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대 왕들은 태교에서부터 최고지도자 수업까지 엘리트 교육의 진수만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성군으로, 어떤 사람은 폭군으로, 어떤 사람은 유약한 임금으로, 어떤 사람은 강한 임금으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죠. 교육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결과는 천차만별인 것을 보면 부모의 성정이나 가치관, 양육태도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조선시대사를 전공하고 군주제와 왕실문화에 대해 연구해온 부경대 사학과 신명호 교수(41).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문화, 궁중문화’, ‘궁궐의 꽃 궁녀’의 저자로 잘 알려진 그가 최근 ‘조선 왕실의 자녀 교육법’이란 책을 펴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딸 수정이와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제우, 이제 막 돌이 지난 늦둥이 딸 명경이까지 세 남매를 둔 신 교수는 부인 정지원씨(43)가 막내를 임신했을 무렵부터 조선 왕실의 자녀 교육법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출산을 전후해 원고를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올해 초가 되어서야 탈고한 그는 세 아이의 아빠로서 ‘조선 왕실의 교육법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고 한다.
“남자들은 대개 아내가 임신을 해도 태아가 다달이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잘 몰라요. 아이를 갖기 전 몸가짐에 대해선 더더욱 알지 못하죠. 저희 부부 역시 아무런 준비 없이 막내를 임신했는데 조선 왕실의 자녀교육은 임신 전부터 절제와 수행을 통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후회막급이었습니다.”
옛날식으로 다 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술을 좀 덜 마시고, 몸가짐과 마음가짐도 건전하게 가지려고 노력했을 거라는 그는 자신을 포함해 많은 남자들이 자녀교육을 아내와 학교, 학원에 맡기는데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의 자녀 교육법을 보면 교훈 삼을 게 많다고 말한다.
사도세자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영조, 손자 교육엔 갖은 정성 쏟아
영조는 서른여덟 되던 해에 궁녀 출신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를 얻었다. 큰아들 효장세자가 죽고 7년 만에 얻은 아이라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기대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나던 당일 원자에 책봉하고, 조기 교육을 위해 생후 1백 일도 되지 않은 아이를 생모의 품에서 떼어내 저승전(儲承殿)이라는 동궁전에 머물게 했다. 저승전은 아버지인 영조가 머무는 창덕궁의 침전과 어머니인 영빈 이씨가 머물던 집복헌에서 꽤 먼 거리에 있었다.
“다른 원자들은 8세 전후한 시기에 동궁전으로 가는데 사도세자는 아주 일찍부터 어머니 품을 떠나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졌어요. 젖먹이 때부터 부모의 따스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도세자는 어쩌다 영조가 동궁전에 오면 아버지 품에 얼른 안기지를 못하고 낯설어했어요. 뭘 묻기라도 하면 대답을 잘 못하고 쭈뼛쭈뼛했죠. 성질이 급한 영조는 감정을 다스리지를 못하고 ‘겨우 그 정도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곤 했답니다.”
세 아이의 아버지인 신 교수는 영조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는 듯했다. 영조 역시 사도세자가 미워서 화를 낸 것은 아니었을 거라며 마흔 가까이 되어 얻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남달라 일찍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게 했는데 이따금 와서 보면 성에 차지 않으니 실망감이 크지 않았겠냐는 것. 하지만 어린 사도세자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 영조는 무섭고 싫은 사람이었을 터. 이런 상황에서는 어머니 역할이 중요한데 영빈 이씨는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명호 교수는 조선의 역사를 통해 자녀교육의 최우선은 화목한 부부관계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부자 관계가 꼬이면 어머니가 나서 풀어야 하는데 영빈 이씨는 그러지 못했어요. 다른 궁녀들이 자신을 시샘하고 무시하는 것 같자 동궁전 출입을 자제했거든요. 사도세자가 다섯 살 됐을 무렵부터 영조와 영빈 이씨는 동궁전에 거의 발걸음을 끊고 살았어요.”
사도세자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애정 결핍으로 열 살이 넘으면서 정신질환 증세를 나타냈고 열다섯 살이 되자 도술에 마음을 빼앗겨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다고 한다.
“‘한중록’에 보면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호된 꾸중을 듣고 나면 환관을 때리면서 화풀이하는 버릇이 있었어요. 스물세 살 때는 애꿎은 환관과 궁녀들을 죽이기까지 했죠. 영조가 불러 이유를 묻자 사도세자는 ‘사랑하지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니 화가 나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중록’은 다름 아닌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책이다. 혜경궁 홍씨는 시아버지가 남편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전대미문의 비극을 겪은 인물.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남편은 감수성과 재능이 뛰어난 똑똑한 사람인데 부모에 대한 애정의 굶주림이 결국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나타냈어요. ‘만일 사도세자를 멀리 떨어져 지내게 하지 않고, 영조가 곁에서 글 읽고 배우는 것을 몸으로 가르쳤다면 그렇게까지 사이가 벌어졌을까’ 하고 한탄하기도 했죠.”
신 교수는 “사도세자의 사례는 부모의 애정과 신뢰가 자녀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자라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부모의 사랑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만 꾸중도 교육이 될 수 있고, 엘리트 교육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건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훌륭한 임금으로 자랐다는 점이다. 신 교수는 “혜경궁 홍씨의 현명한 지혜 덕분”이라고 말한다.
“남편의 정신질환이 애정 결핍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한 혜경궁 홍씨는 어린 정조를 남편과 같은 정신병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정성을 쏟아붓고, 풍파에 휘둘리지 않도록 아들을 지켰어요. 정조가 열한 살이 되던 해 사도세자가 죽음을 맞고, 세손(정조)과 함께 친정으로 돌려보내진 혜경궁 홍씨는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자신이 죽으면 아들이 얼마나 큰 슬픔을 겪을까에 생각이 미치자 참고 견뎠죠. 남편을 끝내 죽게 만든 시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적지 않았을 텐데 홍씨는 오히려 아들에게 착하게 자라서 할아버지의 성은에 보답하라고 가르쳤어요.”
만일 혜경궁 홍씨가 열한 살짜리 아들 앞에서 할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을 내비쳤다면 정조는 어려서부터 복수심을 키우지 않았을까. 신 교수는 홍씨의 사려 깊은 행동과 따뜻한 마음이 아들을 위기에서 구해냈다고 말한다.
“혜경궁 홍씨는 훗날 다시 입궐해 시아버지에게 어린 정조의 교육을 맡아달라고 청합니다. 며느리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던 영조는 손자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죠. 영빈 이씨 역시 사도세자에게 못다 한 정을 손자에게 쏟아부었어요. 한방에서 지내며 새벽에 깨워 날이 밝기 전에 글을 읽도록 하고 조반을 직접 챙겨주며 세심히 보살폈어요.”
신 교수는 사도세자와 정조가 받은 조기 교육이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두 사람의 운명이 확연히 다르게 펼쳐진 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지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성군으로 손꼽히는 성종 자녀교육엔 실패해 아들 폭군으로 성장
“저는 연산군의 사례를 조선 왕실 태교의 최대 실패작으로 꼽습니다. 성종은 조선 초기 왕조체제를 완성시킨 훌륭한 임금이지만 가장으로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부인 윤씨가 임신하여 부부관계를 갖기 어려워지자 다른 두 명의 후궁을 가까이하여 그들을 또 임신시키죠. 윤씨는 질투와 증오심에 불타서 남편을 만날 때마다 싸움을 벌였어요. 아들 연산군이 태어난 뒤에도 화를 참지 못하고 성종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고,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어 결국 궁궐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고 말았습니다.”
신 교수는 아내가 임신했을 때는 남편도 부성 태교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윤씨의 질투심을 자극한 성종의 잘못도 크지만 아이를 가진 어머니가 이성을 잃고 행동하면 자식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임신부가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의 증오심을 가졌다면 그것이 태아에게도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청소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이 시기를 잘못 보내면 성인이 되어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신 교수는 청소년기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숙종의 아들 경종의 경우를 들었다.
“경종의 어머니가 바로 그 유명한 장희빈입니다. 궁녀 출신 장희빈이 경종을 낳았을 때 숙종의 나이가 스물여덟이었어요. 서른이 다 되어 첫아들을 본 숙종은 세 살 된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한 뒤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장희빈을 중전에 앉힙니다. 경종은 네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주 똑똑했다고 해요.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숙종이 인현왕후를 다시 입궐시키고 장희빈을 강등시키죠. 경종이 열네 살 됐을 때는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고요.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와 생모, 새어머니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열네 살 때 생모를 잃고 만 경종이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런데도 숙종은 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기는커녕 오히려 미워했다고 한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에 어른들의 삼각관계 정점에 놓이고, 아버지의 냉대를 받은 경종은 결국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세상은 점점 더 치열해지는데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 솔직히 두려움이 앞섭니다. 조선 왕실의 역사는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자녀교육의 첫걸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아이들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잠재적인 재능을 최대한 실현하도록 믿고 지켜봐주는 것이 두 번째로 중요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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