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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모녀

장애 고통 딛고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 어머니 우갑선의 감동 인생

“희망 잃지 않고 노력하면 장애인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 기획·송화선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2005. 06. 08

“네 손가락만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그런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이들이 있다. 세계 유일의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양과 그의 어머니 우갑선씨. 지난 3월 대학생이 된 희아양과 지금의 그를 있게 해준 어머니 우씨를 만나 이들 모녀의 특별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장애 고통 딛고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 어머니 우갑선의 감동 인생

“제손가락이 10개였다면 아무도 신기하게 보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몸으로 태어난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게 됐죠. 그래서 저는 손가락을 네 개만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주 귀중한 보물 손이잖아요.”
세계 유일의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양(19). 그는 선천성 사지 기형 1급 장애인이다. 양손에 손가락이 두 개씩밖에 없고 다리도 무릎 아래로는 없다.
올 2월 장애인 특수학교인 주몽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평택에 있는 국립 재활복지대학 멀티미디어 음악과에 입학한 그는, 요즘 오는 6월11일에 있을 영국 템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준비하느라 학교에도 나가지 못한 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연주회가 열리기 꼭 한 달 전인 5월11일, 희아양과 그의 어머니 우갑선씨(50)를 대치동에 있는 희아양의 피아노 레슨 교사 집에서 만났다.
기자를 보자마자 먼저 “안녕하세요” 하며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는 희아양. 얼굴 가득 번진 미소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때맞춰 그의 레슨 교사 이신향씨(42)가 “희아, 정말 예쁘지 않습니까” 하고 말을 건넨다.
“처음에 레슨 의뢰가 들어왔을 땐 정말 자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희아를 직접 본 뒤 밝은 모습에 반해 가르치기로 결심했죠. 지금은 참 잘했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가르치는 것보다 오히려 희아한테 배우는 점이 더 많거든요.”

척추장애인 된 남편과 간호사와 환자로 만나 사랑
희아양이 기형으로 태어난 것은 포병 소위 출신의 1급 척추장애인이던 아버지 고 이운봉씨가 통증을 잊기 위해 모르핀을 상용하는 와중에 그가 임신됐기 때문. 척추장애인 남편에게 수정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어머니 우씨가 장기간 감기약을 먹고 주사까지 맞은 뒤에야 희아양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도 한 원인이 됐다. 우씨가 뒤늦게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초음파 검사를 하더니 “손가락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다리도 자라다 말았다. 이대로 낳으면 기형아가 될 것이 틀림없다”며 낙태를 권했다.
“다른 가족들은 물론이고 희아 아버지까지 ‘장애인 아버지 밑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자라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겠냐. 그냥 포기하자’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소중한 생명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을 설득했고, 결국 희아를 낳을 수 있었죠.”
그 과정에서 마음 고생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우씨는 희아양을 낳은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나이팅게일을 동경했어요. 할머니가 ‘너 누구한테 시집갈래?’ 하고 물어보면 ‘아픈 사람한테 간다’고 했을 정도로요. 희아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저는 이미 꿈을 이룬 셈이었는데, 하느님이 이런 자식까지 주셨으니 두 배로 행복하죠.”
2000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희아양의 아버지는 67년 경기도 연천 무장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됐다가 척추를 다쳐 10년 동안 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우씨는 당시 그 병원의 간호사였다.
“그때 희아 아버지는 살아난 것만 해도 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이 다쳤어요. 가슴 아래로는 완전히 마비돼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죠. 그런 사람이 어느 날 보니 구두닦이 고아 소년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더라고요. 힘든 재활훈련을 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의 모습에 감동받아 제가 먼저 다가갔죠.”

장애 고통 딛고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 어머니 우갑선의 감동 인생

희아양이 99년 연세대에서 열린 피아노 독주회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과 협연하고 있는 모(왼쪽)과 2000년 ‘니르바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모습.


프러포즈도 우씨가 했다. 두 사람이 처음 영화를 보러 간 날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의리 있게 살자”고 말을 건넨 것. 그러나 77년 결혼에 성공하기까지 두 사람은 적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주위의 반대가 엄청났어요. 저희 집은 물론이고 시집에서도 반대했죠. 시아버지는 ‘네가 내 딸이라면 때려서라도 결혼을 못하게 하겠다’고 하셨고, 친정 아버지는 인연을 끊겠다고 하셨어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친정 아버지께 편지를 쓴 끝에야 어렵게 결혼 허락을 받아냈죠.”
여섯 살 때 연필 쥘 힘이라도 길러주려고 피아노 가르쳐
척추장애인인 희아양의 아버지와 결혼한 것이나, 이상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희아양을 낳겠다고 고집한 것을 보면 우씨는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다. 늘 옆에서 희아양을 도와주는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의 김영주 후원팀장도 “희아 어머니는 정말 적극적이고 의지가 강하며,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인 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우씨이기에 희아양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희아가 여섯 살 때, 연필이라도 잡을 수 있게 손가락 힘을 키워주려면 피아노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피아노는 연필 잡을 수 있을 때까지만 시키고 그 다음에 공부 가르쳐서 하버드에 보내려고 했는데…(웃음).”
하지만 희아양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 찾아가보았지만 어디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은 것. 양손 모두 합해도 손가락이 네 개밖에 안되는데다 왼쪽 손가락은 관절이 없어 구부러지지조차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전한 거예요. 이 일을 해내면 희아가 다른 어떤 일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레슨 교사를 구한 뒤에도 어려움은 계속됐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 건반을 제대로 누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양손의 화음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희아양은 뇌의 구조상 셈이 되지 않아서, 다른 아이들은 저절로 맞추는 양손의 박자 균형을 익히는 게 쉽지 않았던 것.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매일 10시간씩 연습을 했는데도 양손의 화음을 맞추는 데만 꼬박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장애 고통 딛고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 어머니 우갑선의 감동 인생

초등학교 5학년 때 교내 학예회에 참가한 모습



“손가락 끝이 벗겨져 피가 나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매일 엄마한테 피아노 안 칠 수 없느냐고 울면서 매달렸죠.”
하지만 우씨는 희아양의 애원을 외면했다.
“울면서 도망치는 희아를 질질 끌어다 피아노 앞에 앉히곤 했어요. 날마다 전쟁이었죠.”
모녀의 치열한 전쟁은 결국 우씨의 승리로 끝났다. 희아양이 “피아노를 못 치면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엄마의 말에 승복한 것이다. 일단 마음을 잡은 뒤로 그의 실력은 나날이 발전했고, 우씨는 희아양을 피아노 대회에 출전 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희아가 일곱 살 되던 해인 92년에 ‘전국 학생 음악연주 평가대회’ 참가 신청을 냈어요. 그런데 주최 측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고, 장애인이 한 번도 이 대회에 나온 적이 없다’며 신청 자체를 받아주지 않았어요.”

장애 고통 딛고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 어머니 우갑선의 감동 인생

2003년 성악가 조수미씨의 서울 콘서트에 초대 받았을 때의 모습.





우씨는 “희아가 어릴 때부터 그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새삼스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우리 희아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더 끈질기게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희아양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질 성격을 최대한 발휘해’ 대회 주최 측과 끝까지 싸운 끝에 희아양을 대회에 내보낼 수 있었다. 희아양은 어머니의 노력에 100% 보답했다.
“무대에 오르면 다른 아이들은 긴장해서 실수도 하고 그러는데, 저는 평소 연습할 때보다 2배는 더 잘 쳤어요. 엄마도 깜짝 놀랐대요. 그때 알았죠. 제가 무대 체질이라는 걸요. 저는 무대에만 서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연주를 더 잘해요. 그리고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굉장히 좋아해서 피아노 레슨과 함께 성악 레슨도 받고 있죠.”
헬렌 켈러 같은 사람 돼 힘든 사람들에게 사랑 되돌려주고 싶어
이 대회에서 ‘은파’를 연주한 희아양은 비장애인들을 누르고 당당히 유치부 최우수상을 받았다. 상을 받으러 나온 그를 보고 심사위원들은 “네가 손가락이 네 개였느냐”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손가락이 네 개뿐인 아이가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희아양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 대회의 성공을 계기로 희아양은 점차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희아양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5학년 때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처음 쳤는데, 한계를 느꼈어요. 지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지만, 그때는 정말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죠. 사춘기 때도 슬럼프를 겪었어요. 저는 피아노 안 치겠다고 하고, 엄마는 무조건 치라고 하면서 참 많이도 싸웠죠. 피아노 안 치려고 화장실 들어가 안 나오고 버티다 엄마한테 끌려나온 적도 있어요.”
그런 그가 슬럼프를 극복하고 다시 피아노를 열심히 치게 된 데는 오른손을 쓰지 못해 왼손만으로 피아노를 치는 장애인 피아니스트 라울 소사의 내한 연주회를 본 것이 계기가 됐다. 99년 11월, 소사의 격려로 힘과 용기를 되찾은 희아양은 다시 혹독한 연습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피아노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아마 손이 마비돼 버렸겠죠. ‘피아노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평생 동안 저를 따라다닐 거예요.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잘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악질 엄마’가 옆에서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저는 엄마를 진짜 잘 만났어요(웃음).”
희아양의 세례명은 ‘히아친타’. 포르투갈의 작은 시골 마을 파티마에서 기적을 행한 성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히아친타는 이 땅의 많은 죄인들을 대신해 스스로 중병으로 고통 받기를 원했고, 병마와 싸우다 열 살을 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우씨는 희아양이 어린 시절 몸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이 세례명을 그대로 호적에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희아양은 기적처럼 잘 자랐고, 그래서 지금은 ‘기쁠 희(喜)’와 ‘싹 아(芽)’ 자를 합한 ‘희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호적에 올라가 있다.
“저는 제 이름이 참 마음에 들어요. 그 안에 담긴 뜻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의 싹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그리고 희망만 있으면 장애인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헬렌 켈러 같은 사람이 되어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장애인들에게 자기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고 싶다는 희아양. 그는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1m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키 탓이 아니다. 웃음으로 가득한 그의 뽀얀 얼굴에 천사 같은 순수함과 평안함이 가득 배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넘치고, 말 많고 웃음도 많은 ‘작은 천사’ 희아의 미래가 앞으로도 늘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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