아주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자꾸 헛말만 해댔다.
“엄마, 처녀 때 따라다니던 총각도 있었나? 진짜로!”
그 말에 엄마는 그저 우물에 떠 있는 초승달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 웃음을 따라 헛헛한 웃음을 날리며 나는 자꾸만 엄마 손톱에 새로 돋아나는 초승달들을 만지작거렸다.
“엄마, 엄마! 쿠폰 뭐 할 거냐구?”
“응?”
“어떤 쿠폰 할 거냐구? 한 개만 해야 한다구.”
딸아이가 소리를 꽥 지르며 내 우물을 흔든다. 어느덧 내 우물에도 두껍고 눈 먼 두레박 하나가 내려지고 있다.
“엄마! 얼굴 이리 대봐. 빨랑.”“왜?”
“아이, 빨리, 뭐 해줄 거 있어.”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일곱 살 난 딸아이가 내 허리께를 붙잡고 깨금발을 했다. 그러더니 고개 숙인 내 얼굴에 제 입술을 대고 여기저기 쪽쪽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엄마, 고맙습니다. 저를 낳아주셔서”했다. ‘아하, 내일모레가 어버이날이라 유치원에서 선생님들이 시켰나보구나’ 생각하는데 딸아이는 어느새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더니 주름종이로 만든 카네이션 두 송이가 들어 있는 상자 하나와 종이로 만든 효도 쿠폰 4장을 내밀었다. 빨강색과 분홍색 한 송이씩의 카네이션에는 금가루까지 뿌려져 있고 상자에는 하트 모양의 구슬까지 장식돼 있었다. 효도쿠폰은 흰머리 쿠폰, 뽀뽀 쿠폰, 심부름 쿠폰, 방청소 쿠폰 4가지였다.
이런 걸 일곱 살짜리 딸아이가 만들었을 리는 없고 선생님들의 애쓴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어버이날 선물이었다. 내가 딸아이에게서 받은 두 번째 어버이날 선물이었다. 지난해에도 종이 카네이션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그 카네이션을 들여다보자니 내 유년의 아픈 기억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날(그때는 어머니날이었다)이었다. 학교에서는 한 달 전부터 어머니날을 대비해서 합창이며 여러 가지 행사 준비를 했고 그날은 다들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는 늘 일에 치여 살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엄마는 벌써 산으로 들로 일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엄마가 해놓은 밥을 언니들이 차려주면 그 밥을 먹고 학교로 가는 게 일상이었다. 언니들도 엄마를 모시고 학교에 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만든 종이 카네이션을 내밀며 전날 밤 나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내일 어머니날 아이가. 그카이까네 선생님이 엄마 델꼬 오래. 이 꽃 달고.”
“어머니날? 낼 넘의 일 가야 하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인디 뭔 어머니날.”
엄마는 종이 카네이션에 잠시 눈을 주고 난 후 하루치의 고된 노동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엄마의 말을 듣고 있는데 맥이 빠졌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쪼매만 늦게 가면 안 되나? 다 델꼬 오라 캤는데.”
내 기운 없는 목소리에도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가겠다는 말도 안 가겠다는 말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말했다.
“낼 이 꽃 꼭 달고 와야 된다카이.”
내 다짐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따라 남의 집 일에 유독 지쳐 보이던 엄마였다. 늘 어릴 때부터 봐온 집안 사정이며 엄마의 모습에 더 떼를 쓸 수도 없었다. 엄마가 지치도록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의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던 때였다.
이튿날 학교 운동장엔 누런 포장이 쳐지고 그 안에 의자들이 놓였다. 한복을 곱게 입고 가슴에 카네이션을 단 어머니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6학년 언니와 오빠들이 분주히 손님들을 모시고 각 반 담임선생님들은 각자 자기반의 어머니들에게 인사를 하기 바빴다.
그리고 우리 반 친구들 대부분은 자신의 어머니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손을 흔들어댔다. 거의 모든 어머니들이 온 것 같았다. 시골 초등학교라 학생 수가 많은 것도 아니어서 모든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자리에 엄마는 없었다.
교장선생님의 축사와 인사, 그리고 저학년들의 행사가 이어졌고 드디어 우리 반 차례가 왔다. 우리는 전체 합창을 하기 위해 줄지어 전교생들 앞으로 나가 어머니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어머니 은혜’를 불렀다. 그때였다. 몸뻬 차림의 한 초라한 여인이 포장이 쳐진 학부형들 자리로 막 들어섰다. 엄마였다. 얼굴은 일 년 내내 햇빛에 그을려 아프리카 토인을 연상시키고, 비녀로 쪽진 머리는 방금 머릿수건을 벗겨냈는지 봉두난발에 머리카락들이 하늘로 치솟고, 허름한 윗도리와 몸뻬 차림의 이곳저곳에는 흙이 묻어 얼룩져 있고, 손에는 호미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물론 모든 어머니들이 가슴에 단 카네이션을 엄마는 달지 않았다. 나는 순간 고개를 돌렸고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를 단 한 마디도 따라 하지 못했다.
일을 하다 몸뻬바지 입은 채 운동회에 온 어머니가 부끄러웠던 나
그리고 다시 줄지어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키가 작아 맨 앞에 서 있던 나는 눈을 한 번도 똑바로 뜨지 않았고 발끝으로 애꿎은 흙만 검정 고무신으로 툭툭 차던 기억이 선명하다.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고 부끄러웠다. 누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러면서 속으로 ‘몸뻬 바지가 뭐꼬. 그카고 내가 꽃을 꼭 달고 오라 캤는데. 오늘 하루만 쉬면 어때서 그캐샀노’ 하는 원망을 늘어놓았다.
그런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어느 순간 눈을 들어 학부형석을 보는데 엄마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당황했고 뒤쪽으로 고개를 빼고 교문을 쳐다봤으나 엄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거기까지다. 그날의 내 기억은. 그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하얗게 지워졌다. 그리고 나도 엄마도 그날 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엄마가 학교에 온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치른 졸업식이 4번이었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나 역시 한 번도 졸업식이라거나 생활관에 들어가서 예절을 배우니까 엄마가 학교에 와야 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5년 전이었다. 엄마가 많이 아파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대구로 내려갔다. 사는 게 뭔지 핑계거리가 많았다. 그렇게 내려간 병원에서 맞닥뜨린 엄마는 낯설었다. 칠십 평생 병원에 있는 모습도 처음이었지만 늘 너덜너덜한 몸뻬 바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엄마였기에 환자복이 주는 이질감은 컸다. 늘 굳세고 씩씩했던 엄마가 환자복을 입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는 모습에서 말을 잃었다.
“엄마, 와 카노? 이게 뭐꼬.”
퉁퉁 부은 얼굴 속에 파묻힌 눈하며, 목이며 몸 전체를 가눌 수 없어 슬슬 기는 엄마를 바라보자 내 입에서 생각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 왔나? 이제 갈 날이 멀지 않았구마. 어디 성한 데가 없구마.”
엄마는 겨우겨우 침대를 세운 등받이에 베개며 이불을 잔뜩 쌓아놓고 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어디가 아픈지 다 말라버렸을 것 같은 엄마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나는 엄마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엄마의 몸에 눈물이 있었다는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그랬다. 엄마는 우리 형제들에게 당신 스스로 우물이었고 자식들은 두껍고 눈 먼 두레박일 뿐이었다. 우리 형제 일곱이 엄마 우물에서 퍼낸 건 엄마의 피와 땀이었고 엄마의 젊음이었다. 그리고 그 우물에 이끼가 낀 세월이며 물줄기가 마르고 가늘어졌어도 눈 먼 두레박들은 그걸 몰랐다. 아니 모른 체했다는 게 옳다. 엄마의 그 우물에서 퍼낸 물을 마시고 키를 키우고 세상으로 나가는 힘을 얻었어도 그건 원래 우리들 것인 줄 알았다.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인 줄 알았던 엄마가 이젠 가는 물줄기 하나 남기지 않고 말라 마침내 바닥의 마른 모래까지 드러낸 모습으로 텅텅, 빈 소리로 울고 있었다. 텅 비고 마른 우물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는? 아는 우야고 왔노? 김 서방 밥은 우야고?”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목소리가 두꺼운 두레박 같은 내 가슴에 또 다른 우물 하나를 만들었다. 나는 우물물 깊숙이 머리를 박은 먹먹한 기분으로 엄마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는, 밥 못 먹을까봐 그카나. 그라고 산 아는 다 살게 돼 있데이.”
그런데 그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우리 엄마 손톱과 손이, 태어나서 지금껏 늘 보아온 손톱 밑이 새카맣던, 손가락이며 손등이 가뭄에 등 터진 논바닥 같던 손이 뽀얗게 달라진 게 아닌가. 그제야 다시 바라본 엄마 얼굴, 겨우 한 달 만에 엄마는 애기 피부처럼 뽀얗게 변해 있었다. 내가 우물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목소리로 놀라서 물었다.
“엄마, 엄마 얼굴색이 하얗네. 엄마 얼굴색이 아이네. 핏기가 없어서 그카나?”
그러자 마른 우물의 엄마가 바닥에 남은 마지막 물기를 끌어모아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땐 살색도 희고 이뻤데이.”
그 말에 피식 웃고 말았지만 내가 40년 넘게 보아온 엄마의 손과 손톱, 얼굴은 아니었다. 눈 먼 두레박들은 그저 물만 퍼올리고 마셨지 그 우물 바닥을 한 번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엄마를 부끄러워만 할 줄 알았지 진심으로 엄마를 이해하고 껴안아주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자꾸 헛말만 해댔다.
“엄마, 처녀 때 따라다니던 총각도 있었나? 진짜로!”
그 말에 엄마는 그저 우물에 떠 있는 초승달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 웃음을 따라 헛헛한 웃음을 날리며 나는 자꾸만 엄마 손톱에 새로 돋아나는 초승달들을 만지작거렸다.
“엄마, 엄마! 쿠폰 뭐 할 거냐구?”
“응?”
“어떤 쿠폰 할 거냐구? 한 개만 해야 한다구.”
딸아이가 소리를 꽥 지르며 내 우물을 흔든다. 어느덧 내 우물에도 두껍고 눈 먼 두레박 하나가 내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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